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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화 〉게임오버였다





〈 17화 〉게임오버였다

아침에 갔던 길을 기억해서 연무장에 갔다.
그곳에는 사람 하나 없이 텅텅 비어있었다.

셰릴을 데려간 내 행동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다들 이에 대해 떠드느라 훈련이고 나발이고 어디론가 사라진 모양이었다.

그녀는 그곳에서 풀 플레이트 아머를 착용하고 옆구리에는 레이피어를 패용한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와, 정말로 방심할 생각은 없구나?

“레벨 1짜리 상대로 중무장을 한 채로 결투에 임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아?”
“네놈이 뭔가 숨기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어. 알리온 부족의 신형 레벨 가리개라도 얻은 것인가?”

알리온 부족?
거긴 또 어디야.
이년이랑 대화하다 보면 자연스레 알게 되는 것이 많다.

윌렛 왕국이야 내가사는 곳이니 빠르나 늦으나 저절로 알게  일.
그러나 홀리엔 법국이라던지 갈리아 제국, 알리온 부족은 셰릴과의 대화로 얻게 된 정보들이었다.

이럴수록 평행세계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을 옆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느껴진다.

이 여자 점점 욕심나네.
정복 욕구 솟구친다.

“아무리 그래도 나에게 검은 있어야 하는  아닌가?”
“이곳은 연무장. 연습용 목검부터 철검. 그리고 방어구까지 다 있다. 네가 준비할 시간 정도는 기다려주지.”

여유 부리는  봐라.
짜증이 나는구먼.
어차피 원샷 원킬의 전략을 짜온 내게 갑옷은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검도 딱히 필요 없다.
애초에 저 녀석은 검사.

이전세계에서 송길준은 나름대로 운동 좀 했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건강을 위한 것이었지,  여인처럼 전쟁이나 전투를 염두에 두진 않았다.
기껏해야 죽기 몇 년 전, 취미생활 삼아 종합격투기 좀 해봤던 것이 전부.
물론 웬만한 아마추어 격투가는 모조리 스파링에서 눕혔지만 말이다.

아무튼, 내가 대인전에 소질이 있다 하더라도, 평생을 검만 잡아온 년에게 검으로 승부하는 우매한 짓은 하지 않을 생각이다.
내가 아무것도 안 하고 멀뚱히 서있자, 셰릴의 눈이 가늘어졌다.

“뭘 하는 것이지? 어떤 무기와 방어구를 고를지 고민되는 것인가? 내가 골라줄 수도 있다.”
“아니, 난 아무것도 필요 없어. 너 따위는 주먹으로도 충분하다.”
“무척이나 오만한 말이라고 하고 싶지만, 어차피 결투의 책임은 네가 지는 것이다.”

세릴은 이제 더 화를 낼 기운도 없는 듯 그저 서늘한 눈빛으로 나에게 검을 세웠다.

“그런데 천사의 계약인지 뭐시긴지는 하지 않을 생각인가?”
“…그걸 잊고 있었군.”

그러면서 셰릴은 목걸이를 품속에서 꺼냈다.
목걸이에는 기묘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그녀는 그걸  쥐더니 눈을 감고 중얼거린다.

“위대하신 72 천사들이시여. 여기 하찮은 종복이 공증을 원하나이다. 강림하여 주소서.”

쩌저저적

바로 나와 셰릴이 서 있는 공간 가운데에 균열이 보인다.
이윽고 균열을 통해 등장하는 여성 천사.

키는 180cm 는 넘어 보인다.
역시 천사라 그런지 키가 크다.
평행세계에서 남자치고 키가 작은 나보다 머리  개는 커서 살짝 올려다봐야 할 정도.

그런 와중에 얼굴은 작아서 8등신은 그냥나올  같다.
늘씬하게 빠진 몸매가 지구에 있었을 당시 웬만한 모델 저리가라다.

눈부신 금발에 잡티 하나 없는 흰 피부와 탱탱한 둔부.
작게 잡아도 C컵은 될  같은 훌륭한 가슴이 내 시선을 잡아끈다.
게다가 화룡점정으로 등 뒤에 달린 순결함을 상징하는 깃털날개까지.

와, 누가 천사 아니랄까 봐  돌아갈 정도로 섹시하네.
하지만 저런 년은 지금 건드려서도  되고 건드릴 수도 없다.
당연히 천사니까 어마어마하게 강하겠지.

악마의 눈을 발동해서 얼마나 강한지 좀 볼까?
악마의 눈 발동!

[천사를 상대로는 악마의 눈이 발동하지 않습니다.]

“…음? 어디선가 불쾌한 악마 녀석들의 냄새가 나는 것 같군.”

고개를 두리번두리번하는 천사.
하마터면 X될 뻔했다.
악마연합에서 준 스킬이라 그런지, 스킬을 쓰는 순간 천사 녀석들은 느낌이 오나 보다.
앞으로는 조심해야겠다.

다행인 건 천사 녀석이 내가 악마연합 쪽 사람인  모르나 보네.
만약에 그것까지 알았다면 보자마자 날 죽이려들었겠지.
 정체는 악마연합 사람들만 알 것이라 짐작했다.

그나저나 72 대천사들이라더니만 할 일이 없나 보다.
부른다고 바로 오네.

“난 72 대천사 중 서열 69위의 라나엘. 네가 나를 부른 인간인가?”
“그렇습니다. 위대하신 대천사 라나엘님이여. 저와 저 남자와의 결투의 공증을 부탁드립니다.”

72등 중에서 69위면 그냥 쩌리 중에 쩌리 아냐?
그런데 뭔 폼을 저리 잡는데냐.

“각자가 승리 시에 원하는 결과, 혹은 패배 시에 상대가 지게 될 책임을 나에게 구두로 말하거나 서신으로 적어서 제출하도록 하여라.”
“구두로 전달하겠습니다. 저희가 원하는 것은 이렇습니다.”

그러면서 셰릴은 아까 내 방에서 얘기했던 내기의 내용을 상세히 말했다.
나는 혹시 그녀가 말을 바꾸거나 조건을 추가한 것이 있는지 꼼꼼히 들었다.
역시나 기사의 자존심이 있는지 중간에 꼼수를 부리는 등의 치졸한 짓은 하지 않았다.

정확하게 전달된 결투의 조건.
암기력이 좋은지 천사는 한 번에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인다.

“두 사람이 원하는 승부의 대가는 잘 들었다. 승패가 정해졌는데 승자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거나 패자가 대가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나 라나엘의 이름으로 직접 공증자를 우습게 여기는 녀석의 영혼을 단죄할 것이다.”

어우, 육체도 아니고 영혼에 다이렉트로 벌을 내린다는 거야?
천사의 계약이라는 것이 정말 어마어마한 구속력이었구나.
그렇다면 악마의 계약도 마찬가지겠지.

셰릴이 천사의 계약을 철석같이 믿는 이유를 알았다.

물론 천사가 내기를 이행하지 않은 자를 어떻게 처리할지는 모르겠지만, 죽는 것이 차라리 나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만약에 죽어서도 천사에게 영혼이 매여서 영원히 고통받을 것이면 차라리 현생에서 내기의 대가를 치르는 것이 낫겠지.

이제는 공증까지 이루어졌고 뒤가 없는 건곤일척의 승부다.
셰릴도 이를 느꼈는지, 눈매가 매서워지며 날카로운 칼끝을 나에게 겨누며 시선을 나에게서 떼지 않았다.

“나 라나엘. 두 사람의 공증을 천계에 기록했으니, 이를 모든 천사가 확인한 바. 나는 이제 돌아가겠다.”

스르르륵

라나엘은  일을 끝내고 조용히 강림했던 공간 균열로 들어가서 사라지려 했다.
나는 그런 라나엘을 붙잡았다.

“잠, 잠시만요!”
“뭔가 인간, 나에게  말이 있는가?”

다급한 부름에 그녀가 몸을 집어넣으려던 걸 멈짓하고 나를 쳐다본다.
셰릴도 내가 무슨 말을 할지 모르겠으니까 귀를 쫑긋 기울인다.
내가  말은 꼭 해야 되는 성미라서 말이야.

“귀엽고 섹시하고 깜찍하십니다! 우유빛깔 라나엘! 천상미녀 라나엘!”

순간 연무장에 내려앉는 침묵.
라나엘은 무슨 미친X 보는 것마냥  쳐다보고 있고 셰릴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다.
 흐르겠다, 이년아.
입 좀 닫자.

“…인간, 죽고 싶은가? 내가 만만한가?”
“죄송합니다.”

잘 안 통하네.
역시 천사 입장에서는 가소로웠겠지.

 번에 밟아 죽일  있는 벌레가 자기 외모 칭찬해봐야 자길 놀리는 거로 생각하겠지.
밟아 죽일까도 고려하고 말이야.
그렇다면  지금 죽을 뻔한 건가?

“정말 끝까지 저질이군요. 하다 하다 천사님한테까지 그럴 줄은 몰랐습니다. 그저 여자면 앞뒤 가리지 않고 들이받는 건가요?”
“…난 공증인일 뿐이지만 여자 네가 이겼으면 좋겠군.”

그러면서 얇고 긴 손가락을 들어 날 가리킨다.

“그리고 너. 개인적으로는 네가 내기에서 지고 대가를 이행하지 않았으면 한다. 천사의 신분으로 아무리 인간이 한심할지라도 건드리지 못하지만, 명분만 주어진다면 왜 천사가 악마보다 더한지 알려주겠다.”

오우.
내기에서 절대 지면 안 되는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물론 저런 섹시한 여인에게서 받는 벌은 포상이라고 생각하는 인간들도 있지만, 난 내가 주도권을 잡고 휘두르는 쪽이지 당하는 쪽은 아니거든.

라나엘?
너도 언젠간 보자고.
얼마나 오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천사는 그렇게 내게 경고의 제스처를 취하고 본래의 세계로 돌아갔다.
승부가 어떻게 진행되는지까지는 보지 않는 모양이다.
결과나 대가 이행 같은 것은 자동으로 파악해주는 기술이 따로 있을 것이다.

이제 연무장에 남겨진 사람은 단둘뿐.
셰릴이 다시 자세를 잡았다.
나도 긴장을 하며 지구에서 슬슬 격투기를 했던 기본자세를 잡는다.

다리를 살짝 굽히고 손을 들어 올려서 언제든지 주먹을 출수할  있는 자세.
내 희한한 자세를 보고 그녀가 비웃는다.

“도대체 그건 어디서 배운 거지? 빈틈이 하도 많아서 어딜 찔러야 할지 모르겠군.”
“넌 결투를말로 하나? 그러면 내가 패배를 인정하지. 계집을 말빨로 이길 자신은 없으니깐 말이야.”
“…자꾸 계집이라 하는데 그 더러운 입을 곧 꿰매어주마!”

셰릴이 발을 박차고 나에게 달려든다.
드디어 결투가 시작된 것이다.

속전속결.
스킬을 아끼면 안 된다.
그녀의 스피드라면 방에 들어가기 전에 내가 그녀의 레이피어에 꼬치가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스킬발동.
진실의방!

스팟

순간 눈앞에 펼쳐지는 팔각형의 링.
아래에는 종합격투기 대회에서 주로 썼던 부드러운 소재의 바닥이 깔려있다.
사방이 검은 철창으로 막혀 있어서 탈출은 불가능하고 들어온 사람의 압박감을 주는 풍경.

이곳이 어딘지  알고 있다.
내가 취미로 종합격투기를 했을 당시에 스파링을 하곤 했던 바로 그 링이다.
진실의 방이라는 것이 내가 가장 원하는 공간을 구현시킬  있는 능력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홈 어드벤티지라는 것이겠지.
나에게익숙한 풍경이니 같은 싸움을 해도 훨씬 유리하게 끌고 나가리라 생각한다.

당장만 해도 몸에 힘이 넘친다.
특히 다릿심이 엄청나서 조금만 뛰어도 엄청나게 빠르게 움직일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눈앞에서 빗살같이 쏘아지던 셰릴의 움직임이 훤히 다 보인다.
난 너무나도 여유롭게 허리만 살짝 비틀어서 그녀의 레이피어를 피했다.
진실의 방에 들어오기 전에는 그녀의 움직임도 따라잡기 힘들었을 것이 분명했다.

“커헉! 몸, 몸이 무거워. 나한테 뭔 짓을 한 거야!”

셰릴이 앙칼지게 소리쳤다.
매일을 수련하던 기사이니 자신의 몸의 변화는 누구보다  파악하겠지.
 곧바로 악마의 눈을 발동시켜서 스텟 부분만을 확인해보았다.

-상태창-
이름: 송길준
LEVEL: 1
힘: 56 민첩: 40 지력: 7 운: 4

-상태창-
이름: 셰릴 몬두르
LEVEL: 20
힘: 10 민첩: 35 지력: 3 운: 2

와… 생각은 했는데 실제로 스텟창 보니깐 미쳤네.
힘 스텟 차이는 내가 5배 이상.
심지어 그녀의 장점인 스피드도 내가 근소한 우위에 있다.

깨알 같지만 지력이나 운도 내가 더 우위에 있는 건 무시하지 못할 요소겠지.
셰릴 표정 봐라. 저거.
당황해서 허우적대고 있다.

평상시에는 1의 힘만 줘도 10의 속력으로 나갔을 것이다.
지금은 2배로 힘을 줘도 그 속력이 나오지 않으니 당황스럽겠지.

민첩이 속력을 결정하는 주요한 요소인 건 맞지만 절대 요소는 아니다.
똑같은 민첩스텟 보유자라면힘스텟이 더 높은 쪽이 더 빠른 것은 당연지사.
다리도 힘이 있어야 빨리 움직일  있으니 힘스텟도어느 정도 갖춰줘야 빨라진다는 의미이다.

그런 의미에서 힘과 민첩이 둘 다 절반으로 깎여버렸으니, 예전과 비교하면 느린 거북이나 마찬가지다.

수습기사라 실전경험조차 없어서 돌발상황에 대처조차 못 한다.
만약에 그녀가 진실의 방에 떨어지자마자 몸 상태를 체크하고 침착하게 도망쳤다고 치자.

그랬다면 민첩스텟은 그리 차이가 나지 않으니 잡는데 꽤나 성가셨을 것이다.
그러다가 운이 나빠 10분이 지나면 승자와 패자는 오히려 뒤바뀌겠지.

지금도 시간이 없다.
벌써 1분이 지난 것이다.

그리고 송길준은 토끼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하는 사자와도 같은 사내다.
머릿속이 하얘진 그녀의 뒤를 잡는건 무척이나 쉬운 일이었다.



칼을 들고 있는 오른쪽 손목이 내게 잡혔다.
게임오버였다.

 



사상 최악의 주인공〈 17화 〉게임오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