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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5화 〉 어차피 우승은 주작단이다



〈 115화 〉 어차피 우승은 주작단이다

* * *

그날 저녁.

내가 지금 어딨냐고?

4대 검투단 회동에 나와 있다.

회동장소는 바로 모나스 검투장.

콜로세움으로 불리기도 한다.

나름 4대 검투단이라고 황금 같은 저녁 시간대에 콜로세움을 통째로 빌린 모양이다.

가만 보니깐 이 회동 자체가 모나스시티 주민들의 이목을 끄는 활동으로 보인다.

지구로 치면 올림픽 개막식 전 조 추첨하는 느낌이겠네.

검투 경기 좋아하는 팬들은 귀를 쫑긋 세울 수밖에 없는 소식이겠어.

특히나 매튜의 현무단은 최근 마녀의 숲에서 큰일을 당했다는 소문이 모나스 시티에 널리 퍼져있는 상태.

콜로세움의 입구를 병사들을 동원해 막아서 어중이떠중이들을 차단했는데도, 검투장 바깥에는 구경하는 인파들로 바글바글하다.

새삼스럽게 이 도시가 검투대회에 얼마나 진심인지 느껴진다.

드르륵

눈 앞에는 콜로세움 정중앙에 임시로 설치해놓은 원탁이 보이고, 총 다섯 사람이 앉아있다.

청룡단주, 백호단주, 주작단주, 현무단주가 원탁의 동서남북 방향으로 앉았고, 예외적으로 현무단주 매튜의 옆에 소피아가 다소곳이 착석해 있었다.

회의는 현무단에 대한 청문회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아무래도 마녀의 숲에서 일어난 사건서부터 시작해서 모나스 시티 화제의 검투단이 되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

찰칵 화르륵

가슴 속에서 두꺼운 시가를 꺼내서 입에 문 청룡단주가 덥수룩한 수염을 쓰다듬으며 현무단주를 본다.

“매튜, 못 보던 사이에 고생이 많았나 봐? 얼굴이 반쪽이 되었군.”

“네놈이 상관할 바가 아니야. 그리고 좋은 일이 있었으면 있었지, 나쁜 일은 없었네.”

매튜와 청룡단주는 그렇게 좋은 사이는 아니었나 보네.

하긴 그럴 수밖에 없나?

서로 덩치가 큰 검투단이니 협력하면서 또 경쟁하는 관계였겠지.

“어떻게 상관을 안 할 수 있겠어? 우리는 4대 검투단으로 불리고 있잖아. 우리 넷 중의 한 곳이라도 그 명성에 어울리지 않는다면 다 같이 욕을 먹는데 신경을 써야 하는 게 맞지 않나?”

은연중에 현무단 축출에 대한 화제를 슬쩍 입에 올리는 청룡단주.

한마디로 이미 현무단이 마녀에 의해 전멸한 것 다 알고 있으니 4대 검투단 이름에 먹칠하지 말고 알아서 곱게 현무단 이름 내놓고 내려가라는 말이다.

“네가 뭘 모르는 것 같은데 말이야…”

매튜의 연기는 너무나 능숙해서 몇 시간 전에 눈앞에서 아내 클레어를 나에게 뺏기고 질질 짜던 놈으론 보이진 않는다.

그래도 나름 모나스 시티의 지도자층에 오래 있던 짬밥이 보이네.

찰칵

역시나 여유롭게 가슴팍에서 담배를 하나 꺼내서 입에 무는 매튜.

물론 그의 손이 미세하게 덜덜 떨리긴 했지만, 여기서 그의 불안감의 원인을 눈치채는 놈은 없었다.

덥썩

그런 매튜의 담배가 고사리 같은 섬섬옥수에 막혔다.

“담배는 건강에 좋지 않아요, 여보. 하루에 두 개비만 피기로 했잖아요? 벌써 오늘치를 다 피셨다고요.”

옥구슬같이 매끄럽게 굴러가는 아름다운 미성이 원탁에 앉아있는 단주들의 귀에 꽂혔다.

“…그쪽 레이디는?”

“아, 소개하지 않았군. 마녀를 처치하는 과정에서 만나게 된 소피아라고 하네.”

“반갑습니다. 모나스 시티를 이끌어가시는 위대한 왕들이여, 저는 소피아라고 합니다.”

왕이라는 표현을 쓰자 몇몇 검투단주의 얼굴에 의혹이 서린다.

“…왕? 위험한 표현을 쓰는데. 못 배운 년이라 높은 사람은 다 왕처럼 보이는 건가?”

청룡단주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지만, 이를 못 들은 사람은 여기에 없었다.

이 자리에 단주가 아님에도 자리에 착석한 그녀를 무시함과 동시에 매튜를 견제하는 언행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매튜의 폭소.

“푸하하하! 못 배운 년이라니. 자네는 소피아가 어떤 여자인지 전혀 모르고 있어.”

“…얼굴이 예뻐서 첩 삼은 거 아니었나? 나는 계집을 여기까지 데려온 걸 보고 매튜 자네가 망조가 들은 줄 알았는데?”

단주들의 의혹 어린 시선을 한눈에 받으면 소피아가 우아하고 다소곳하게 일어났다.

여기까진 아주 좋아.

그녀의 연기는 일품이고, 매튜도 나름 선전하고 있어서, 다른 단주들은 전혀 내가 만들어놓은 판의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반갑습니다, 리만 표국주의 딸 소피아라고 합니다. 제국 아카데미 731기수 졸업생이자 졸업연설을 맡았었어요. 다시 한 번 단주님들을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녀가 진정한 신분을 밝히자 몇몇 단주들의 얼굴에 놀라움이 서린다.

이래서 소피아를 매튜의 아내 역으로 맡긴 거지.

죽기 전에 세계 지구나 여기나 학벌하고 출신 먹히는 건 여전하구먼.

“청룡단주님? 졸업파티 당시에 제게 와인을 따라주면서 리만에 아름다운 꽃이 피었다고 해주시지 않았나요? 그때는 참 감사했습니다.”

그런 적이 있었어?

보니깐 청룡단주는 기억 못 하는 거 같은데.

단주 놈 이마에 땀 한 방울이 송글송글 맺혀있는 거로 봐서는 제법 나쁘지 않은 공격이었던 것 같다.

“그…그 소피아? 리만 표국?”

“네, 비록 표국은 마녀의 손에 망했지만…여기 매튜님의 도움으로 구사일생으로 살아날 수 있었어요.”

학벌과 출신으로 찍어누르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이 이 자리에 앉아있을 자격이 있음을 말하며 파고들었다.

“아카데미에서는 돈과 영향력이 곧 신분이었죠. 모나스에서는 여기 있는 네 분이 곧 왕이 아닐까 해서 그렇게 표현한 것뿐이었습니다.”

제국 최고 교육기관에서 그랬다는 말에 딴지를 걸 미친놈은 여기 없는 듯했다.

“클레어만 불쌍해진 건가…아무튼 반가워요, 소피아.”

옆에서 주작단주의 중얼거림과 함께 소피아는 원탁회의의 일원이 되었다.

“그나저나 매튜, 자네가 아름다운 아내를 맞이한 건 축하할 일이네만, 여전히 자네의 검투단이 우리의 수준에 맞는지는 회의적일세.”

청룡단주가 계속해서 불편한 목소리로 매튜를 건드렸다.

하지만 주작단주와 백호단주가 이를 제지하지 않는 거로 보아, 사전에 세 단주가 입을 맞췄으리라 예상한다.

“청룡단주, 자네의 우려는 합리적이야. 확실히 마녀를 퇴치하는 과정에서 현무단은 씻을 수 없는 타격을 입었지. 하지만 그 와중에 또 다른 새로운 인연을 만난 것도 사실일세.”

“새로운 인연?”

“그래, 나도 다 망가진 전력으로 4대 검투단의 후광을 누릴 생각은 없네. 다만 지금의 내가 거느린 전력은 충분히 현무단에 어울린다고 생각해.”

지금이 타이밍이다.

나와 엘리샤, 그리고 링링과 셰릴, 마지막으로 에밀리가 자연스럽게 앞으로 나섰다.

1명의 남자와 4명의 여인.

물론 모두 레벨 가리개를 꼈기 때문에, 겉으로만 봐서는 우리의 수준을 알 수 없다.

“이자들은…”

“마녀를 물리치는 데 큰 도움을 준 무사들일세. 마녀에 의해 갇혀있다가 우리 현무단의 손에 구출되었지.”

“그러면 현무단주는 저 계집들 넷에 비리비리해 보이는 남자 놈을 검투사로 세우겠다는 건가요?”

옆에서 주작단주의 뾰족한 고음이 들렸다.

그나저나 계집들 넷이라니.

주작단주 본인도 계집이면서 입이 걸레짝이네.

“단순히 보이는 거로만 판단하지 마시죠. 검투규정상 레벨을 공개할 순 없지만, 충분히 수준에 맞는 전사들입니다.”

하긴 내 여자들이 몸매는 좋지만 어쨌든 체구가 큰 건 아니니깐 말이야.

“남자 좆 잡고 허리는 잘 돌릴 것 같은 년들이네, 낄낄.”

백호단주 또한 천박한 언행으로 우리를 무시한다.

모욕적인 언행을 참지 못한 링링이 참지 못하고 나섰다.

“단주님 오랜만이다멍! 백호단에서 상대를 얕보면 당한다고 했으면서 본인이 그 말을 안 지킬 줄은 몰랐다멍!”

“…링링? 넌 내가 팔았는데?”

역시나 링링을 알아보는 백호단주.

루나 족장이 백호단 출신이라 하더니만 링링도 단주를 알아보는 모양이다.

“마녀에게 잡혔다가 현무단주님 도움으로 여기 있게 되었다멍! 나 다시 검투사 한다멍!”

“으음…그렇군.”

링링은 팔리기 전에도 콜로세움의 유명한 검투사 출신.

그녀의 자격을 논하는 사람은 여기 없을 게 당연하다.

여세를 몰아 소피아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링링뿐만이 아니에요. 여기 있는 고귀한 여기사 셰릴, 잔뼈 굵은 용병 엘리샤, 천재 검객 소녀 에밀리, 그리고…”

야.

왜 날 보고 말을 못하는데?

저놈들이 이상하게 여기잖아?

빨리 말하라고.

“….데이몬.”

“응?”

“그게 끝인가?”

그렇게만 설명하면 어떡해?

존나 쪽팔리네.

내가 나가서 셀프 소개라도 해야 하나?

“…데이몬은 데이몬입니다. 더 할 말이 없군요. 암튼 강하긴 할 겁니다. 그것도 무지하게요.”

소피아의 두서없는 설명과 함께 현무단 주요 전력에 대한 공개가 끝났다.

“크흠흠, 일단 링링과 소피아, 이 둘을 보고 믿어보기로 하지. 4대 검투단의 명성에 먹칠하지 않길 바라마.”

우승은 당연히 불가능하고 먹칠만 하지 말라는 청룡단주의 말에 우리가 얼마나 무시당하는지 느껴졌다.

현무단에 대한 얘기가 끝나자 자연스럽게 이번 검투단 우승을 누가 할 것인가로 화제는 옮겨졌다.

아직 현무단의 전력은 밝혀진 것이 없으니 매튜는 침묵을 고수했고, 나머지 단주들은 각자 자신의 최강의 카드를 자랑하기 바쁘다.

“크하하하! 우리 청룡단이 이번 시즌에 새로 영입한 전 알비온 연맹 팔라딘 요한일세.”

쿵 쿵 쿵

그러면서 청룡단주의 옆에 기립해있던 2m가 넘는 거대한 체구의 사내가 자연스럽게 기운을 흘렸다.

제법인데?

난 이미 저놈을 악마의 눈으로 살펴본 참이었다.

중갑대주 트런들이랑 힘싸움을 해도 밀리지 않을 것 같은 거구.

특히나 레벨은 40대 후반.

마스터의 반열에 올랐으니 만만치 않은 상대로 보인다.

“요한의 도끼에 맞은 놈은 방패까지 한 방에 터지곤 하지. 미안하지만 이번 검투대회는 우리 청룡에서 가져가겠네.”

그러면서 청룡단주는 백호단주를 힐끗 본다.

왜냐하면, 작년 검투대회는 백호단이 우승했기에.

백호단이 우승했던 이유는 단순했다.

단 한 명의 검투사 때문.

그리고 그 에이스가 지금 조용히 모습을 드러낸다.

저벅 저벅

아, 예쁘다.

하얀 눈꽃이 살랑대며 걸어오는 것 같다.

기다란 속눈썹과 하늘거리는 눈부신 백발.

내가 봤던 그 어떤 수인족 여자보다도 길고 매끄러운 꼬리.

접혔다 펴지기를 반복하는 귀여운 동물 귀.

눈이 부실 것 같이 하얀 피부와 귀여운 얼굴에 비해 폭력적으로 라인이 살아있는 멜론만 한 부드러운 젖가슴과 힙업된 골반까지.

저 여자구나.

저 여자가 바로 루나였어.

“크흠! 루나 저년이 또 나오는군.”

청룡단주는 딱 봐도 루나를 엄청 싫어하는 듯했다.

하긴 상대팀의 에이스인데 좋아하면 그것도 이상한 그림이긴 하지.

“…링링, 나머지 애들은 어떻게 되었냐멍?”

다른 검투단주들은 안중에도 없는지 오로지 링링에만 시선이 꽂혀서 부하들의 안부를 묻는 것 보니 지도자로서도 상당한 자질이 있어 보인다.

“루나, 여긴 검투사 따위가 말을 붙일만한 자리가…”

“링링, 애들은 어찌 되었는지 말해달라멍.”

와우.

모나스 시티 실력자의 말을 잘라버렸네.

백호단주는 자신의 말이 씹히자 얼굴이 시뻘게졌지만, 별다른 말을 하지는 못한다.

그만큼 백호단에서 루나의 영향력이 상당하다는 말이겠지.

우승 트로피 들어 올리게 해준 주역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건가?

“모두 괜찮다멍! 족장은 걱정하지 말라멍!”

“…다행이다…”

그러면서 루나는 한결 온화한 표정으로 백호단주에게 고개를 숙이고 다시 콜로세움 안에 있는 자신의 숙소로 들어가버린다.

“저 싸가지 없는 년! 진짜 싸움만 못 했어도 진작에 팔다리 잘라서 수말들에게 돌렸을 텐데! 에잉! 쯧쯧!”

아무래도 백호대주는 본인 소속의 검투사임에도 딱히 애정은 없는 모양.

둘 간의 관계가 어떤지 익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럼 귀여운 검투사 자랑은 대충 끝났다고 봐도 되는 건가요?”

옆에서 들려오는 주작단주의 목소리에 모두의 이목이 쏠린다.

4대 검투단주 중에 유일한 여성이고 매년 검투대회 때마다 3, 4위권을 유지해서 사실 그다지 임팩트는 없는 검투단이었다.

“이봐, 주작단주. 어디서 제대로 된 놈이라도 보지로 물어온 거야?”

“낄낄! 어떤 미친놈이 저년 늙은 보지 먹겠다고 주작단에 가겠냐?”

청룡단과 백호단은 이때다 싶어 주작단주를 놀린다.

“난 보지로라도 꼬실 수나 있지, 너희 같은 실좆은 어디다 갖다 써?”

“……”

저렴한 성희롱에도 표정변화 하나 없는 것 보니 얼마나 이 바닥에서 굴러먹었는지 보이네.

“그래서 이번 시즌에도 주작단은 별거 없는 건가?”

은근한 견제의도가 담긴 청룡단주의 말에 주작단주의 립스틱 짙게 바른 한쪽 입술이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미안한데, 이번 모나스 검투대회 우승은 우리 주작단이다.”

* * *



사상 최악의 주인공〈 115화 〉 어차피 우승은 주작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