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4화 〉 응, 안 돼. 그거 마셔.
* * *
노다지를 발견하는 일은 늘 즐겁다.
집무실 바닥에 생긴 지하계단을 밟고 거침없이 내려갔다.
함정이 있을까 싶었지만 어떤 간 큰 놈이 백작성 집무실에 들어와서 비밀장치를 풀고 백작의 개인금고를 뒤지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는지 딱히 화살이 날라온다거나 독무가 퍼진다든가 하는 함정 따윈 없었다.
“큭큭.”
절로 웃음이 나오네.
문 앞에 도착했다.
철문을 강하게 밀어젖히니,
드르르륵!!
고막을 긁는 소리와 함께 엄청난 금은보화…
“에게?”
까지는 아니었다.
적당히 금괴 몇 개가 놓여있었는데.
금이 산처럼 쌓여있는 광경을 예상한 나로서는 살짝 아쉬웠다.
오히려 금괴보다는 각종 마법 서적과 시약실험기구들이 가득하다.
이걸 보니 빙의하기 전 지구에서 공과대학 젊은 여교수를 그 대학 실험실에서 작업친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때 봤던 실험실과 흡사한 느낌.
“마법사들이 돈 먹는 하마라는 게 괜한 말이 아니었군.”
내가 주먹 쓰는 건 자신있어도 이런 룬 문자는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 금괴만 좀 챙기고 이곳은 올리에게 맡겨야겠다.
또 건질 게 없나 둘러봤더니 구석에 독서실 책상 같은 게 있다.
다가가보니 책상 위가 수많은 종이들로 어지러웠는데.
그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종이는 바로,
“편지?”
고풍스러운 장식이 되어있는 편지지가 있길래 나도 모르게 손이 갔다.
내용물을 확인.
거기엔 이렇게 적혀있다.
To. 제임스 베르너 백작에게
나 프리우스요.
요새 통 연락이 없으시군.
베르너 백작령에서 좋은 소식을 들려주겠다고 한지 벌써 1년이 지나가고 있소.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줘야 하는 거요?
당신이 저지른 짓을 새어나가지 않게 하는 것만으로도 나와 쟈벨은 매일 왕정에서 구슬땀을 흘리고 있소이다.
지원은 충분히 해줬던 거 같소.
겨우 기사단 하나 거느리고 있는 로이 베르너를 이기지 못할 거면 우리가 사람을 잘못 봤다 생각하고 그대가 벌인 짓을 왕정에 낱낱히 고하고 홀리엔 법국의 심판을 받게 하겠소.
그게 싫다면.
당신이 어떻게 그런 특수한 능력을 얻었는지 알려주시오.
혹여라도 그것이 악마와의 계약으로 이루어진 거라면 당신이 중개인이 되어서 악마를 소개시켜주든지, 아니면 소환방법을 알려주든지.
만약에 알려준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나와 쟈벨은 당신에게 무력지원을 해줄 용의가 있소.
어서 빨리 정리하고 우리 귀족파에 들어와야 할 거 아니오?
어차피 윌렛 왕가는 저무는 해요.
그쪽이 뭘 노리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다만 괜한 저울질의 끝은 파멸이라는 걸 명심하시오.
From. 프리우스 공작
호오?
상당히 흥미로운 편지인데?
프리우스 공작이라는 사람이 누군지는 셰릴에게 들었다.
이 코딱지만한 윌렛 왕국에서 나름 잘 나가신다는 분.
한마디로 뱀의 머리통이라 할 수 있겠다.
쟈벨이라는 이름도 나오는데 내가 알기로 이놈도 후작이다.
그러면 왕국에 몇 없는 공작과 후작이 뭉쳤다는 말인가?
“왕실의 권위가 바닥을 기고 있겠군.”
어렵지 않게 추측이 가능하다.
딱히 화가 나거나 그렇지는 않다.
어차피 이곳 사람도 아닌데다가 누구에게 충성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사람이니 말이다.
아무튼, 프리우스 공작과 쟈벨 후작 같은 윌렛 왕국의 실세 귀족들이 제임스와 긴밀하게 연락을 하고 있었다.
제임스가 악마후보자 스킬을 써서 성 하나를 언데드로 만들고 온갖 사악한 짓을 벌이는 걸 알고도 눈감아 줬고 말이다.
“어쩐지 이상하긴 했지.”
성 하나를 통째로 언데드로 만들고 베르너 백작성에서도 구울들이 버젓이 돌아다니는데 이게 외부에 안 퍼지다니.
이제 보니 안 퍼진 게 아니라 퍼지긴 했으나 수습을 잘한 거였다.
그리고 홀리엔 법국에 신고한다 어쩐다 말이 많지만 이 편지가 원하는 건 의외로 간단했다.
니 똥 치워줄 테니 악마후보자 되는 법 알려줘.
딱 이걸로 한줄 요약이 된다.
프리우스 공작과 쟈벨 후작.
이 두 놈은 자신들도 악마후보자가 되어 강력한 능력을 가지고 싶어하는 덜떨어진 놈들이었다.
다만 궁금한 점이 있다면,
“왜 제임스는 로이를 정리하지 않은 걸까?”
내가 경험한 제임스는 둘째 형 로이에겐 미안하지만 아예 상대가 안 될 정도였다.
처음에는 언데드를 전면에 내세우기 부담스러워서 그런줄 알았으나.
뒤에서 덮어줄 사람이 있다면 막말로 언데드 군단으로 로이 형의 근거지였던 켈리알 성을 쓸어버렸어도 될 일이다.
당장 페어리 드래곤만 출격시켜도 이를 감당할 수 있는 인원이 로이 측에는 사실상 없다봐도 무방했으니.
“제길!”
아까 물어봤어야 했는데.
똥통에 처박아버려서 꺼내서 심문하기가 귀찮다.
어차피 대답도 안해줬겠지.
신경질적으로 책상 위를 더 뒤져보았다.
그리고 건진 수확은 몇 개의 추가 편지.
옆동네 귀족 영애에게 추잡하게 들이댄 편지는 생략하고.
척 보기에도 비밀을 많이 품었을 것 같은 시커먼 편지지를 하나 개봉했다.
거기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TO. 나의 주인 피에른 님에게.
오? 제목부터 월척인데?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초집중해서 편지를 읽어본다.
나의 주인 피에른 님에게.
주인님, 보내주신 페어리 드래곤은 잘 받았습니다.
레벨도 상당히 높아서 좋은 전력이 될 거로 예상합니다.
알려주신 방법으로 저도 어머니도 나날이 강해지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주인님 덕분입니다.
프리우스 공작과 쟈벨 후작은 지속적으로 연락이 오고 있습니다.
멍청한 녀석들을 어떻게 굴릴지는 생각 중입니다.
최근 마녀의 숲을 관통하는 노예공급라인이 파괴된 것에 대해서 우려가 깊으시다 들었습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곳에 자리잡은 제 막냇동생 데이몬 베르너는 태생부터가 글러먹은 놈이니 언제든지 잡아먹을 수 있습니다.
물론 제가 볼때는 그 녀석이 마녀에 의해 일종의 ‘개조’를 당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만.
그렇다 할지라도 제가 거느린 군사력으로 금세 잡아먹을 수 있는 놈인건 달라지지 않습니다.
윌렛 왕국은 점점 병들고 있습니다.
왕정파와 귀족파가 하루가 멀다하고 싸우고 있으니 알아서 침몰하기만을 기다리면 됩니다.
그때까지 저는 순진한 둘째 아우와 줄다리기 하는 척하면서 몰래 힘을 키워나가겠습니다.
이제 주인님의 대업이 완수되는 날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때가 되었다 싶으면 군사를 일으켜 윌렛을 집어삼키겠습니다.
그때가 되면 굳이 마녀의 숲을 통해서 비좁게 노예 공급을 할 필요가 없겠군요.
윌렛 왕국의 모든 사내가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 일할 것이고 모든 계집이 당신의 즐거움을 위해 봉사할 겁니다.
흑마법을 위한 실험재료도 넘쳐나겠지요.
그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충실한 종은 그 날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윌렛 왕국과 갈리아 제국, 그리고 모든 판타지아 대륙이 당신의 발 아래 무릎 꿇기를 바라면서.
From 제임스 베르너.
오우, 쉣!
악마후보자 제임스 형이 피에른 대공의 부하였어?
이건 진짜 상상도 못했다.
그리고 윌렛 왕국을 통째로 삼켜서 노예공장으로 만들려 했네.
만약에 내가 조금만 더 늦게 움직였다면 어떻게 됐을까?
윌렛왕국을 완전히 삼킨 제임스 형은 정말 ‘물량’빨로 카르마를 쌓았을 것이고.
최소한 나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의 카르마를 쌓았다면 결과는 내 패배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나에게 심상세계 힘이 있다만.
일정량을 초과해서 사용했다간 오히려 나를 잡아먹는 독이 될테니.
심연왕에게 내 영혼이 붙잡히면서 배드엔딩이 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휴, 제임스 형이 날 보고 여유를 부린 이유가 있었네.”
1년만 늦었어도 어떻게 될지 몰랐으니 지금 잡아서 다행이다.
그건 그렇고.
피에른 대공 이 새끼는 안 끼는 데가 없네?
판타지아 대륙에서 벌어지는 음습한 일을 파헤치다보면 다 이놈이 뒤에 숨어있다.
한손으로 대륙을 쥐고 뒤흔드는 흑막.
웃긴 건 이런 놈의 와이프가 대륙에서 가장 고결하고 유명한 성녀라니.
이율배반적인 것도 정도가 있지.
그리고 가장 마음에 안 드는 점.
“씨발, 그거 원래 내 역할인데.”
원래라면 사상 최악의 주인공이 흑막의 수장으로 이런저런 일을 해야하는 법인데.
어떻게 된 게 이놈의 대륙은 나보다 사악해 보이는 새끼들이 너무 많아서 그거 청소하는 것부터가 일이다.
어쨌든 간에.
제임스 형의 비밀 공간에서 생각만큼의 재물은 얻지 못했으나 생각 이상의 정보는 얻었다.
무엇보다 그의 뒤에 프리우스 공작, 쟈벨 후작 뿐만 아니라 피에른 대공까지 있었다는 사실 확인.
영지 전쟁에서 승리하고 백작성을 점령했는데도 할 일은 더 많아진 느낌이다.
“에라이!”
볼멘 소리를 내뱉으며 책상 위에 있던 실험일지를 뒤져보았다.
솔직히 무슨 말인지 못 알아보겠지만 혹시 몰라서 확인해보는 거다.
“도대체 이런데 처박혀서 뭘 만들고 있었던 거야? 불로장생약이라도 만들었나?”
궁금해서 확인한 실험일지.
역시나 룬 문자로 쓰여서 알아볼 수가 없었으니.
“메이!”
큰 소리로 부르자 귀가 좋은 메이가 계단 아래로 내려왔다.
“와 이런 곳이 있었네요?”
“올리 좀 불러와. 빨리, 급해.”
“네.”
바로 달려온 올리비아.
그렇지 않아도 비좁은 지하실에 올리비아가 입장하니 올리브 향이 실내를 가득 메운다.
“주인님? 이곳은…”
“이것부터 확인해봐. 첫째형이 뭘 연구했는지 나도 좀 알자.”
오자마자 일거리를 던져주는 나쁜 사장님. 그것이 나다.
올리비아는 내가 건넨 룬 문자 가득한 실험일지를 요모조모 살펴봤다.
종이를 읽는 그녀는 갑자기 무슨 이유에선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뭔데? 왜 얼굴이 홍당무가 됐어?”
“주인님, 이건…”
말끝을 흐린 그녀가 한동안 대답을 못하다가 작게 대답했다.
“…약이에요.”
“뭐라고? 크게 말해.”
“미약 연구일지에요.”
“미약? 내가 생각하는 그 미약? 여자 발정시키는 약?”
“그, 그렇게 말씀하면 너무 저렴해보이잖아요. 여자를 기쁘게 하는 약 정도로 말하면 될 것 같아요.”
그거나 그거나지.
“세, 세상에…어떻게 여자들에게 이런 짓을 할 수가 있죠?”
“왜, 뭔데. 나도 좀 알자.”
“일반 미약의 적어도 10배는 더 강력한 미약이라네요. 먹기만 해도 짧은 시간 고통스러울 정도의 성욕이 올라온데요.”
어쩐지 지하실 구석에 어울리지 않는 수술대 겸 침대 같은 게 있더만.
제임스는 종종 이곳에서 여자들에게 미약을 먹이고 그런 짓들을 했나 보다.
“갑자기 열이 받네.”
첫째 형이 날 빼놓고 이렇게 재밌는 짓을 하다니.
원래 이런 짓은 나만 해야하는데.
생각하면 할수록 제임스를 똥통에 빠트린 게 잘한 일이란 생각이 든다.
“그러면 저 삼각플라스크 안에 있는 분홍 액체가 미약이란 얘기네?”
“맞아요. 가장 마지막 실험일지에 적힌 게 그저께니까 아직 괜찮을 거예요.”
그렇단 말이지.
흠…미약이라.
그것도 강력한 효과를 가진.
괜히 궁금하게 만드네?
“올리비아.”
“네?”
“너 오늘따라 되게 예쁘다.”
아닌 게 아니라 풍성하게 흘러내린 올리브빛 머리와 여전히 매력적인 뽀얀 피부.
토실토실한 엉덩이가 남자의 음심을 자극한다.
미약을 보고 그런 생각이 든 게 아니라 난 원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정말이다.
“……아니죠? 주인님?”
그리고 올리비아는 머리가 비상한 계집이다.
갑자기 내가 하는 칭찬에 불안한 표정과 함께 녹색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린다.
“이, 일단 이건 증거물이니까 제가 보관할게요. 그럼 나갈까요?”
서둘러 지하실 바깥으로 벗어나려는 그녀.
하지만 출구에는 어느새 건장한 덩치의 내가 막아서고 있다.
키가 작은 올리비아다 보니 고개를 바짝 들어야 나와 눈을 마주칠 수 있었다.
“주인님…저 나가도 돼요?”
울먹이는 목소리로 나에게 묻는 그녀에게 하얀 이를 보여주며 대답해줬다.
“응, 안 돼. 그거 마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