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0화 〉 공들여 작업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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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우욱
여전히 적응이 안 되는 보지 모양의 워프게이트를 타고 도착한 곳은 베르너 성으로부터 약간은 떨어진 평야였다.
나오자마자 부하들이 앞다투어 나를 맞이했다.
“마이 로드.”
“어서 오세요, 주인님.”
“마스터.”
“취익! 주군 왔다! 취익!”
“쿠워쿠워!”
육림대, 귀녀대, 월랑대, 녹귀대, 중갑대.
내가 가용할 수 있는 최대 전력들이 모조리 모였다.
마녀의 숲에서 나온 이후 내 정예병력이 모두 모인 적은 처음이라 감회가 새롭다.
“주인님, 몬두르 성은 끝난 건가요?”
궁금해하는 메이에게 짤막하게 사정을 설명했더니 같이 들은 여자들이 하나같이 분통을 터트렸다.
“성 하나를 통째로 희생양으로 삼았다고요?”
“정말 나쁜 놈이군요.”
“단죄해야겠어요.”
그녀들의 말을 들은 나도 기분이 나빴다.
어느 부분에서 나빴냐고 묻는다면.
내 앞에서 나보다 제임스가 더 사악하다고 말하는 게 듣기 싫었다.
예전부터 누누이 말하지만, 난 나보다 더 사악해 보이는 놈을 용납하지 않는 병이 있다.
제임스는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으니 저놈의 운명은 정해졌다.
그리고 제임스도 제임스지만, 그 어미도 문제다.
나에겐 첫째 엄마가 되는데.
내가 싫어하는 점들만 쏙쏙 골라서 가지고 있다.
그년만큼은 어떻게든 산 채로 잡아서 내가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을 해줄 생각이다.
“첫째 형이 베르너 본성에서도 뭔가를 해놨으리라 예상된다.”
“그렇겠네요. 몬두르 성 하나를 그렇게 만들어놓고 본성만 멀쩡히 두진 않았겠죠.”
“그래서 이번엔 더 편하다.”
그동안 크래스 폴리스를 세우면서 수면 위에 띄워서 움직일 수 있는 정예부대는 육림대와 월랑대, 넓게 잡아 십동대 정도였다.
중갑대와 녹귀대는 몬스터 부대여서 보여줄 수 없었고, 귀녀대는 마녀로 의심받을 수 있어서 공개하지 않았다.
하지만 베르너 공성전에는 십동대만 도시 경비를 맡기고 전원 소환했다.
어차피 먼저 선을 넘은 건 제임스.
나 또한 악마후보자로서 부릴 수 있는 모든 것을 사용한 뒤에 법국에서 성녀가 나오면 죄다 첫째 형에게 덮어씌우면 될 일이다.
“올리비아, 소피아, 준비됐어?”
“그동안 TS알약만 만드느라 좀이 쑤셨는데 이참에 몸 좀 풀어야겠어요.”
“저도 리만표국 일 때문에 책상에 앉아서 서류만 보고 있었는데 바깥 공기도 쐬고 좋네요.”
역시 이런 공성전에는 마법사의 역할이 중요하다.
두 마법사의 컨디션이 나쁘지 않으니 다행이다.
다른 귀녀대원들도 만반의 준비가 된 상황.
월랑대와 육림대 녀석들도 말만 들으면 튀어 나갈 준비가 된 것 같고.
메이도 대궁을 들어 성을 향해 조준했다.
요 계집도 벌써 힘스텟이 많이 올라서 웬만한 레벨 30대 용병도 멀리서 화살로만 찜쪄먹을 수준이다.
그뿐이랴.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는 오크들과 트롤, 코볼트를 탄 날렵한 고블린들이 언제든지 기동전을 벌일 준비를 끝마쳤다.
마지막은 내 앞에서 꼬리를 흔들고 있는 거대한 늑대 한 마리다.
“루나.”
“멍멍!!”
인간 말을 할 수 있음에도 스스로 암캐를 자처한 여인은 주인을 향해 격렬하게 꼬리를 흔들며 내 옆구리에 머리를 비벼댔다.
땅을 박차고 올라 그녀의 등에 탔다.
소수 정예로 끝내고 싶어서 몬두르 성 때와는 달리 일반 병사들은 끌고 오지 않았다.
“가자.”
말은 길지 않았다.
우리 중에 가장 레벨이 낮은 녀석이 레벨 33.
대부분이 40 언저리에 50 넘은 사람도 꽤 있으니.
폭풍처럼 휘몰아쳐서 어느새 베르너 성 앞에 도착했다.
“오랜만이군.”
맨 처음 떨어진 장소에 다시 찾아오니 감회가 새로웠다.
그때만 해도 방안에만 처박혀있는 레벨 1 망나니 공자로 사람대우도 못 받았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얼마나 날 한심하게 여겼으면 거대도시의 수장이 돼서 왔는데도 믿지 못하고 대놓고 등쳐먹으려 했을까?
로이 형 말하는 거다.
제임스 형도 크게 다르지 않겠지.
어쨌든 모두 과거의 일이 되었다.
나는 이제 대륙에서 적수를 찾기 어려울 만큼 강해졌고, 국가 단위의 군사력을 휘하에 거느리고 있으며, 원하기만 하면 가랑이를 벌려주는 계집들의 수를 다 세기가 힘들다.
“링링.”
“뭐냐멍.”
“너를 사자로 임명한다. 형에게 대화를 원한다고 해.”
몬두르 성 때와 마찬가지로 공성 전에 선전포고하려는 것이다.
비록 그때는 성벽 너머로 날아온 화살에 사절이 죽었으나 링링은 그래도 대주급 전력이니 허무하게 죽는 일 따윈 없으리라 본다.
본래는 셰릴을 사자로 임명하려 했다.
아무래도 베르너 본성은 나뿐만 아니라 기사 훈련을 받던 셰릴에게도 뜻깊은 장소이니 말이다.
하지만 현재 그녀는 누군가와 협상할 상태가 아니다.
“서방님, 굳이 그런 절차를 지킬 필요가 있을까요? 명령만 내려주시면 제임스 일가의 삼족을 멸하겠습니다.”
저 핏발 선 눈을 봐라.
아버지였던 핀돌프 기사단장을 죽인 것도 모자라 데스나이트로 만들어 명예까지 모욕한 첫째 형에 대한 원독이 어찌나 깊은지 주변에 있기만 해도 피부가 따끔따끔할 지경이다.
“셰릴, 심정은 알겠다만 자중해라. 직진하던 돌아서 가든 첫째 형이 파멸로 향한다는 결말은 변함없다.”
“하지만…”
“하지만 뭐?”
감정적으로 공감해주고 편들어줬다고 금세 기가 살아서 또 선을 넘으려 한다.
서늘한 눈빛으로 한번 쳐다봐주니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고개를 숙이며 나에게 사과했다.
“죄송해요, 주인님.”
“알았으면 됐다.”
입술을 꽉 깨물고 주먹에서는 피가 흘러나오고 있을 정도로 화가 났지만 내 말을 지키려는 모습을 보니 역시 정실부인의 클라스가 엿보인다.
링링이 등에 백기를 걸고 성문을 향해 다가갔다.
몬두르 성 얘기를 들어서인지 여차하면 도망갈 만반의 준비를 하고 천천히 접근하는 그녀.
지근거리까지 도달하자 큰소리로 외친다.
“나는 데이몬 백작님을 모시는 링링이다멍! 제임스 베르너 공자는 성문을 열고 베르너 백작가의 정당한 주인을 맞이하라멍!”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개소리하지 말라고 할까?
아니면 화살을 쏘아 보낼까?
마법을 시전할 지도?
내 모든 예상이 틀렸다.
땅이 울리는 듯한 굉음과 함께 두꺼운 철문이 서서히 열리고 있었다.
드르르륵!
이렇게 말을 잘 들을 줄은 몰랐는데.
예상치 못한 행동을 저질러 주는 게 또 첫째 형답다.
베르너 백작성에서도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통 알 수 없는 사람이었으니.
성문이 열리고 백마에 탄 첫째 형과 그 호위 병력이 모습을 보였다.
기분 나쁠 정도로 피와 흡사한 색깔의 붉은 머리카락과 핏줄이 보일 정도로 창백한 피부.
이런 한낮의 태양과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 사내다.
정말로 뱀파이어가 아닌지 의심되는 첫째 형.
저 멀리서 내가 있는 곳을 정확히 파악하고 나와 눈을 마주쳤다.
“동생아, 오랜만에 고향을 왔는데 사람을 보내지 말고 직접 오려무나.”
싱긋 웃으며 손짓으로 까딱거리는 저 여유로움에 토악질이 나온다.
만나보니까 원래 저런 놈이었다는 게 새삼스레 다시 기억이 났다.
“루나, 부탁해.”
“아우우우우!!!”
힘찬 하울링과 함께 커다란 암늑대가 땅을 박차자 금세 재수 없는 면상이 가까워져 왔다.
둘 간의 거리는 지척.
한 호흡 만에 도달할 수 있는 거리.
베르너 백작가의 성문 바깥에서 우리는 몇 년만의 재회를 했다.
“반가워, 형.”
그러고 보니 빙의 후에 내가 제임스 형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던가?
없었던 것 같다.
워낙에 나를 벌레 취급하며 말조차 붙이지 않으려고 했으니까.
사실상 나 송길준은 이 녀석과 초면인 셈이다.
“많이 달라졌구나. 예전엔 눈도 못 마주치더니.”
“그때도 무서워서 그런 건 아니었어. 짐승 새끼랑 굳이 시선 교환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지.”
도발에 어떻게 대처하려는지 궁금해서 넌지시 잽을 던져봤으나.
역시나 재미없는 녀석.
로이였으면 얼굴 시뻘게져서 달려들만한 발언에도 별다른 반응 없이 싱거운 미소만 짓는다.
“역시 너는 데이몬이 아니야.”
속으로 뜨끔했다.
“드디어 형이 미쳐버린 건가?”
“예전에 넌 절대 이렇게 당당한 놈이 아니었어. 영혼까지 유약한 느낌이었지.”
“사람이 바뀔 수도 있지.”
“아냐. 너는 사람이 바뀐 게 아니라 아예 다른 사람이야.”
확신을 하고 말하는데 내가 더 할 말이 없다.
“집에서 쫓아낸 동생이 갑자기 말도 안 되는 거대 세력의 수장이 돼서 나타났다. 게다가 내가 안배해놓은 몬두르 성의 언데드까지 해치웠지. 거기엔 분명 데스나이트까지 있었을 텐데 말이야.”
“지금 악마와 손을 잡았다고 고해성사하는 건가? 이대로 홀리엔에게 심판받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지?”
“크하하하하!!”
이 미친놈이 갑자기 웃네.
조증이 있나?
“대천사의 대적점인 마왕들을 믿는 건 너나 나나 매한가지 아니냐.”
“무슨 소리야? 내가 왜 악마를 믿어.”
“그러면 아니란 말이냐?”
심유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 첫째 형은 나름의 증거가 있는 것 같길래 물어보았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원래 재활용도 불가능한 루저 놈이 마녀의 숲에서 실종. 이후에 사람이 달라져서 나왔다. 게다가 나와 주기적으로 교역하던 노예상인들이 마녀의 숲에서 의문의 공격에 당했다는 소식도 들어왔지.”
제기랄, 거기서 소문이 샜군.
완벽하게 처리했다고 여겼는데 어디서 빈틈이 생겼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너는 마녀의 숲에서 강력한 군대를 얻게 되었지. 수인족 용병들은 노예상단에서 탈취한 검투노예들이었을 테니 템프강 북부 점령은 누워서 떡 먹기였을 거야.”
이 형 말 잘하네.
소설 써도 되겠어.
그 소설이 대부분 맞아들어가고 있어서 조금 기분 나쁘지만 말이야.
“마법사 병력도 있겠지. 아마 마녀의 숲에서 마녀를 만나서이지 않을까?”
올리비아의 존재도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고.
“강력한 마녀였을 거다. 아마 내가 알던 한심한 동생 데이몬은 거기서 죽었을 터.”
“그럼 지금 너와 마주 보며 대화하고 있는 나는 뭔데?”
“악마. 너는 악마가 틀림없어.”
어디선가 딩동댕! 하고 실로폰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 같았지만 애써 무시했다.
“넌 마녀가 소환한 악마 내지는 마계 출신의 무언가일 거다. 동생을 죽이고 안에 들어가 있는 거겠지.”
원래 마법사들은 다 이렇게 똑똑한가?
완전히 정답은 아니지만 내가 빙의했다는 사실까지는 얼추 추리해냈다.
“너나 나나 똑같이 대천사에게 등 돌린 처지. 딱히 너한테 몬두르 성의 실험체들을 감출 이유가 없었다. 미련한 로이 녀석이 지옥에서 올라온 놈에게 이길 거로 보지도 않았고. 애초에 이런 순간이 오리라 생각했다.”
세상에 자기가 모르는 건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재수 없는 척을 하는 제임스 녀석이 두 팔을 좌우로 활짝 벌리며 의기양양해 한다.
인정할 건 해야겠다.
이 녀석네 집안은 모자(?子) 모두가 내 속을 긁는 재주가 있는 게 확실하다.
두고 봐라.
너희 둘은 특별히 공들여 작업해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