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1화 〉 분노와 광기
* * *
내가 결심하든 말든.
제임스 형은 열심히 떠들었다.
“사실 나는 네 등장이 무척이나 반가웠다.”
“어째서?”
“카르마를 벌기 위해서 몬두르 성을 저 지경으로 만들어놨더니 처치 곤란이었거든.”
남자들뿐만 아니라 여인과 노인, 아이들까지 언데드로 만들었으니 그럴 만도 했겠다.
“그때 마침 딱 네가 온다는 소문이 들리더군. 게다가 내 예상대로 너는 악마와 결탁한 놈이였고 말이야.”
제임스의 시선이 내가 끌고 온 중갑대와 녹귀대에 멈췄다.
“저건 네가 조종하는 건가? 아니면 마녀가 조종하는 건가.”
“네가 알 필요는 없지.”
“하긴 그렇군. 아무튼 나는 너를 여기서 죽일 생각이 없다.”
“생포하겠다고?”
“그래, 팔다리 하나쯤은 잘릴 수도 있겠지만 널 잡아서 법국에다 넘기겠다.”
이 소름 돋는 놈이 나랑 똑같은 생각을 하다니.
나도 몬스터와 마녀들을 끌고 악마후보자 스킬을 써가며 마음껏 싸운 뒤에 법국 성녀가 오면 첫째 놈에게 다 뒤집어씌우려 했는데.
저놈 또한 나에게 모든 책임을 돌려서 법국의 입을 막을 계획이었나 보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이겨야 할 이유가 더 늘었다.
승자는 악마숭배자를 잡은 영웅이 되는 거고, 지는 놈은 상대가 싸지른 똥까지 무덤까지 안고 들어간 채 죽어서도 욕을 먹어야 한다.
“좋아. 더 끌 것도 없지.”
“자신은 있고?”
“알량한 짐승년들과 마녀년들 믿고 여기까지 온 거라면 크게 착각한 거라고 믿고 싶군.”
말이 끝남과 동시에 제임스가 한쪽 손을 올리더니 엄지와 중지를 딱 소리가 나게 부딪쳤다.
경쾌한 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갑자기 나와 루나, 그리고 링링이 선 땅이 폭삭 내려앉았다.
콰콰콰쾅!!
“사랑하는 동생에게 전하는 환영 인사다.”
“빌어먹을 놈이 어설픈 함정을 설치해놨군. 걸릴 것 같…”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무너진 땅에서 곡도를 든 건장한 사내들이 튀어나왔다.
누군지 한 번에 알아봤다.
바로 제임스가 영지의 무고한 처녀들과 거래한 검투노예들이다.
“데이몬부터 생포해라. 목숨만 붙어있으면 상관없다. 나머진 모두 죽여.”
사방에서 에워싸서 기습하는 놈들은 놀랍게도 언데드가 아니었다.
그래서 더 상대하기 까다로웠다.
기습의 묘리를 살린 익스퍼트급 이상의 베테랑 검투사들.
아룬마을에서 상황과는 완전히 반대다.
그렇지만 루나와 링링, 나도 검투사라면 이골이 난 전사들이다.
“하아앗!”
루나가 단숨에 변신을 풀었다.
이런 상황에서 면적이 넓으면 방어할 곳만 늘어나기에 현명한 선택이다.
나도 루나의 등에서 튀어 올랐다.
공중에 떠 있는 상태에서 레벨 40가량의 검투사 세 명이 일제히 따라붙었다.
어찌나 피를 머금었는지 어지러울 정도로 혈향이 풍기는 곡도가 나를 향해 쇄도했다.
“죽어라!!
처음 들어오는 녀석의 손목을 발로 차서 들고 있는 무기를 날렸다.
허리를 비틀어 두 번째 들어오는 직선의 칼날을 피하고 휘두른 놈의 팔뚝을 겨드랑이에 넣어 그대로 꺾어버렸다.
“끄아아악!!”
아직 방심해서는 안 된다.
나머지 한 명이 오고 있었다.
그 녀석에게는 프랜드 실드를 시전했다.
한마디로 나에게 잡힌 놈을 앞세웠다.
“사, 살려줘…”
마지막 놈은 칼을 크게 횡으로 휘둘러서 동료와 함께 나를 베려 했다.
이건 예상 못 했는데.
나는 이미 공중에서 떨어지는 상태에서 두 명의 공격을 막아내느라 자세가 무너져있다.
힐끗 옆을 보니 링링과 루나도 자기 앞가림하기 바쁘다.
이러면 몸을 돌려 약간의 부상을 감수하고 다음 호흡을 노려야 한다.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을 마치고 왼쪽 팔뚝을 내주려 하는 순간,
쐐애애액!!
뒤에서 날아온 철시(??)가 마지막 놈의 이마를 정확히 때렸다.
“끄억!”
동공에 빛을 잃고 추락하는 적을 보다가 바로 몸을 돌렸다.
저 멀리서 바람에 금발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대궁으로 이쪽을 겨누고 있는 하녀가 보였다.
메이의 응원사격이었다.
“백작님을 보호해!”
올리비아의 뾰족한 목소리와 함께 저 멀리서 빠르면서도 넓은 범위를 타격할 수 있는 2서클 마법 매직 미사일 수십발이 쏟아져 내렸다.
귀녀대원과 올리비아, 소피아까지 합동해서 펼쳐낸 결과였다.
나름 장관이었는데, 그 모습을 보니 그동안 마법 전력을 키운 보람이 느껴졌다.
물론, 이건 나중에 한 생각이다.
그리고 그 마법들마저도 반대편에서 날아온 똑같은 매직 미사일들에 요격당했다.
콰콰콰쾅!!!
생각해보니 저쪽도 마법 전력이 있었다.
성문 위쪽에 로브를 입은 십수 명가량의 마법사들이 쉴 새 없이 입술을 달싹이며 룬어를 중얼거렸다.
선두에 선 사람은 제임스 형님과 똑같은 붉은 머리에 창백한 피부를 가진 뇌쇄적인 미모의 여인이었다.
“제기랄! 첫째 엄마가 마법사였어?”
이건 나도 몰랐던 반전.
게다가 상당한 수준의 마법사인 듯하다.
짧게나마 나와 눈을 마주친 그녀가 눈을 반개하며 웃었다.
“우리 아들. 오랜만이네? 잘 지냈니?”
“씨발련아, 넌 곱게 뒤질 생각은 버려라.”
“그런 상스러운 말을 할 시간에 네 주변을 좀 둘러보는 게 어떻겠니?”
저년 말대로 함정에서 한 호흡 돌린 거지 아직 빠져나간 게 아니다.
남은 검투사들이 나와 루나, 링링을 데려가려고 달라붙었다.
“끈질긴 녀석들.”
“심혈을 기울여서 키운 놈들이다. 네 녀석이 마계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 놈인지 모르지만, 몸뚱이가 데이몬인 이상 한계가 있겠지.”
나를 마계의 마족 그 언저리로 간주하고 그에 맞춰 상대법을 짜온 거다.
치명적인 한 번의 기습으로 나를 무력화시키기.
솔직히 칭찬해주고 싶었다.
내가 제임스였어도 이 이상의 효율적인 전략은 짜지 못했다.
하지만 나도 이게 전부는 아니다.
악마후보자 스킬을 이때 아니면 언제 쓰겠는가.
망설이지 않고 이 상황에 가장 좋은 스킬을 떠올렸다.
[분신술 개수 3]
나까지 포함, 네 개의 데이몬이 생겼다.
검투노예들의 수준이 높아서 이 이상 분신 수는 늘려봐야 한 번에 썰려서 의미가 없다.
늘어난 분신들이 사방에서 덮치는 놈들의 칼을 대신 막아주며 또 한 번의 호흡을 벌었다.
“호오? 그건 마족 특유의 스킬인가? 아니면 너도 나 같은 후보자였나 보군.”
무섭도록 머리 좋은 제임스 놈은 내 분신술을 보자마자 내가 후보자란 것까지 유추한다.
“너를 놓칠 수 없는 이유가 더 늘었어.”
“좆까. 여기서 나가면 넌 뒤졌다.”
“후후, 일단 올라오기부터 해봐.”
현재 전황은 이렇다.
베르너 성 앞에 펼쳐진 깊은 구덩이.
나와 루나, 링링은 빠져나가려고 하고.
바닥에 숨어있던 검투사들은 물귀신마냥 잡아서 끌어내리려고 하고.
내 부하들은 지원사격을 퍼붓고.
베르너 성에서도 이에 맞서서 맞불 사격을 발사하는 아주 어지러운 상황.
“개 같은 놈아! 넌 죽었어!”
셰릴이 독기 가득한 목소리와 함께 구덩이로 뛰어들었다.
함정의 면적이 너무 커서 제임스에게 가려면 구덩이를 관통해서 가야 했다.
“링링 대주를 구해야한다멍!”
이어서 링링과 루나를 구하기 위해서 월랑대도 뛰어들었다.
“취익! 우리도 간다!”
“쿠워어어!”
몬스터들도 구덩이 아래로 떨어져 내리자 더욱 난장판이 벌어졌다.
하지만 수적으로 우세하니 검투사들이 급격하게 죽어 나갔다.
“모두 죽여!”
전신이 피로 물든 셰릴이 악귀와 같은 표정으로 앞을 가로막는 녀석의 사지를 거침없이 절단했고.
티모가 독침으로 뒤에서 기습하려는 녀석들을 저격했으며.
트런들이 한 번의 몽둥이질로 검투사들을 구덩이 너머로 날려버렸다.
만루홈런이었다.
“끄아아아악!”
“버텨! 버텨야 한다!”
“크으윽!!"
패색이 짙어질수록 검투노예들의 저항 또한 격렬해졌다.
중갑대의 오크들과 녹귀대의 고블린들 상당수가 숨이 끊어진 채 바닥에 굴러다녔다.
이쯤 되면 검투사 놈들이 겁에 질려야 하는데.
역시나 죽음을 친구처럼 생각하는 놈들인지라 죽을 때까지 한 놈은 데리고 간다는 마음으로 지독하게 물고 늘어진다.
하지만 이놈들을 처리하고 구덩이를 탈출한다면?
그때가 제임스의 제삿날이라고 생각하며 시야를 가리는 피를 손등으로 걷어낸 후 고개를 위로 들었다.
함정 위쪽에서 팔짱을 끼며 지옥도를 감상하고 있던 첫째 형의 미소가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
“뭐가 그리 웃기지? 곧 죽을 생각에 그렇게 신이 나나?”
“왜 내가 죽는다고 생각해?”
“네놈이 애지중지 키운 검투사 놈들이 정리당하기 일보 직전이다. 그렇게 여유 부릴 때는 아닌 것 같은데?”
확실히 내 전력들은 강해서 검투사 놈들이 감당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제 남은 검투사 놈들은 20명도 채 안 남았다.
내 말을 들은 제임스의 입꼬리 한쪽이 삐뚜름히 올라갔다.
“너는 뭔가 착각하고 있어, 데이몬. 과연 내 병력이 검투사뿐일까?”
제임스의 말을 듣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러고 보니 몬두르 성에는 데스나이트들이 있었는데 여기서는 한 기의 데스나이트도 보지 못했다.
설마 몬두르 성에만 기사를 배치했을 리도 없고.
“기사들은 다 어디에 놨지?”
“그걸 이제 묻는 거야? 뭔가 이상한 점을 못 느끼겠어?”
충분히 느끼고 있다.
아까부터 우리 쪽을 지원하던 마법이 뚝 끊겼다.
“크크큭, 멍청한 녀석. 악마후보자가 머리가 그렇게 나빠서야 쓰겠나? 지금 너는 그곳에 가라앉아 있어서 안 보이겠지만 현재 내 모든 병력이 너희 마법대를 타격 중이다.”
제대로 당했다.
귀녀대원들은 아직 레벨 30대 마법사들이 많은데.
상대적으로 기동력이 부족한 애들에게 기사, 혹은 데스나이트들이 달려들고 있나 보다.
그리고 성벽 위의 마법사들도 우리를 노리고 있지 않다.
위에서 구덩이를 노리고 마법을 내리꽂으면 편할 텐데도.
어딘가를 향해 마법을 계속 난사하고 있었다.
올리비아가 이끄는 귀녀대 방향이 분명했다.
지구에서도 국지전이 벌어질 경우 최우선 타격 목표는 상대 포병.
아주 기본 중의 기본인데.
너무 안일했다.
나는 몰라도 내 여자 중에 몇몇은 이번 전투에서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 무렵,
“마이 로드! 저희는 괜찮습니다!”
육림대주 엘리샤의 내공 가득한 목소리가 울렸다.
그러고 보니 육림대가 있었다.
몸이 날랜 그녀들이 귀녀대를 둘러싸고 호위진을 펼친 모양.
모두 날 구하겠답시고 구덩이에 빠지지 않아서 불행 중 다행이었다.
“최대한 빨리 정리하고 함정을 돌파한다.”
이건 내 명령.
“너희의 가치를 증명해라.”
이건 제임스 명령.
애초에 첫째 놈은 검투사 모두를 희생양으로 쓰려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모두 죽여라!”
“동료들의 복수를!”
“으아아악!!”
검투사들은 벽에 붙어서 반원진을 유지했고 우리는 덩치 큰 중갑대주와 트롤들을 앞세워서 대열을 와해시켰다.
진형에서 튕겨 나온 놈들은 셰릴의 레이피어가 번뜩이면서 급소를 공략했다.
나도 마음이 급해져서 마구잡이로 주먹을 휘둘러 끝까지 저항하는 놈들의 머리통을 부쉈다.
다른 년들은 그렇다 쳐도 메이나 올리비아, 엘리샤가 죽을 경우에는 나도 내가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겠다.
“제기랄, 더는 못 참겠다. 링링! 네가 여기 임시 사령관이다. 검투사들 정리하고 성문 쪽으로 돌격해라.”
“알겠다멍!”
월랑대주에게 임시 지휘권을 주고 나는 셰릴과 함께 루나의 등에 올라탔다.
“나와 셰릴은 귀녀대와 육림대를 원조한다.”
루나가 빠른 발을 이용해서 깊은 구덩이를 빠져나왔다.
이런 나를 본 검투사들이 돌이나 비수를 던져서 진로를 방해하려 했으나 당연히 어림도 없었다.
오히려 상대를 눈앞에 두고 한눈을 판 대가로 내 부하들의 분노와 광기를 정면으로 맞닥트려야 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함정에 매복했던 검투노예들은 최후의 1인까지 남김없이 자유를 찾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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