〈 116화 〉 두근두근 신나는 합숙훈련
* * *
“…무슨 자신감인지 모르겠군. 주작단주.”
필요 이상으로 자신감이 넘치는 주작단주를 보며 모두가 의혹 어린 시선을 보낸다.
“설명이 부족했나 봐?”
그러면서 그녀는 콜로세움 한쪽을 바라보며 큰소리로 외친다.
“나와주세요!”
어딜 보고 나와달라고 하는 거지?
주작단주가 보는 곳은 콜로세움 구석.
거기에 존재감 없이 앉아있던 한 남자가 있었다.
언제부터 저기 있었던 걸까?
물론 정체를 들킬까 봐 기감을 뿌리는 등의 위험한 행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아예 내 육감에 잡히지 않았다는 점이 마음에 걸린다.
뚜벅 뚜벅
후드를 깊게 눌러써서 얼굴이 보이질 않네.
정말 더럽게 신비주의야.
빨리 신상공개 좀 했으면 좋겠다.
탁자에 있는 다른 검투단주들도 나와 생각이 같았는지 다리를 떨며 빈정거렸다.
“뭘 얼마나 대단한 인물을 섭외했다고 이렇게 뜸을 들이는지 원.”
“너무 조급해하지 마. 그러니까 네가 3분을 못 버티고 찍 싸는 거잖아?”
“뭐라고? 이 갈보년이 돌았나!”
주작단주의 카운터 펀치에 청룡단주가 발끈하는 순간, 의문의 남자가 후드를 벗고 정체를 공개했다.
사르륵
“…엇!”
“어어엇!”
“말도 안 돼!”
마지막 말은 내가 한 거다.
정말로 말도 안 되었거든.
난 지금 판타지아 대륙에 온 뒤로 가장 놀란 상태다.
“…이상철?”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옛 친우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이상철.
그는 내가 판타지아 세계로 전생하기 전 지구에서 나와 칠룡 코퍼레이션을 운영했던 친구다.
물론 나는 녀석의 뒤통수를 치고 아내를 뺏어서 내 여자로 만들었지.
그런데 왜 내 전생의 인연 이상철이 여기 있는 걸까?
이해할 수가 없다.
얼굴도 똑같다.
머리색 다양하고 피부도 하얀 유럽인처럼 생긴 연놈들로 가득한 판타지아 세계.
거기서 검은 머리 검은 눈동자.
전형적인 동양인 외모를 하고 주위를 둘러보는 게 똑 닮았다.
“용, 용사라니!”
“그렇다면 성녀도 같이 왔다는 건가?”
용사와 성녀.
72대천사와 직계약한 권속들이 직접 모나스 시티에 방문한 것이다.
나도 마왕과 천사들을 직접 만나본 만큼, 이들과 계약한 사람들 또한 얼마나 강할 수 있을지 잘 알고 있다.
당장 여자 마족과 계약한 올리비아만 해도 대륙의 손꼽히는 강자잖아?
“이게 말이 되는 건가? 용사와 성녀가 검투사로 참가해도 돼?”
가치관에 혼란이 오는지 백호단주가 미간에 잔뜩 주름을 잡은 채로 중얼거린다.
하긴 백호단주의 걱정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검투경기라는 것은 승자독식의 철저한 논리가 지배하는 곳.
용사와 성녀라고 해서 그곳에서 지면 얄짤없다는 말이다.
만에 하나 성녀가 거기서 진다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천사의 분신이라는 성녀가 강간을 당하고 용사가 죽임당한다면?
모나스 시티는 전대륙의 질타를 받아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용사와 성녀는 판타지아 대륙 사람들에게 희망의 상징 같은 인물들이다.
“주작단주, 당신은 미쳤어.”
“너무 단주를 탓하진 마시지요.”
매끄러운 미성이 원탁을 울렸다.
대표로 나온 용사가 입을 연 것이다.
아무래도 지대한 영향력을 지닌 인물이다 보니, 모두가 그의 입이 움직이는 걸 유의 깊게 지켜보았다.
“저와 성녀는 홀리엔 법국의 요청으로 자발적 참가를 하게 된 것입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주작단주의 도움을 받았을 뿐이지요.”
한마디로 주작단주 또한 의뢰받은 처지라는 말.
단주들은 복잡한 심경을 느끼며 용사에게 이유를 물었다.
“어째서입니까? 검투장은 이렇게 고귀하신 분들이 직접 뛰는 곳이 아닙니다.”
“당연히 저희도 검투사로 뛰고 싶진 않습니다. 하지만 우승상품 때문에 어쩔 수가 없군요.”
“우승상품이라면…천신의 눈물 말씀이십니까?”
나도 매튜에게 올해 검투사 대회의 우승상품을 듣기는 했다.
천신의 눈물.
이는 천신이 직접 흘린 눈물로 아무리 상위의 격을 가진 개체라도 단 1회에 한해서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 무시무시한 물질이다.
물론 자신보다 한참 격이 높은 존재라면 완전한 매혹이 불가능하지만, 최소 하루에서 일주일 정도만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어놔도 세상을 바꿀 수 있을 정도의 지위를 가진 사람들은 이 세상에 널리고 널렸다.
“천신의 눈물은 원래 홀리엔 법국 내 세피르 성당에서 중히 보관하고 있던 성물이었습니다.”
원래 자신의 것이었다는 건가.
일단은 사정을 더 들어보기로 한다.
“갑작스럽게 강림한 마왕 아유나를 마계로 돌려보내느라 성당이 무너지고 성물이 사라져서 한참을 찾다가, 이번 모나스 시티 우승 상품에 천신의 눈물이 걸린 것을 보고 급하게 오게 된 것입니다.”
그랬구나.
용사의 목적은 천신의 눈물이었어.
아직도 난 용사가 이상철로 보여서 혼동이 오는 중이다.
“이건 말도 안 되오! 모나스 시티와 검투장을 사랑하는 모든 팬에 대한 기만이야!”
“내 생각도 그렇습니다. 용사가 능력으로 우승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만에 하나라도 지면 그 역풍을 어찌 감당하실 생각이오?”
용사가 검투장에 나오면 72대천사의 힘을 가져올 테니 너무 압도적으로 이겨서 재미가 없을 것이고, 만에 하나 반전으로 지면 전 대륙의 적개심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러나저러나 손해인 것이다.
“주작단주, 이번엔 좀 많이 경솔했어.”
“미안하지만 용사와 성녀님이 이기면 깔끔하게 끝나는 거 아니야? 게다가 용사와 성녀가 검투장에 나온다는 소문만으로 올해 검투대회는 대호황일걸?”
주작단주는 단순히 노이즈 마케팅으로 좋은 패라 생각한 건가?
그리고 매해 다른 4대 검투단과 비교해서 한 끗발 밀린다는 인식도 벗어나고 싶은 거겠지.
그녀의 머릿속 생각이 무엇인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된다.
하지만 난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야.
“…이상철? 너 상철이냐?”
아차.
나도 모르게 좀 목소리를 키웠다.
물론 후드를 눌러쓰고 있어서 내 모습이 보이지 않기도 하거니와, 난 예전의 송길준이 아닌 완전히 다른 외모의 데이몬이었기에 들킬 리는 없지만 말이다.
“웃기는 놈이네. 저놈 누군데 용사 이름을 함부로 불러?”
용사 이름이 이상철.
지구에서와 똑같은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나 보구나.
기분이 미묘하네.
반갑기도 하고 좀 이상하기도 해.
“…아뇨, 개인적으로 용사님을 무척이나 존경해서 순간 저도 모르게 말이 나갔습니다, 죄송합니다.”
“핫하하! 저로서는 꽤나 많이 겪는 일입니다. 크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특유의 호탕한 웃음으로 내 우발적인 행동은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이상철이 용사였다니.
정말 판타지아 세계는 예측 불가능이야.
“그럼 용사의 검투대회 참가에 이의는 없는 거지?”
“당연히 불만이지만, 우리 말을 들을 것도 아니잖나? 홀리엔 법국까지 뒤에 있다면 할 수 없지.”
“하지만 주작단주, 만에 하나라도 용사나 성녀의 패배로 인해 모나스 검투장이 피해를 받는다면…각오해야 할 거야.”
드르륵
주작단주의 대답도 듣지 않고 청룡단주가 의자를 일부러 거칠게 끌고 일어나 퇴장했다.
이를 따라가는 백호단주.
주작단주는 여유롭게 다리를 꼰 채로 그들을 비웃었다.
“너희는 이들의 진면목을 몰라서 그래. 어차피 우승자는 용사 아니면 성녀다.”
그렇게나 강한가?
이상철에게 악마의 눈을 쓰고 싶지만, 전에도 그렇고 천사와 악마의 하수인들은 악마력을 이용한 스킬을 민감하게 감지하길래, 들킬까봐 스킬을 쓰지 않는 중이었다.
이래저래 이번 검투대회는 쉽지 않겠군.
물론 나와 내 일행들은 검투대회 우승이 목적이 아니라 루나를 구하는 게 최우선 목표긴 하다.
…그래도 천신의 눈물이라는 검투대회 우승 상품이 조금 탐나긴 하네.
잘만 하면 나보다 훨씬 상위의 개체도 내 편으로 만들 수 있다는 거 아니야?
그 정도의 눈물이면 전에 올리비아의 집에서 만났던 마왕 벨리알도 순간 내 아군으로 만들 수 있겠지?
새삼스럽게 검투장 우승 상품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 느껴졌다.
그러니깐 용사와 성녀도 눈에 불을 켜고 안면몰수한 채 검투장을 찾아온 것이겠지.
“매튜, 그러면 나도 가볼게. 비록 반 토막 난 현무단이지만 적어도 4대 검투단 타이틀을 지킬 수 있었으면 좋겠네.”
마지막으로 매튜의 어깨를 한번 토닥여주고 퇴장한 주작단주.
그런 그녀의 뒤를 용사 이상철이 자연스럽게 따라 나간다.
원탁회의에 마지막 남은 건 매튜와 우리 현무단 출신 검투사들뿐.
모두가 사라지자 난 내 본색을 드러냈다.
“제법 괜찮은 연기였다.”
“…흐흑, 감사합니다.”
역시나 울음을 참고 있었는지 바로 눈물을 쏟아내네.
아내 클레어를 빼앗긴 충격에서 아직까지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구나.
“주인님, 상황이 어렵게 되었습니다. 용사라니요. 이러면 검투대회에서 우승을 하기 어려워진 것 아닙니까?”
“엘리샤, 우린 우승이 목적이 아니잖아?”
“그, 그렇군요. 저도 모르게 잠시 헷갈렸었나 봅니다.”
다른 애들도 막상 판이 이렇게 되니 검투대회 우승 욕심이 있었나 보다.
뭐, 의욕이 없는 것보다야 낫지.
“그보다도 검투대회 내내 루나와 따로 접촉할 방법을 알아봐봐.”
일단 오늘 이후로 나와 셰릴을 위시한 검투사 조는 콜로세움에서 생활할 것이다.
콜로세움은 단순히 싸움터만 있는 게 아니다.
건물의 지하에는 어마어마한 면적의 공동이 있는데, 그곳에는 검투사들을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들이 갖추어져 있다.
노예 검투사들은 그 지하 공동에서 영원히 갇혀 지내다가 투견처럼 검투장 위에서 죽을 운명.
그나마 평민 검투사들은 콜로세움 밖으로 외출이 가능하지만, 일부러 훈련을 위해서 지하에서 같이 생활하는 사람도 많다고 들었다.
“그럼 본래 현무단 검투사들은 어떻게 콜로세움 바깥으로 나왔던 거지?”
“4대 검투단이었으니깐요. 아무래도 출입의 자유가 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역시나 여기도 좋은 회사 들어갔으면 운신의 자유가 주어지는 건 똑같구나.
그다지 놀라울 것 없는 일이다.
“그러면 오늘부터 나와 검투사 조들은 콜로세움에서 생활할게. 소피아는 메이, 올리와 함께 바깥을 책임져 줘.”
내 명령에는 매튜의 감시라는 중의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리고 똑똑한 여자 소피아는 그 의도를 모를 리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뭐, 매튜 놈이 뭘 하려고 해도 고독으로 머리가 점령된 상태에서는 할 수 있는 짓이 없겠지만 말이다.
“그러면 저와 매튜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건투를.”
“흐앙, 남편이랑 또 떨어져 지내야 한다니. 울고 싶어.”
메이의 칭얼거림을 뒤로하고 운영단 조가 사라졌다.
남은 건 나와 링링, 에밀리와 셰릴, 그리고 엘리샤뿐.
“그러면 일단 콜로세움 지하로 내려가서 검투사 놈들이 어떻게 생활하는지 보자고.”
이른바 미녀 4명과의 두근두근 신나는 합숙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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