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5화 〉 금발 태닝 양아치와의 재회
* * *
초대장을 받고 보름 안에 가겠다고 답장을 보냈다.
전서구를 통해서 보냈으니 운 나쁘게 새가 화살에 맞지 않는 한 내 메시지를 받았을 것이다.
못 받았으면 어쩔 수 없고.
사랑하는 동생이 연락 없이 온다고 해서 매정하게 내치진 않겠지.
“셰릴, 얼마나 남았지?”
“거의 다 왔습니다.”
여행의 길동무는 셰릴이다.
놀랍게도 난 백작가의 막내아들이지만 베르너 백작령을 잘 모른다.
아마 빙의되기 전 데이몬도 잘 몰랐을 거다.
맨날 방 안에 처박혀 있었다고 들었으니.
그래서 예전 백작가의 소속기사였던 셰릴을 가이드 겸 동반자로 데리고 나왔다.
물론 로이형께서 우리 쌔끈한 은발 미녀가 보고 싶다고 말씀하기도 하셨고 말이다.
여자가 보고 싶다는데 보여드리는 이런 동생 어디 없다.
그나저나 심심하다.
셰릴과 팔짱을 끼고 천천히 걷고 있는데 쥐새끼 한 마리 안 보인다.
“셰릴, 한 명은 레벨 1에 다른 한 명은 젊은 여자인 얼뜨기 주머니를 노리는 산적들이 왜 보이지 않을까?”
“네?”
“아니면 너의 외모를 보고 보지 한 번 쑤셔보려고 오는 덜떨어진 놈들은? 그런 놈들은 안 와?”
이상하다?
원래 주인공이 평범한 길을 걸으면 꼭 그런 불량한 놈들이 나오기 마련인데.
“셰릴, 너 상의 탈의 한번 해볼래? 그래야 파리들이 좀 꼬일 것 같은데.”
“진심이세요?”
“…아니.”
솔직히 날파리들은 잡아봐야 경험치도 안 준다.
요새 새롬이도 웬만한 걸로는 카르마도 잘 안 준다니깐?
섭섭하게 말이야.
“내가 옷 벗으라고 하면 벗긴 할 거야?”
“그럼요. 당신이 원하는데 벗어야죠.”
“다 벗고 캘리알 성을 활보하라고 해도?”
“복면가능?”
“노놉.”
“진짜 나쁜 주인님이네요.”
투덜대면서 캘리알 성으로 향하는 나와 셰릴은 유람이라도 나온 듯 여유가 흘러넘쳤고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 셰릴이 레벨 45를 돌파했다.
레벨 45는 단순히 레벨이 오른 게 아니라 레벨 30이 된 것처럼 경지가 하나 올랐다는 의미.
판타지아 대륙에서는 마스터급 고수가 돼서 오러를 쓸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도 네가 에밀리보다 일찍 올라가서 다행이네.”
에밀리는 아직 레벨 44에서 허덕이고 있다.
물론 그녀는 셰릴보다도 더 어리고 조기교육조차 받지 않은 상태이니 그조차도 괴물인 건 맞지만.
아무튼 성장만 따졌을 때 에밀리의 독주를 막을 사람이 생겼다는 건 나에게 있어 중요한 일이었다.
“오러 다시 한번만 보여줄래?”
그 말에 셰릴이 피식 웃으며 검을 뽑고 기를 불어넣는다.
부드럽게 칼을 감싸는 보라색의 물결.
오러 특유의 색깔이 확실했다.
다만 이제 막 소드마스터로 올라갔기에 아직은 색깔이 진하지 않았다.
굳이 비유하자면 물 탄 포도주 색깔이랄까?
어찌 되었든 간에 대단한 년이다.
고작 23살에 소드마스터가 되어서 오러를 뿜었으니까.
기억이 가물가물하긴 해도 그녀의 아버지 핀돌프 기사단장도 레벨 45 소드마스터였으니 딸이 아버지를 20년 빨리 따라잡은 셈이다.
“진짜 무기 든 사람은 아무도 안 보이네요.”
나도 그렇고 셰릴도 그렇고 시골 백작령에서 불상사를 당하기엔 너무 강해졌다.
오히려 산적들보다는 평민이나 농노들을 더 많이 본다.
그들은 우리가 가는 방향과는 반대로 향하고 있었다.
우릴 보는 눈빛이 적대적인 건 아니었지만 괜히 기분이 나빠서 그중 한 명을 잡고 물어보았다.
“이봐.”
내가 선택한 건 레벨 20짜리 용병.
나머지는 건드려도 참고 지나갈 거 같은데 요놈은 화내면서 칼 뽑을 것 같아서 골랐다.
“…누구?”
내 머리 위에 뜬 레벨을 봤겠지.
개인적으로는 날 얕보고 무시했으면 좋겠네.
아, 참고로 셰릴은 레벨 가리개를 한 상태다.
셰릴 레벨을 봤다가는 죄다 도망칠 게 분명하니까.
“지나가는 행인.”
“근데 왜 반말이오?”
“나보다 어린놈인 거 같은데 반말 좀 하면 안 되나?”
물론 내 외모도 겉으로 보기엔 영락없는 20대 초반이다.
빙의되기 전 나야 30대가 훌쩍 넘었었지만 데이몬의 몸뚱이는 메이와 셰릴과 비슷한 나이.
용병이 보기에는 내가 미친놈 혹은 시비를 걸고 싶어서 온 사람처럼 보일 거다.
화가 나서 검을 뽑았으면 좋겠다.
제발 뽑아라, 뽑아라…
“후우, 옆에 계시는 아름다운 미녀를 데리고 다니면서 조금 전과 같은 공격적인 언행을 하면 큰일을 당할 수 있소. 그러니 조심하시오.”
제기랄.
용병 주제에 왜 이렇게 젠틀한 거야?
흥이 식어서 용건만 간단히 해야겠네.
“우리는 캘리알 성으로 향하는 중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우리와 반대로 가는 사람들이 많지?”
“…외지인인가 보오.”
“딱봐도 그렇지 않나? 넌 눈깔이 없어?”
혹시나 해서 한 번 더 건드려 봤지만, 오히려 친절히 설명해주는 빌어먹을 용병.
오늘 여러모로 안 풀리는 날이다.
“이게 다 높으신 분들 자리싸움 때문이 아니겠소?”
“제임스 공자와 로이 공자 말하는 거지?”
“그렇소. 두 분의 전쟁이 격화되어서 지금 캘리알 뿐만 아니라 백작령 전체가 가라앉는 중이오. 그나마 희망은 북쪽의 데이몬 공자가 세운 도시뿐이라 생각하고 너도나도 짐 싸 들고 가는 중이지.”
“자네도 그 도시에 가봤나?”
“가봤겠소? 보나 마나 헛소문일 게 분명하오. 신분에 상관없이 일자리와 집을 주는 곳이 어디 있겠소?”
역시 시골 깡촌 사람들이라 소문만 전해 듣고 믿지 못하는 건가.
“부정적이군. 헌데 네가 가는 쪽도 크래스 폴리스 방향인 것 같은데 왜 믿지도 않는 곳을 가려는 거지?”
“여기서 지옥을 맛보는 것보다야 신기루라도 좇아야 희망이 보이지 않을까 싶어 다들 짐 챙겨서 떠나는 거요. 여기서 조금 더 지나면 꼬부랑 노인네에게까지 검을 쥐여줄 판이니 말이오.”
용병의 말을 듣고 영지 싸움이 극악에 치닫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재밌는 점은 그 말을 하는 사람이 싸움터를 전전하며 돈을 버는 놈이라는 게 아이러니다.
“어째서 나도 도망가냐고? 나 같은 뜨내기 용병이야 이기는 쪽에 붙어서 밥이나 얻어먹으려 돌아다니는 게 남는 장사 아니겠소?”
용병이 계속 말했다.
“같이 죽자는 이런 전쟁에선 돈 몇 푼 더 받겠다고 발 들이밀었다간 본전도 못 찾는 법이오. 그럴 바엔 나도 그 도시란 곳에 가서 농사나 지을 거요.”
그 말과 함께 용병이 멀어졌다.
이후에도 캘리알 성에 가까워질수록 나와 셰릴이 마주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그만큼 시체들도 많이 보였다.
영지 전쟁에서 죽은 병사들이 한 100명 정도 보였고, 도망치다 걸려 죽은 평민과 농노들은 그 10배는 되어 보였다.
“참혹하군요.”
셰릴은 눈은 나무 기둥들에 꽂혀 있다.
캘리알의 기사들이 탈주 농노들을 잡아서 처형했나 본데.
개중에는 이제 10살이나 됐을까 싶은 소년의 시체도 있었다.
이를 본 셰릴의 눈빛이 고드름이 떨어질 정도로 차가워졌다.
“로이 공자님이든 제임스 공자님이든. 그 어느 쪽도 베르너 백작가의 영지민들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겠습니다. 진정으로 통치자가 되기로 마음먹었으면 어떤 식으로든 전쟁을 빨리 끝냈겠지요.”
쟤 누구한테 말하냐?
혼잣말을 중얼거리길래 은근슬쩍 가슴골 사이로 손을 넣어 보드라운 젖가슴을 주물럭 해봤는데.
딱히 거부는 하지 않았지만 표정이 굳어있길래 이건 아닌 거 같아서 슬쩍 손을 뺐다.
“빨리 가죠.”
“그래.”
캘리알 성문 앞에 도착했다.
겉에서만 봐도 분위기가 흉흉했다.
성내 곳곳에서 불길한 검은 연기가 타오르는 걸 보니 무언가를 태우고 있는 것 같다.
아마 시체일 확률이 높았다.
“정지! 누구냐!”
온종일 캘리알 영지민들의 탈출을 막고 영지 전쟁에 동원되느라 다크서클이 눈 밑까지 내려온 병사들이 두 창을 X자로 교차시켜서 우리를 막아 세웠다.
쳐 뜬 눈깔이 마음에 안 들어서 파내주고 싶었지만, 굳이 내가 움직이지 않더라도 충분히 고생하고 있는 것 같길래 후드를 벗고 정체를 드러냈다.
“베르너 백작가의 정당한 주인, 데이몬 베르너가 로이 베르너를 보러 왔으니 성문을 열어라.”
후계전쟁에서 다른 후계자의 본진에 와서 내가 진정한 주인이라고 외쳐줘야 인생 살 맛 나지 않겠어?
역시나 나를 미친놈 보듯 하는 병사들이 서서히 다가오자,
채앵!
“공자님께 더는 접근하지 말아 주시지요. 참고로 저는 셰릴 몬두르. 백작령의 유서 깊은 기사 가문 몬두르 가의 장녀입니다.”
화려한 갑옷과 범상치 않은 기세를 풍기는 미녀 여기사가 등장하자 그제야 긴가민가한다.
또 캘리알 성에서는 로이 쪽으로 붙은 기사들이 많다 보니 금세 셰릴을 알아본다.
“셰릴? 오랜만이구나!”
“셰릴이다! 진짜 셰릴이야.”
“와, 더 예뻐졌잖아?”
위쪽에서 웅성거리는 기사 녀석들.
레벨을 보니 20대 초반.
아까 만난 용병이랑 비슷하다.
웃긴 일이다.
용병은 바로 망한 판이라는 걸 깨닫고 발을 뺐는데 그 녀석과 그다지 수준 차이도 나지 않는 녀석들은 기사의 명예 어쩌고에 얽매여서 떠나지 못하고 있으니까.
별일 없으면 조만간 저 녀석들도 시체가 되어 차가운 바닥에 몸을 누이겠지.
“들어오시지요.”
성문이 열리면서 낯익은 얼굴이 나를 반겼다.
“오랜만이네. 록펠 경.”
“네, 오랜만입니다.”
절도있게 고개를 숙인다.
아무래도 크래스 폴리스를 제대로 경험해서인지 나를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재미없는 녀석.
이 녀석은 재미없는 녀석이 되었다.
하지만 록펠을 제외한 나머지들은 눈빛이 팔팔한 게 제법 마음에 든다.
“이 시국에 아직도 레벨 1이라고? 정신이 나갔군.”
“이런 후계전쟁에서 여기사랑 단둘이 오다니. 저런 놈이 록펠 경이 말한 그런 도시를 만들었을 리 없지.”
“그나저나 셰릴 경 정말 예뻐지지 않았나? 저런 칠푼이와 같이 다니기에 창피할 텐데. 셰릴 경도 사람이 너무 착해.”
제법 마음에 드는 분위기다.
처음엔 나를 까고, 그다음에 나와 셰릴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정당화시키고, 마지막으로는 셰릴에게 음욕을 보이는 저 눈빛까지.
제대로 장소를 찾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로이형은?”
“안쪽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막내가 몇 년 만에 왔는데 버선발로 뛰어나오지는 못할망정.
아, 여기는 조선이 아니라서 버선이 없겠구나.
어쨌든 마중을 나오진 않았네.
“록펠 경, 혹시 크래스 폴리스에 관한 걸 로이형에게 말했나?”
“네, 보고했습니다.”
“믿기는 믿어?”
“……”
사실 대답을 알고 물어본 거라서 록펠의 무응답이 그다지 놀랍지는 않다.
옆 동네 막냇동생이 잘나가고 있다는 걸 두 눈으로 봐도 안 믿을 게 뻔한데 기사 놈이 구두로 전하는 걸 믿을 리가 없지.
그의 안내를 받고 캘리알 저택으로 들어갔다.
로이형이 날 위축시키려고 이곳저곳에 기사들을 배치해 놓았나 보다.
날카로운 기세를 뿌리며 귀엽게 구는 녀석들.
원래라면 당장 달려가서 혀부터 뽑아내야 하나,
“딸꾹!”
10보 전진을 위한 반보 후퇴랄까.
일부러 딸꾹질하며 누가 봐도 두려움 완연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천만배우 뺨치는 연기력에 금세 경계를 놓고 피식거리는 기사 놈들.
그 사이를 뚫고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가 내 귓가를 울렸다.
“오, 이게 누군가! 내 동생이 맞긴 맞는 거야? 놀랄 정도로 변했구나.”
기다리고 기다리던 실험체 등장이군.
여전히 건장한 체구를 자랑하는 금발 태닝 양아치 놈이 한쪽 입꼬리를 올린 채로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