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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7화 〉 오늘따라 술이 달았다



〈 217화 〉 오늘따라 술이 달았다

* * *

100여 명의 기사와 5천 여 명의 농노병들은 거침없이 진격해서 어느새 몬두르 성까지 도착했다.

진격하는 동안 앞을 가로막는 무리들은 없었다.

이 정도 규모의 대군이 움직이면 분명 몬두르 성에서도 알아차리고 나름의 반응을 해야할 텐데.

쥐 죽은 듯이 조용한 게 좀 이상했다.

아무튼 성을 둥글게 둘러싸고 방진 형태로 포위했다.

여전히 몬두르 성은 고요하다.

“록펠.”

“네.”

“사자를 보내. 그래도 공격 전에 통보는 해야겠지.”

“알겠습니다.”

사자를 보내는 건 일종의 예의이기에 록펠도 별다른 이견 없이 병사 한명을 지정해서 몬두르 성으로 보냈다.

깃대를 등에 꽂고 성문을 향해 말을 달리던 사절은…

쐐애액! 푹!

바로 화살을 맞고 낙마했다.

“록펠, 저거 맞아?”

“말도 안되는 짓입니다. 적대국과의 전쟁도 아니고 영지전에서 사절을 쏘아맞추다니요.”

사절을 적대한다는 의미는 하나다.

만에 하나 성이 점령당해서 민간인이 모조리 학살당하더라도 감수하겠다는 말이다.

무슨 자신감으로 저런 짓을 벌이는지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물론 사절을 보내놓고도 기분 내키면 민간인 학살을 밥 먹듯이 하는게 나다.

내가 이런 놈인줄 알고 미리 사절을 죽인 거라면 칭찬해줄 수밖에.

“백작님, 작전이 궁금합니다.”

옆에서 록펠이 진지한 표정으로 어떻게 공성전을 시작해나갈 건지 물었다.

여기까지 달려오면서 내 머릿속에 작전은 한가지 밖에 없었다.

“록펠, 혹시 닥돌이라고 아나?”

“잘 모르겠습니다.”

“닥치고 돌격하라는 줄임말이야. 그러니까 나한테 작전 물을 시간에 전원 닥돌해라.”

내 말을 들은 기사들의 표정이 괴상해졌다.

“돌격이라니요? 몸을 웅크린 놈을 상대로 정면 공격을 가한단 말입니까? 우리측 피해가 클 겁니다.”

응, 그러라고 공격하라는 거야.

어차피 캘리알 성의 기사들은 로이놈 부하고 농노병들이야 많이 죽어서 내 카르마를 위한 거름이 되어주면 누이 좋고 매부 좋고다.

“그러면 사절을 죽이고 안하무인으로 굴고 있는 저 발칙한 기사단장을 그냥 냅두라는 말이냐?”

“제 말은 작전을 짠 뒤에 보다 신중하게 움직이자는 겁니다. 야밤에 기습을 가한다든지, 투석기를 건조한다든지, 바람을 이용한 화공을 펼친다든지요.”

“닥치고, 돌격해. 가지 않는 놈은 여기서 참수한다.”

로이 놈을 죽이고 훔쳐온 화려한 검을 뽑아서 사방을 위협하자 기사들의 얼굴이 굳었다.

그래봐야 어쩔 건데?

백작이 까라면 까야지.

“전군 돌격!”

결국 내 명령에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건 아무것도 모르고 징집된 농노병들.

잔뜩 웅크려서 가시를 내밀고 있는 고슴도치를 향해 몸을 던진다.

이 정도면 적벽대전에서 100만 대군을 쏟아부은 조조, 한산도에서 전투함 숫자 믿고 날뛰다가 대패한 와키자카, 성 하나 공략하려다가 20만을 잃은 당태종에 버금가는 지휘력이다.

하지만 내 병사들도 아니니 괜찮다.

아무 죄없는 농노들이 쓸데없이 죽으면 죽을수록 내가 최악의 악인으로 향하는 길은 더 단축될 테다.

“모두 돌격! 도망가는 놈은 내가 직접 참(?)할 것이다!”

내공을 가득 담아 소리를 내질렀더니 땅이 울린다.

깜짝 놀란 농노병들이 녹슨 병장기를 들고 높은 성벽을 향해 돌진한다.

“와아아아!!!”

무식하면 용감한 법이라고.

어떻게 될지 모르는 농노병들이 분위기에 취해서 기세등등하게 달려나갔다.

오히려 기사들은 몸을 사린 채 병사들의 돌격을 지켜보고 있다.

“너희들은 돌격 안 해?”

등 뒤로 가서 말하자 기사들이 당황했다.

“마이 로드,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닙니다.”

“너 지금 항명하냐? 내 명령이 뭣같아?”

공성전 경험이 있는 기사들은 지금 달려가봐야 개죽음 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안다.

이런 놈들에게는 동기부여를 해줘야 하는 법이다.

검을 뽑아서 망설임 없이 기사의 목을 향해 휘둘렀다.

후웅! 서걱!

자신의 주군이 검을 휘두를 거라 예상치 못했던 레벨 20짜리 기사의 어깨 위가 허전해졌다.

“엇!”

“어엇!”

놀란 기사들과 병사들이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한 기사를 멍청하게 보았다.

록펠이 놀라서 소리쳤다.

“백작님, 대체 이게 무슨…”

“보았느냐!!”

록펠의 말을 씹으면서 힘껏 소리를 내질렀다.

“후퇴란 없다! 기사도 예외는 아니다! 도망치는 순간 내가 직접 목을 벨 테니 돌격! 돌격하라!!”

병사들도 눈이 있다.

하늘처럼 여기던 지휘관도 저렇게 죽어나가니 남는 선택치는 닥돌 뿐이다.

“으아아아!!!”

악을 쓰며 성을 향해 달려가는 병사들을 바라보다가 아직도 충격이 가시지 않은 기사들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이래도 안 가? 너희들도 목 떨어진 놈처럼 되고 싶은 거야?”

또 한 명의 가슴을 향해 검을 찔렀다.

푸욱!

워낙의 쾌검이라 당연히 쪼렙 기사놈은 반응하지 못하고 심장을 주인에게 반납했다.

“꺽! 꺼억!!”

“왜 이렇게 꺽꺽대? 어제 과음이라도 했어?”

말에서 낙마한 놈의 머리를 일부러 말발굽으로 짓밟았다.

두개골이 깨지며 뇌수가 튀어나와 푸른 잔디밭을 붉게 적셨다.

“이대로 다 나한테 죽을 생각이야? 나에게 충성맹세했던 건 모두 거짓이었나?”

로이의 얼굴로 이러고 있으니 다른 기사들도 선택지가 없어졌다.

말을 몰아 몬두르 성을 향해서 달려나갔다.

“으아아아!!!”

“으아!!”

잘들 한다.

나는 뒤에서 흐뭇한 표정으로 공성전을 살펴보았다.

역시나 가까이 다가가자 화살비가 쏟아졌다.

퍽! 퍼퍽! 퍼퍼퍽!

운 나쁜 놈들이 급소에 화살을 맞고 절명했고 그보다 조금 운이 있는 놈들이 팔다리를 부여 잡고 바닥을 굴렀다.

“사, 살려줘!”

하지만 이런 닥돌 상황에서 넘어지면 사람들에게 밟혀죽는다.

다리에 화살이 박혀 넘어진 병사는 뒤이어 오는 놈들에게 머리를 밟히더니 이내 움직임이 멈췄다.

화살 다음에는 뜨거운 물이다.

성벽을 타고 올라가려던 병사들이 위에서 떨어져 내리는 뜨끈뜨끈한 온찜질을 견디지 못하고 추락했다.

가끔씩 커다란 바위도 떨어져 내렸는데, 서너 명이 돌 하나에 깔려죽기도 했다.

“끄아아아악!!”

죽음의 향기가 내 코를 간지르고 병사들의 절규가 내 귀를 호강시켰으니.

오늘 하루는 밥을 안 먹어도 배부르다.

“백작님! 지금이라도 퇴각해야 합니다! 피해가 커지고 있습니다.”

기사 한 명이 다가와서 다급하게 말했다.

그런 녀석을 위해서 멍청한 지휘관 코스프레를 다시 한번 해준다.

“우리가 숫자가 더 많다.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일점돌파하면 못 뚫을 성이 없다. 나는 너희들의 저력을 믿는다. 망설일 것 없다! 더욱 거세게 몰아붙여라!”

그러면서 말을 달렸다.

물론 전방으로 달리진 않았다.

부대의 후미 쪽을 횡으로 돌면서 대열을 이탈하는 놈들 위주로 목을 쳐서 날렸다.

가끔은 이탈하지 않았는데도 목을 날렸다.

생긴 게 불쾌해서였다.

그렇게 하루종일 두들기다보니 성문이 뚫릴 기미가 보였다.

역시 인해전술이 답이었나 보다.

콰콰콰쾅!!

성문이 마침내 부서졌다.

이미 시체가 산이되고 흘러나온 피가 강이 될 쯤이라서 눈이 뒤집힌 녀석들이 병장기를 꼬나쥐고 성 안으로 들어갔다.

“죽여! 모조리 죽여!”

“애새끼든 여자든 상관없다! 다 죽여!”

물밀듯이 성안으로 들어간 병사들과 기사들을 구경하다가 문득 목이 말랐다.

“록펠.”

“네, 백작님.”

“와인 좀 가져와.”

“네?”

“귀가 안들려? 목 마르니까 와인 좀 가져오라고.”

영 요지부동이길래 슬쩍 검을 빼내려고하자 그제서야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막사에서 와인을 꺼내온다.

피처럼 붉은 와인을 한잔 마시면서 성문에서 벌어지는 지옥도를 감상했다.

역시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더니.

괜히 그런 말이 나온 게 아니다.

“너도 한 잔 마실래?”

“괜찮습니다.”

손사래를 치는 록펠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불만이 많은 것 같다?”

“우리 측 기사들이 너무 많이 죽었습니다. 병사들도 마찬가지고요.”

“대의를 위해서 사소한 희생쯤은 필요한 법이야.”

물론 그 희생자에 내가 포함되지 않을 때 이야기지만.

그런 당연한 말 따윈 덧붙이지 않았다.

“조금만 더 몰아붙이면 끝날 싸움입니다. 저도 돌입하겠습니다.”

록펠도 들어가려고 투구의 바이저를 내렸다.

그때, 성문 쪽에서 기사 한 명이 부리나케 도망쳐나왔다.

“목숨이 아깝지 않은 놈이 또 있군.”

칼을 뽑아서 마중나가려고 했는데, 다가오는 놈의 안색이 심상치 않아서 하려던 칼질을 멈추었다.

성문이 무너진 순간 승기는 완벽히 넘어왔건만.

저렇게 두려워할 일이 뭐가 있을까?

내 앞에 선 놈이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횡설수설했다.

“어, 언데드! 언데드입니다! 성 안에 죄다 언데드만 있습니다.”

“언데드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성 안에 죄다 시체들뿐입니다. 성을 수비하던 병사들이 모두 언데드였습니다. 살아서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저희뿐입니다.”

아, 그렇게 된 거였구나.

아무래도 첫째 형놈이 일을 친 것 같다.

악마후보자 스킬로 사령술을 얻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몬두르 성 거주자들을 모조리 언데드로 만들었을 줄이야.

꼼수만 쓰고 음습해보이던 첫째 형이 생각보다 배포가 크다는 걸 알고 나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대단하군. 그러면 핀돌프 기사단장은? 안에 있나?”

양반은 못되는지.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성문에서 잘린 팔다리가 허공을 수놓았고 그 사이로 시커먼 갑주를 입은 거구의 장한이 뛰쳐나왔다.

붉은 안광이 번뜩일 때마다 농노병이든 기사든 간에 모두가 평등하게 바닥에 몸을 뉘였다.

“데스나이트로군. 기사단장이 첫째 형한테 돌아선 이유는 그거였나?”

바이저를 내리고 풀 플레이트 메일을 입고 있어서 확실치는 않았지만, 제정신이라면 대화 한마디 없이 저렇게 옛부하들을 도살하진 못한다.

“말세로군요. 당장 홀리엔 법국에 연락해야 합니다. 제임스 공자는 도를 넘었습니다. 대천사의 염화가 그를 정화해야 백작가에 평화가 깃들 겁니다.”

록펠이 심하게 분개했다.

그런 와중에 나는 형제 셋 중에 둘이 악마후보자란 사실이 새삼스레 웃겨서 실실 웃음이 나왔다.

“백작님, 뭐가 그리 웃기십니까?”

“록펠, 법국에 연락하면 그들이 언제쯤이나 병사를 보내줄 것 같아? 한때 나 포함 우리들의 스승이었던 기사단장을 봐.”

아닌 게 아니라 이미 기사들도 몇 남지 않았고, 농노병들도 슬슬 겁에 질려서 대다수가 몸을 돌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한두명이면 모를까, 저렇게 단체로 산개해서 흩어져버리면 나도 방법이 없다.

“이대로 가면 전멸하겠는데? 록펠, 자네는 우수한 기사이니 대책을 강구해보도록.”

내 말에 위기감을 느껴서일까?

록펠이 검을 뽑고 용맹하게 외쳤다.

“기사들이여! 사악한 제임스 공자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 핀돌프 기사단장은 더는 우리를 알아보지 못하니 한 때 검을 나눴던 정으로 구원해주자!”

옳지, 잘한다.

록펠이 여포와 같이 맹렬하게 검을 잡고 말을 달리자 이에 영향받은 나머지 기사들도 눈을 까뒤집고 구 핀돌프 기사단장, 현 데스나이트에게 달려들었다.

성 안에서는 농노병들이 구울들과 필사적인 교전을 하고, 성 바깥에서는 생존한 기사들이 데스나이트 하나를 잡으려고 용을 쓴다.

그렇게 캘리알 성 세력과 몬두르 성 세력이 부딪쳐 아비규환을 이루며 동귀어진으로 향하고 있을 때.

나는 와인잔 바닥에 남은 마지막 와인 한 방울까지 깔끔하게 마셨다.

오늘따라 술이 무척이나 달았다.

* * *



사상 최악의 주인공〈 217화 〉 오늘따라 술이 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