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화 〉내 역린이 되어라
“모두 스탑!”
내 말에 방금이라도 여인들을 도륙 낼 것 같은 오크들이 일제히 멈춘다.
“헬로우?”
“주, 주인님?”
“이게 무슨 일이래?”
다들 혼비백산해서 도망치려다가 오크들이 공격을 멈추자 어안이 벙벙한 모양이다.
“모두들 인사해. 오늘 우리의 잠자리를 책임져줄 고마운 분들이시다.”
“이…오크들이요?”
스르릉
다가오는 오크들에게 레이피어를 겨누며 죽일 듯이 노려보는 셰릴.
너 아직도 긴장 안 풀고 있구나?
좋은 자세야.
“자세 풀어도 돼. 얘들은 내 말 듣는 인형 같은 놈들이니까.”
“주인님, 몬스터라는 것들은 언제 뒤돌면 돌변할지 모르는 놈들이에요.”
“내가 한 입으로 두말 하는 거 봤어? 내게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잖아?”
맞다.
셰릴은 나와의 일대일 대결에서 진실의 방을 경험한 몇 안 되는 인재 중 하나.
레벨 1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빠르고 강한 힘도 경험한 년이다.
나에게 뭔가 특수한 능력이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겠지.
“도대체 주인님의 정체는…”
“쉿, 거기까지. 젠틀맨의 비밀을 알려는 건 매너없는 짓이지.”
뭔가 레이디와 젠틀맨의 위치가 바뀐 것 같지만 그러려니 하자.
뚝딱뚝딱
잠시 후.
여자들이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오크를 보긴 했지만 어느 정도 안정되었다.
이 든든한 몬스터들은 내 명령으로 주변의 나무를 베어와서 임시 거처를 만드는 중이다.
다른 5명의 오크에게는 사냥을 지시했다.
화르르륵
뚝 뚝
“와, 맛있겠다, 츄릅.”
“엄마, 나 이거 먹어도 돼요?
매일 크래스 장원에서 옥수수나 풀죽만 먹던 아이들.
이들은 오랜만에 먹는 육고기에 눈이돌아간 듯하다.
그건 그렇고.
우리 면담할 사람이 한 명 있는데?
“크흠흠. 모두 모여봐.”
어느 정도 식사를 하고 주거지도 마련되었다.
가운데에는 오크들이 높게 쌓은 장작에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고 주변에는 오크 10여 마리가 상시 순찰을 돌고 있다.
이러니까 무슨 캠프파이어 온 것 같네.
여인들 표정을 살펴보니 불안했던 기색은 가시고 다들 만족하는 눈빛으로 날 본다.
“그래서, 오늘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말이야. 그 전에 내가 오크들 데리고 장난쳤다가 믿기지 않는 말을 들었거든?”
그러면서 1호 엘리샤를 힐끗 본다.
큭큭큭.
왜 안색이 하얘지니?
나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뭐, 할 말은 없고?”
“들으셨나요?”
“어땠을 것 같아?”
야, 너도 참 대단하다.
나한테 오줌 먹고 육변기, 육식탁, 육침대 다하고서도 아직 욕을 할 깡이 남아있었구나.
털썩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단가?”
스윽 일어난다.
얘를 어째야 할까?
성적 고문?
너무 진부하다.
얘는 이미 그런 거 충분히 당했어.
가족도 다 버리고 이미 내 소유가 된 육변기.
뭘 더 뺏어갈 것도 없다.
그때였다.
“아주머니를 놔줘요!”
내 앞에서 당돌하게 나서서 두 손을 벌리고 엘리샤를 변호하는 소녀.
얜 대체 뭐지?
그녀를 보며 엘리샤의 안색이 흙빛이 된다.
“에밀리. 그러지 말렴. 아줌마가 잘못한 거 맞단다.”
“그렇다 할지라도 너무 가혹해요. 이전부터 계속 마음에 들지 않았어. 영주고 귀족이면 다예요?”
탁 타닥 탁
모닥불이 불똥을 튀기면서 죽음 같은 침묵이 돈다.
제법 재미있는 녀석이네?
“이름이 뭐라고?”
“에밀리입니다.”
“네가 걔구나? 유일하게 15살이라는 녀석.”
그렇다.
다른 아이들은 그저 엄마가 가니까 따라왔지만, 요 녀석은 그래도 나이도 좀 있고 해서 마을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건지 대충은 알고 있는 듯했다.
“너도 알만큼은 알만한 나이래서 알겠지만, 엘리샤 아주머니는 나에게 큰 잘못을 했단다. 벌을 받아야 해.”
“싫어요. 당신이 우리 마을에 와서부터 모든 게 이상해졌어. 아주머니들이랑 언니들 때리고 이상한 짓 하는 거 그만둬요!”
오호라.
눈에 독기 봐라.
질풍노도의 시기라 이건가?
옆을 보니까 육변기들이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어디 한번 악마의 눈이나 발동해보자.
스팟
-상태창-
이름: 에밀리
칭호: 천무지체
직업: 농노
LEVEL: 1
힘: 10 민첩: 10 지력: 5 운: 8
보너스 스탯: 0
카르마 수치: 0
스킬: 백화일검
상태: 적개심, 증오
응?
천무지체?
이거 무협지의 그거 아니냐?
무공의 천재들이 주로 가지고 있는 체질.
1레벨 선천 스탯 10/10으로 풀스텟이네?
스킬도 뭔진 모르겠지만 까리해보인다.
이 녀석.
천재였구나.
원석 발견해버렸다.
“그래서 어쩔건데요. 계속 언니들 괴롭힐 거예요?”
“응, 괴롭힐 거야.”
그 말에 에밀리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정말로 날 죽이고 싶어서 안달이 난 모양새.
하긴 얘는 자기네 아빠나 삼촌들이 무슨 짓을 하려고 했는지는 모르고 내가 그저 엄마와 아빠를 따로 떨어트려 놓은 나쁜 놈으로만 보일 거다.
“날 죽이고 싶어?”
“…네.”
“에밀리!”
“그런 소리 하면 안 돼.”
“죄송합니다,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확실히 어려서 그런지 감정을 숨기는데 서툴긴 하네.
마을 농노 여인들이 기겁하면서 에밀리 대신 사과를 한다.
그보다도 난 더 좋은 생각이 떠올랐거든?
“나랑 내기 하나할래?”
“안돼요! 제발 에밀리만은 건들지 말아 주세요!”
“제발 제가 잘못했어요. 제 몸뚱어리는 마음대로 다루셔도 되니깐 제발 에밀리만은 내버려둬 주세요.”
마을 여인들이 하나같이 비명을 지르며 나한테 엎드린다.
큭큭.
하도 내기나 계약에 당하다 보니 너희도 내성이 생겼구나?
걱정하지 않아도 돼.
어차피 어린 소녀 건드는 취향은 없으니 말이야.
“무슨 내기 말하는 거죠? 한번 들어나 보져.”
“에밀리야, 지금이라도 영주님께 사과드리렴. 네가 감당할 수 있는 분이 아니셔.”
“내기 내용이나 빨리 말해요.”
큭큭.
제법이야.
그래 천무지체라면 그 정도 깡다구는 있어야지.
“너와 이곳 마을 아이 10명. 모두 셰릴에게 무술을 배워라.”
“네에?”
옆에서 셰릴이 멍청한 물음을 내뱉는다.
“이건 비단 에밀리만 해당하는 게 아니야. 메이 포함 너희 육변기 20명. 전원 셰릴에게 검술 지도를 받아.”
정했다.
이른바 대기만성 프로젝트.
오늘 오크들을 거느리고 나서 불현듯 머리에 떠오른 작전이다.
“그리고 셰릴. 너도 여기서 광렙한다.”
“광렙이라하면…”
“여기 산속의 몬스터를 대령하겠다. 막타만 쳐. 막타만 쳐서 레벨 올려.”
큭큭큭.
몬스터로드라는 스킬이 단순히 몬스터만 거느릴 수 있다고 좋은 게 아니거든.
세뇌시킨 다음에 잡는 식으로 무한 노가다하면 그냥 폭렙이잖아.
물론 나는 아직 레벨 1을 유지하고 싶기에 쓰지 못하는 방법이지만 다른 녀석들은 레벨 증가가 시급하기에 아주 괜찮은 방법이라 생각된다.
“내가 볼 때, 셰릴. 너는 검술그 자체로는 왕국에서 손꼽히는 기사다.”
이건 맞다.
그녀와 직접 일대일을 해본 내가 더 잘 안다.
어렸을 때부터 기사단장에게 정통 무술을 배워서 그런지 기술 하나만큼은 이미 왕국 기사단 교관을 맡아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
그러니 남자들 틈바구니에서 저 여리여리한 몸으로 살아남았겠지.
레벨도 아직 낮고 실전 경험 없고 몸이 덜 여물어서 스텟이 딸리는 거지 누굴 가르치기는 충분하다.
“육변기들 20명과 아이들 10명. 부르기 쉽게 십동(十童)이라 칭하지. 이 녀석들에게 기술을 가르쳐라.”
“그렇다면 주인님의 말은 지금 저들에게 검술을 가르치고 몬스터를 다루는 요상한 요술로저희가 굳이 전투 없이 몬스터를 잡아서 레벨업을 하란 말씀이신가요?”
“바로 그거야.”
내 말을 들은 셰릴의 얼굴이 흥분으로 빛났다.
얘도 지금 견적이 난 거겠지.
“주인님, 만약에 주인님의 생각대로만 된다면 저희는 무한정 강해지는 게 가능해요!”
“그래, 나도 지금 한 번 해보려고.”
“잠시만요! 그거하고 지금 이 내기가 무슨 상관이에요!”
아, 맞다.
에밀리 요꼬맹이가 있었지.
그럼 이 녀석에게도 지령을 하달해줘야겠지.
“5년. 5년이다.”
“…뭐가요?”
“성인이 되기 전 5년 동안 나를 위해서 훈련하고 강해져라. 나를 위해서 일해. 그렇다면 육변기들이 원하지 않는…”
“육변기라고 하지 말아요! 왜 그런 저질스러운 말을 쓰는 거예요!”
오우.
눈물까지 그렁그렁하네.
하긴 소녀에게 이런 말은 자극이 좀 심하긴 하지.
얘 앞에선 쓰지 말아야겠다.
“…그래, 네 언니와 아주머니들을 억지로 건들지 않겠다.”
이건 나로서도 꽤나 큰 선택이다.
원래 계약사항은 이렇다.
4. 육변기들은 언제 어디서든지 주인 데이몬의 정액을 받아주어야 한다.
그것이 설사 죽음 직전에 이르더라도 변함은 없다.
그니까 육변기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내 잠자리 상대가 되어주어야 했거든.
근데 너 하나 때문에 이 큰 걸 포기한다.
천무지체라는 고급 인재는 그럴 가치가 있거든.
큭큭.
물론 육변기들이 자발적으로 원한다면 다른 얘기가 되겠지만 말이야.
“어때? 육…아니 마을 여인들아. 이 정도면 나름 에밀리에게 요구할 만 하지 않나?”
여인들은 내가 에밀리에게 파렴치한 짓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자 일단은 안심했지만, 여전히 고개를 갸웃한다.
“하지만 나의 주인님. 저희는 농사만 짓고 평생 무술이라고는 해본 적 없는 여인들입니다. 이런 저희가 이 나이에 병장기를 잡는다고 뭐가 될까요?”
흐음.
이분들.
만학도가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나 보네.
그리고 예전 세계의 지구였다면 이 여자 말이 맞다.
일단 나이가 들면 기본적으로 육체가 쇠퇴하니깐 말이야.
하지만 여긴 그 노화를 어느 정도 커버해 줄 수 있는 스테이터스라는 게 있거든.
네가 깡스텟만 올리면 아무리 검에 소질이 없어도 그냥 강해질 수 있다는 거야.
게다가선생은 왕국에 손꼽히는 여기사 셰릴 몬두르.
여기만큼 너희가 더 강해질 수 있는 환경은 없다.
“그냥 농노나 내 육변기로 인생 하직하고 싶나? 아니면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검과 칼을 잘 쓰는 저기 셰릴 같은 여인이 되고 싶나. 그건 너희에게 달린 거야.”
“저, 저희가 저 고귀하신 여기사분처럼 될 수 있다고요?”
“그래, 너흴 깔보거나 무시했던 평민, 귀족 남성들. 모두 무릎 꿇릴 수 있다.”
그래.
내 육변기들인데 적어도 어디 가서 맞고 오면 안 될 거 아냐?
나한테나 육변기지 다른 놈들한테는 마왕처럼 느껴지게 광렙 노가다 시켜야지.
대충 분위기를 보니까 다른 여인들도 기대와 흥분으로 나와 셰릴을 번갈아 보는 게 느껴진다.
하긴.
맨날 농사만 짓다가 갑자기 전사가 되라는데 본인들도 신기하겠지.
“그래서, 에밀리? 어떻게 생각하지? 난 너에게서 재능을 봤어. 장담하지. 넌 내 밑에서 있으면 세계에서 두 번째로 강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다.”
“제, 제가요?”
그녀가 반신반의하자 내가 어깨를 단단히 잡고 확신을 준다.
“그래. 넌 내 약점이자 아킬레스건. 난 계약에 의해서 널 건들지 못하지.
강해져라. 날 죽일 수 있을 만큼 강해져. 아주머니들과 언니들을 지키고 싶어? 그러면 5년간 노력해라.”
큭큭.
나도 내가 왜 이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예전 지구에서의 송길준이었다면 날 위협할만한 이런새싹은 일찌감치 제거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이 소녀를 키워볼 생각을 한다.
얘가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
어차피 악마의 계약 때문에 난 이 녀석에게 해를 입힐 수 없다.
8. 데이몬과 그의 수행원들은 여인들이 육변기가 되는 대가로 그들의 가족을 해할 수 없게 된다.
이를 어길 시, 역시나 영혼의 영원한 고통이 수반된다.
바로 이 조항 때문에 말이지.
근데도 왠지 요 맹랑한 녀석을 키워보고 싶다.
나도 송길준에서 데이몬이 되면서 뭔가가 달라진 것 같다.
에밀리, 내 역린(逆鱗)이 되어라.
네가 어디까지 크는지 한번 보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