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4화 〉 일상) 데이몬의 하루4
* * *
협탁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네 잔의 차가 놓여있었다.
나와 클레어는 올리비아를 위로해줄 겸 그녀의 서재로 모였다.
현재는 마지막 한 명을 기다리는 중이다.
“늦었어요! 죄송해요, 주인님!”
흑단 머리를 찰랑이며 헐레벌떡 들어오는 여인은 바로 소피아.
아침에 나에게 당해서 엉망이 됐던 몸은 샤워를 깔끔하게 했는지 끈적한 정액이 말라붙은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스승님, 그게 무슨 소리예요? 다른 마녀의 소식이 들어왔다고요?”
소피아를 포함한 귀녀대원들은 올리비아의 제자로 들어오면서 마녀가 되었다.
특히나 소피아는 그녀의 수제자인데다가 5서클의 상당히 쓸만한 화염술사.
그녀까지 착석하자 내 손에 들려있던 마녀의 편지를 협탁의 정중앙에 탁소리가 나게 올려놓았다.
마나를 미리 주입한 편지지 위에는 선명한 붉은 글씨가 피어올랐다.
회주, 잘 지내고 있나요?
잘 지내고 있겠죠.
마녀의 숲을 개방하셨다는 소문은 들었습니다.
꽉 막힌 당신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는지 놀랍습니다만, 한편으로는 역겹기도 하군요.
저희에게는 마녀의 고유성을 유지하고 외부인을 경계하며 숨어서 힘을 키우겠다고 하시던 분이 제일 활발히 외부랑 소통하면서 마녀답지 않은 생활을 하시니깐요.
“흐흑…”
이 부분을 읽은 올리비아의 눈에서 눈물이 다시 한번 터졌다.
녹색머리 마녀가 벽창호는 맞다.
이년을 처음 만났을 때를 생각해보자.
남자에 대해 전혀 몰라서 이상한 가치관을 내세우며 날 잡아먹으려 했었고.
숲속에서 한화로 2조 원 가까이 모아가면서 제자 미셸과 함께 부흥에만 올인하던 독종이었다.
적어도 올리비아는 일관성 있는 여인이었다.
나를 만나기 전까지는.
다만 그녀가 가슴 속에 품던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강력한 힘과 굵고 우람한 자지로 찍어누른 다음, 보지개발을 통해 구부러진 신념으로 바꿔놓았다.
그 결과, 마녀에서 암컷으로 타락한 올리비아는 내 의지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 오나홀이 되었으니.
그저 그뿐이었다.
편지는 계속되었다.
당신이 지조도 없이 이곳저곳에 다리 벌리면서 즐겁게 지내는 동안, 우리 자매들은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답니다?
아르나는 법국 중앙광장에서 화형당했어요.
마지막 순간까지 그녀는 당당함을 잃지 않았지요.
누구와는 달리 말이에요.
“아르나가 누구지?”
“저와 의견이 다른 마녀였어요. 마지막에 싸우고 자매들을 이끌고 사라졌죠.”
이야기를 들어보니 마녀회 넘버투였던 모양이다.
“저처럼 외진 곳에 숨어있지만 말고 인간 사회에 스며들어 실권을 장악한 뒤 음지에서 서서히 인간 사회를 무너트리고 마녀들을 위한 유토피아를 만들자고 한 여자예요.”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올리비아는 숨어서 힘을 기르다가 한방에 터트리자는 주의.
아르나란 여인은 사회 이곳저곳에 잠입해 있다가 아래서부터 뒤집어보자는 생각이었나.
“그나마 아르나란 년은 생각이 좀 있었군. 누구와는 다르게 말이야.”
“흐흑…”
올리비아가 다시 질질 짠다.
가감 없이 말하자면 그녀는 이상론자였다.
힘을 키우다가 반란 한 번으로 뒤집는다?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전 대륙의 표적이 될 게 뻔한데?
올리비아의 계획이 현실성이 되려면 압도적인 힘이 밑바탕 되어야 한다.
이 녹색머리 마녀 또한 이를 알아서 나름대로 일신의 무력을 키우기 위해 힘쓰긴 했지만.
알다시피 당시에 딱히 스텟이 높지도 않았던 나에게도 졌으니 그 계획안은 휴지통에 버려졌어도 할 말 없을 정도로 최악이었다.
반대로 아르나는 현실론자여서 이런 올리비아의 꽉 막힌 성격을 파악하고 진작에 머리 깬 마녀들을 이끌고 인간 사회로 스며들었나 보다.
하지만 법국 놈들에게 걸려서 좋은 꼴 못 봤으니 결과적으로 따지면 요년 계획도 말짱 꽝이다.
두 사람을 놓고 보면 인생은 아이러니다.
올리비아는 이상론자라서 숨어만 있다가 나에게 두들겨 맞고 마녀회 부흥을 위한 기틀이라도 닦을 수 있었으나.
아르나는 훨씬 현실적인 계획을 세우고 있었음에도 운이 나빠 형장의 불꽃으로 사라져버렸으니 말이다.
아르나는 죽고 자매들은 법국의 감옥에 유폐되었어요. 저는 운 좋게도 걸리지 않았지만, 어차피 들키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당신에게 일말의 양심이라도 남아있다면 감옥에서 고통받는 자매들을 위해서 무언가라도 해줬으면 좋겠네요.
“편지는 여기까지가 끝이군요.”
소피아가 착잡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며 말한다.
솔직히 나는 편지 내용을 보고 비웃음 밖에 안 나왔다.
“정말 뻔뻔하기 그지없는 년들이군.”
본인들이 선택해서 결과가 안 좋았던 건데, 이미 한참 전에 돌아선 지 오래인 회주탓을 하면서 도움받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다니.
마녀들은 원래 다 이런가?
“저도 동감이에요.”
“편지 내용만 보면 우리에게 뭐라도 맡겨놓은 듯하군요. 크래스 폴리스 건설에 벽돌 한 조각도 기여하지 않은 년들이 말이에요.”
소피아와 클레어도 나와 비슷한 심정인지 분개한 표정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만약에 스승님이 망하고 저쪽 마녀들이 잘됐으면 그녀들이 스승님을 제대로 봐주기라도 했으려나요?”
“그럴 리가 없지. 보나 마나 자기들끼리 티타임이나 즐기면서 본인들이 옳았다고 으스댔을 게 분명해.”
여자들의 심리는 여자들이 더 잘 안다.
클레어와 소피아는 어느새 아르나 측 마녀들에게 빙의되어 상황별로 저 마녀들이 어떤 언행을 보일지 편지에 적힌 글 하나 가지고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중요한 건 나도 클레어와 소피아의 추측이 그리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올리비아가 망해서 도움을 청해도 저년들은 분명 도와주지 않았겠지. 그러니 우리도 아르나 뭐시기 년들을 도와줄 의무는 없다.”
내가 딱 잘라 말하자 두 명은 고개를 끄덕이고 한 명만 눈물을 쏟으며 비명을 질렀다.
“아, 안 돼요!”
바로 올리비아.
“주인님, 제발…그래도 같은 마녀에요. 한때 저랑 한솥밥을 먹고 지냈던 여인들이라고요. 의견이 다르긴 하지만 그래도 같은 마녀인데 어떻게 버릴 수가 있겠어요.”
오호라?
여기 호구년이 하나 있었네?
하긴, 올리비아는 뼛속까지 악마의 힘에 물들어버린 뚱땡이 마녀 미셸도 제자로서 아끼고 있었지.
“주인님, 제발 부탁드려요…얘들아, 너희도 날 좀 도와주렴…부탁이야.”
냉큼 의자에서 내려와 도게자를 박는 올리비아를 보며 클레어와 소피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올리비아와 여러 번 잠자리하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그녀는 사실 자기 사람들에게는 지독할 정도로 착했다.
외부인에게는 경계심이 심하지만 말이다.
숲속에서 아는 마녀들끼리만 오순도순 지내며 힘을 키우자는 계획도 어찌 보면 그런 그녀의 성정에서 비롯된 걸지도 모른다.
“언니, 저희도 도와주고 싶어요. 하지만 법국에 무슨 수로 들어가나요? 들어간다고 할지라도 제대로 된 신분도 없이 돌아다니다간 우리가 역으로 잡힐지도 몰라요.”
클레어의 말은 타당했다.
그녀가 계속해서 말했다.
“게다가 이 편지를 보낸 사람 말이에요. 이 사람도 현재 감옥에 잡혀있는 사람일 수도 있어요. 언니까지 같이 지옥에 끌려들어 갈 수도 있다고요. 애초에 이상하지 않나요? 다른 여자들은 전부 잡혔는데 이 여자만 홀로 남아서 언니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는 게?”
“클레어 언니, 제가 볼 때는 이 여자가 잡힌 것 같지는 않아요.”
소피아가 갑자기 끼어들자 다들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이 종이를 보세요.”
소피아는 눈을 가늘게 뜨며 편지지를 요모조모 살펴보았다.
“왠지 모르게 저 편지지가 많이 익숙해서 내내 고민하고 있었는데, 방금 이걸 어디서 봤는지 떠올랐어요.”
그리고 이어지는 그녀의 말.
“이 편지지는 홀리엔 신성아카데미에서만 쓰는 편지지에요.”
홀리엔 신성아카데미.
갈리아 제국아카데미와 함께 판타지아 대륙의 양대 아카데미라 불리는 고등교육기관이란다.
다만 제국 아카데미에서는 기사와 마법사, 행정가와 예술가를 골고루 뽑지만 신성아카데미에서는 용사와 성녀 위주로 뽑는다는 소피아의 설명.
“그 빌어먹을 연놈들을 양성하는 기관이라고?”
나도 모르게 용사와 성녀를 깎아내리는 발언을 서슴지 않고 했으나, 여기 있는 여인들은 눈 하나 깜짝 않는다.
올리비아야 이들과 전쟁한 경험까지 있었고, 그게 아니더라도 다른 여인들 또한 모나스 시티에서 용사와 성녀가 보여준 위선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왔기 때문이다.
“맞아요. 성적이 좋고 능력이 뛰어난 남자는 용사, 여자는 성녀가 되곤 하죠. 그 정도 성적이 되지 않아도 전투사제나 법국 교회의 신부로 활동하는 인재를 길러내는 신학교에요.”
재밌는 곳에서 온 편지였군.
아무래도 소피아가 표국출신이다 보니 편지지만 보고도 발신 장소를 운 좋게 예측할 수 있었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편지를 보낸 사람의 신원은 확실치 않지만, 죄수로 잡힌 상태는 아닐 것이다.
굳이 법국 측에서 올리비아를 꾀어내려고 아카데미 편지지까지 신경 쓰면서 보낼 리는 없었을 테니까.
게다가 신성아카데미라면 등잔 밑이 어두운 격으로 마녀가 몸을 숨기는 게 가능하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현재 편지를 보낸 여자는 신성아카데미의 학생 혹은 교수, 그것도 아니면 일반 직원으로 일하는 젊은 여성이겠네.”
신원은 파악되었다.
다만 이를 구하러 가는 건 다른 문제.
솔직히 저들이 죽든 말든 신경도 쓰고 싶지 않다.
어차피 크래스 폴리스는 이미 커질만큼 커졌고 마녀 따위는 있으면 좋고 없으면 그만이기에.
하지만 올리비아는 여전히 우리에게 매달린다.
“주인님, 처음에 저에게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시나요? 마녀회의 부흥에 힘써주신다는 말이요. 아르나가 데려간 자매 중에는 저도 잘 모르는 고유마법을 익힌 마녀들이 많았어요. 그녀들이 법국의 감옥에서 죽어버린다면 마도학은 100년 넘게 후퇴할지도 몰라요.”
사실 올리비아가 애절하게 부탁한다 해도 나는 그녀의 사정 따윈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애초에 여자들의 눈물에 흔들릴 인간이었으면 여기까지도 오지도 못했고 말이다.
그저 난 올리의 뛰어난 실력과 조금만 박아넣어도 부들부들 떨어대는 보짓구멍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당연히 그년들 구출하겠다고 법국에 인원을 파견할 수는…”
갑자기 뇌리를 스치는 어떤 생각 때문에 말이 끊겼다.
그건 바로 내가 완수해야 하는 퀘스트 목록.
현재 내가 레벨 1인 이유는 상위 마왕 아유나에 의한 레벨 묶기 때문이었는데.
이를 해결하려면 성녀 3명의 순결을 취해야만 레벨 제한이 풀린다.
예전에 한유림을 범했으니 한 명은 채웠지만, 아직 두 명이 남았다.
성녀란 존재가 원체 숫자도 많지 않고 찾기도 쉽지 않은 건 맞지만, 성녀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이라면?
머릿속에서 빠르게 계산을 마쳤다.
어쩌면 예상보다 이르게 레벨 제한을 풀 수 있을지도 모른다.
“…좋아. 올리비아. 네 제안을 들어주지. 홀리엔 법국엔 내가 직접 가보마.”
“네?”
“정말요?”
소피아와 클레어가 의혹에 찬 얼굴로 나를 본다.
내가 올리비아를 사랑하는 마음에 그녀의 부탁을 들어준다고는 여기지 않을 거다.
그러기엔 두 첩들은 나에게 당한 게 너무 많다.
하지만 올리비아는 너무 기뻐서 판단력이 흐려졌는지 방방 뛰면서 나를 껴안는다.
“고마워요! 주인님! 사랑해요♥”
“하지만 크래스 폴리스가 자리를 어느 정도 잡고 백작가 후계 구도를 굳힌 다음에 움직일 테니 그리 알도록.”
“네! 그 정도는 기다려드릴 수 있어요!”
기뻐서 고개를 끄덕이는 올리비아에게 TS1알약 생산에 더 박차를 가하라고 했다.
아쉬운 게 생긴 년이니 본인이 원하는 걸 이루려면 밤을 새워서라도 근무실적을 올리겠지.
“주인님, 어째서…”
“말도 안 돼.”
“뭐가 말이 안 돼? 내가 올리비아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꼬우면 정실부인 되던가.”
어차피 정실부인 돼도 내 맘대로 하는 건 똑같겠지만 말이라도 이렇게 해서 첩실과 정실을 구분 짓는다.
이런식으로 클레어와 소피아에게도 신분 상승 욕구를 부추겼으니, 오늘 밤도 주인을 향해 열심히 보지봉사하려 하겠지.
여느 때와 같이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하루가 거의 다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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