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6화 〉 손바닥 위에서 춤을 춰보렴
* * *
“이야, 진짜 많이 달라졌네? 어디서 체력단련 좀 했나 봐?”
로이는 날 보고 약간은 놀란 눈치였지만, 나도 로이를 보고 놀랐다.
애가 너무 없어 보여서 말이다.
환골탈태 전에는 이 녀석이 나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컸었다.
몸도 탄탄해서 지구에서 나름 헬창이라 불리던 나도 저놈 피지컬만큼은 인정했었다.
그런데 지금 이놈을 봐라.
나는 키가 커져서 눈높이가 금발태닝 놈보다 높아졌는데, 저놈은 오히려 몸이 퇴보해서 몸이 얇아졌다.
무엇보다 이마에서 빛이 나는 게 슬슬 남자들의 악몽이라는 그 증상이 온다는 걸 알 수 있었다.
20대 초반에 그게 오다니.
아무리 판타지아 대륙인의 평균 수명이 짧다지만 눈물이 앞을 가리는 건 매한가지다.
“형님 잘 지내셨습니까? 여전히 건강한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의례적인 인사를 한 번 하고 도저히 참지 못해서 한마디 더 덧붙인다.
“특히 머리가요.”
“……”
남자끼리는 절대 건들면 안 되는 불문율을 건드렸지만 괜찮다.
나는 사상 최악의 주인공이니까.
하늘에서 나를 지켜보시는 의문의 성좌님들은 내가 여태껏 벌인 살인과 강간보다도 방금의 발언을 더 심각하게 여길지도 모른다.
혹시나 뜨끔하셨을 분들에게는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전한다.
각설하고.
예상대로 내 말을 들은 로이형의 안면은 예쁘게 찌그러졌다.
보기 좋은 표정이었다.
“그래. 너도 건강해 보이니 좋구나. 레벨도 여전하고 말이다.”
아직도 레벨 가지고 자위질을 하네.
하긴 그러라고 일부러 레벨 가리개를 끼지 않았다.
내 레벨 보고 마음 푹 놓으라고 말이다.
“오랜만입니다. 로이 도련님.”
우리 둘 사이에 여성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아름다운 셰릴이 루비 눈동자를 반짝이며 로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자 둘째 형님의 얼굴에 반가움이 차오르며 환해진다.
물론 이마에서 반사된 빛보다는 환해지지 못했다.
거듭 말하지만, 광범위 공격에 예기치 않게 당한 성좌님들에겐 다시 한번 사과한다.
“이게 누구야! 셰릴 아닌가! 너무나 아름다워졌구나!”
흥분해서 콧김을 뿜으며 셰릴의 손을 붙잡으려는 걸 그녀가 뒤로 보법을 밟아 자연스럽게 피했다.
“그간 무탈하셨습니까?”
“그, 그래.”
예상보다 셰릴의 몸놀림이 뛰어나서일까?
로이형이 약간 당황한 것 같길래 셰릴에게 눈치를 주었다.
“아앗!”
아니, 평상시에 연기를 잘하던 년이 갑자기 왜 저래?
손등으로 이마를 짚고 몸을 휘청거리는데 내 얼굴이 다 화끈해졌다.
“많이 피곤하네요. 실내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다행인 건 로이형이 여전히 눈치 따윈 밥 말아먹은 근육돼지였고, 셰릴의 가녀린 몸이 이 상황의 개연성을 얼추 부여해줬다.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들을 보다 보니 내가 실례를 범했네. 들어오게들.”
그나마 셰릴이랑 와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마 혼자 왔으면 들여보내지도 않고 밖에 서서 용건을 말했을지도.
로이가 앞장서서 걷고 있었고 가운데 셰릴, 맨 뒤에 내가 걷고 있었다.
저택 안은 화려했다.
캘리알 성 내 영지민들의 생기 없던 얼굴과 비교하면 저택을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기름이 번들거렸고 무지한 탐욕만이 가득해 보였다.
저택 곳곳에 느껴지는 꽃향기만으로도 영지 전쟁의 처참함이 꿈처럼 느껴졌으니.
셰릴도 심히 대조적인 안팎을 느꼈는지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뒤에 가던 내가 셰릴의 엉덩이를 가볍게 찰싹 쳤다.
재빠르게 쳤기에 아무도 보지 못했고, 인상을 쓰던 셰릴이 그 즉시 방긋 웃으면서 표정 관리를 했다.
“이곳이 만찬장이다. 사랑하는 동생과 아름다운 셰릴 경이 왔다는 소식에 힘껏 준비했으니 마음껏 들어라.”
힘껏 준비했다고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반찬의 가짓수가 많다는 얘기는 아니다.
판타지아 대륙은 기본적으로 중세 유럽과 풍습이 비슷해서인지 코스요리가 발달했다.
자리에 앉자 하녀들이 익숙하게 에피타이저를 내놓았다.
첫 번째 요리는 조개 수프였다.
“조개는 매일 먹어서 질리는데.”
내 말에 만찬장이 조금 싸늘해졌지만 뭐 어떠랴. 사실인걸.
옆에서 셰릴이 거들어준다.
비웃는 듯한 표정과 한심하다는 말투는 덤이다.
“여기 조개는 처음 드시잖아요. 처음 드시는 조개는 좋아하시면서 언제부터 편식하셨다고.”
하긴 그렇지.
셰릴 다리 사이에 있는 조개는 질리도록 먹었고, 다른 조개도 많이 섭취했지만 켈리알 성 조개는 먹은 적이 없으니 셰릴의 말이 맞다.
“하하, 두 사람 사이는 여전한가 보군.”
오기 전에 어떻게 연기할지 미리 정해왔던 셰릴.
예전처럼 나를 무시하고 경멸하는 태도를 아낌없이 보여주었다.
로이 형은 그 모습이 흡족한지 병신같이 턱을 손으로 문지르고 피식거리고 있다.
못 보던 2년 동안 내가 셰릴을 꼬셨을까봐 내심 걱정했겠지.
꼬시진 않았고 보지 색깔만 조금 변할 정도로 쑤셔줬으니 로이형이 그렇게까지 걱정할 이유는 없었다.
“마담께서 오십니다.”
“…어머니가?”
오! 엉덩이 빵빵한 우리 어머니가 오시는군.
기대감에 심장이 두근두근 떨렸다.
어머니에 관해서는 할 말이 많다.
2년 전 크래스 장원 영주로 임명되어 처음 그곳에 도착했을 때, 영지민들은 나를 독살하고 셰릴과 메이를 육변기 삼으려 했었다.
하지만 무지렁이 농노들이 뭘 알고 독살 시도를 하려 했겠는가?
다 나를 고깝게 여긴 높으신 분들이 사주했으니까 그놈들이 눈 뒤집혀서 저질러버린 것이다.
그리고 독살을 사주한 범인을 내 어머니들일 가능성이 약간은 있다고 생각한다.
한…99.99999%?
100%라고 말하긴 조심스러우니 조금은 깎았다.
남은 건 형들이 공범이냐 아니냔 데.
솔직히 로이가 하는 짓을 보니깐 절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저렇게 날 가벼이 여기는 놈이 독 같은 치졸한 수를 쓸 이유가 없다.
무식하고 힘밖에 모르는 이 금발 태닝 양아치놈은 언제든지 칼로 날 쳐죽이면 될 거로 생각했을 테니.
그리고 첫째 형 제임스.
이 형은 조금 애매하다.
성격 자체가 음침해서 아마 어머니들이 날 독살하려는 계획을 사전에 알았을 수는 있다.
하지만 이 형 또한 나를 없는 사람 취급했기에 먼저 독살 계획을 꺼내진 않았을 것이다.
다만 방관했겠지.
한마디로 난 후계자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두 형보다 새엄마들에게 감정이 더 쌓여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건 영지민들에게 끔찍한 일을 당할 뻔한 셰릴도 마찬가지인지 들고 있는 스푼이 미약하게 떨리는 걸 확인했다.
“어머니, 오랜만입니다.”
내 얼굴을 확인한 둘째 엄마의 얼굴에 짧게나마 여러 감정이 스친 걸 확인했다.
처음엔 놀랐다가 약간의 실망감.
그 가증스러운 표정에 사랑스러운 의붓아들이 손수 임플란트를 해드리고 싶었지만 여긴 치과가 아니어서 참았다.
“마담 베르너, 레이디 셰릴입니다.”
아무튼, 둘째 엄마는 여전히 빵빵한 엉덩이에 풍만한 가슴을 자랑했다.
운동만 줄창 했는지 2년이 지나도 노화는 딱히 느껴지지 않았다.
“반갑구나.”
정말로 반갑지 않은 얼굴로 새엄마가 반갑다고 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내 인사는 받아주지도 않고 셰릴만 노려본다.
내 인사 안 받아준 건 그러려니 한다.
원래도 날 사람 취급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셰릴에게까지 적대감을 보이는 건 의외다.
뭐지?
옛날에는 셰릴 좋아하지 않았나?
“오랜만에 봐서 반갑기는 한데, 무슨 낯짝으로 캘리알 성까지 왔는지 모르겠구나. 셰릴 몬두르.”
이거 꽤나 재밌는데?
여태껏 저런 가시 돋친 말은 보통 내가 듣곤 했는데.
셰릴에게 하다니.
이유가 뭘까?
“어머니! 셰릴 경 앞에서 그게 무슨 망발입니까?”
“백작이야말로 정신 차리시지요. 저년 아버지만 아니었어도 우리가 이렇게 어려울 일도 없었습니다.”
아하, 그래서였군.
소식은 들었다.
셰릴의 아버지 핀돌프 몬두르 기사단장이 제임스의 편에 서서 로이 측 기사들의 목을 가을철 추수하듯이 수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무래도 저 여편네는 자기들이 이길 싸움을 기사단장 때문에 질질 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고, 그래서 그의 친딸인 셰릴이 꼴도 보기 싫은 상태인가 보다.
“저년에게 수갑을 채우고 지하 감옥으로 보내도 모자랄 판인데. 저녁을 대접하다니요. 제가 지금 제대로 본 게 맞습니까? 백작?”
“어머니! 말씀이 심하십니다! 셰릴 경에게 사과하십시오!”
“제가 왜요? 오히려 정신을 차려야 할 건 백작입니다. 저년의 엉덩이와 가슴이 그리 좋습니까?”
“어떻게 그런 소리를!”
로이가 눈에 핏발이 설 정도로 흥분한다.
저 정도로 셰릴을 좋아할 줄 몰랐는데.
은근히 순정파였구나?
셰릴의 헐거운 중고 보지를 보고도 그 순정을 유지할 수 있을지 궁금하네.
자꾸 얘기가 딴 곳으로 새는데, 둘째 엄마와 그 아들 사이가 몇 년 사이에 좋지 않아졌다는 건 알 수 있었다.
후계전쟁에서 점점 밀리고 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겠지.
애초에 이기고 있으면 나와 셰릴을 부를 생각도 하지 않았을 거다.
“여봐라! 어머니를 뫼셔라!”
“백작, 상황을 똑바로 보셔야 합니다! 무엇이 중한지 순서를 정해서…이거 놔라! 놔!”
혼란하다, 혼란해.
결국 둘째 엄마가 등장과 동시에 빠르게 끌려 나갔다.
“추태를 보여서 미안하오, 셰릴 경.”
“아니에요. 충분히 이해해요. 저희 아버지가 잘못한 거잖아요.”
저 개새끼가 나한테는 끝까지 미안하단 말 한마디 없다.
없는 사람 취급하면서 계속해서 셰릴과 대화.
“그건 그렇고. 근래에 괴이한 소문이 하나 돌고 있습니다. 백작령 북쪽에 거대도시가 하나 생겼다지요?”
맞다, 그래서 네놈이 날 초대했잖아.
그런데 이렇게 꿔다놓은 보릿자루 취급이냐?
물론 혼잣말이다.
“강력한 용병단뿐만 아니라, 즉시 동원 가능한 1천 명 이상의 군대가 있다는 소문이 돌더군요.”
그래, 다 내가 심혈을 키워 만든 병력이다.
실제로는 1천 명도 아니고 그 이상이긴 하지.
“영특한 셰릴 경이라면 그런 일이 가능했으리라 봅니다.”
아니, 내가 했다니까?
“셰릴 경, 소문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입니까?”
아니, 시발롬아! 내가 했다고!
물론 속마음이다.
“로이 백작님, 보다시피 마녀의 숲이 개방되면서 분에 넘치는 세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백작님께서 들으신 소문은 모두 진실입니다.”
저놈 입 벌어지는 거 봐라.
어찌나 놀랐는지 젖지 않은 셰릴의 생보지에 들어가는 손가락 개수만큼 입을 크게 벌린다.
“그렇다면…”
“물론 지휘권은 저에게 있습니다. 맞죠? 도련님?”
셰릴의 깔보고 으스대는 듯한 표정.
예전부터 저 연기 하나는 정말 일품이다.
당연히 나는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고개를 숙이고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그, 그렇지. 난 셰릴 말만 듣기로 했으니까.”
“네, 그렇답니다.”
셰릴은 그런 나를 한심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측은함 한 스푼을 더하고 약간의 다정함을 담아 말한다.
“그래도 데이몬 도련님께서 고대 마녀가 개발한 마력 폭탄을 마녀의 숲에서 발견한 덕분에 몬스터를 모두 소탕할 수 있었습니다. 그거 하나는 칭찬해드리고 싶군요.”
은근슬쩍 나에게 공을 돌리며 어떻게 이런 행운이 오게 되었는지까지 로이에게 어필했으니 상황 끝.
지휘권을 포함한 모든 실권은 셰릴에게, 난 그저 운 좋은 망나니 공자.
현재 로이 녀석은 영지 전쟁에서 패색이 짙고 이 상황을 뒤집을 병력이 절실한 상태.
그때 마침 자신의 성을 찾아온 기천 병력의 통수권자이자 짝사랑녀.
야, 판은 다 깔아줬다.
어디 한번 내 손바닥 위에서 신명 나게 춤 춰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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