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궁금하니깐 들어는 준다
여인들의 눈빛을 받으며 난 21호의 젖가슴을 떡 주무르듯 주무른다.
“그러고 보니 너희 귀녀대원들은 다 나이가 어리네? 30대도 없는 것 같아.”
아닌 게 아니라 육림대원 때처럼 40대는 고사하고 30대 초반도 안 보인다.
“고블린들이…그 빌어먹을 것들이 나이가 많으면 약한 새끼를 낳는다고 언니랑 엄마들을 모두 죽이고 우리만 끌고 왔어요. 흐흑.”
“흐흐흑.”
“흐앙!”
21호의 대답에 다들 가족들의 최후가 떠올랐는지 눈물을 흘리는 여인들.
“그래, 울어라.”
오히려 풀어준다.
어차피 나에 대한 귀녀대원들의 공포심은 최대치다.
내가 얼마나 무서운 놈으로 돌변할 수 있는지는 여자들이 잘 알고 있다.
그러니까 지금은 조금 잘해줘도 된다.
“엉엉엉…”
“흐아아앙…”
“엄마…보고 싶어…엄마아…”
“나도 이렇게 되고 싶지 않았어…흐아앙…”
“흐흐흑…”
정신 나갈 것 같은 울음바다가 계속된다.
자기들끼리 껴안고 침대보가 축축해지도록 질질 짠다.
아마 고블린 부락에서 한 고생과 나한테 구출되고 난 후 베이스캠프에서 겪은 일까지 모두 한꺼번에 묵혀놨던 부정적인 감정을 이번 기회에 털어내는 거겠지.
“…이제 속 좀 시원하냐?”
거의 1시간을 울어댔다.
애들이 진이 다 빠졌네.
하긴 나 같아도 그렇게 울면 진이 빠질 것 같다야.
벌써 딸꾹 한 눈으로 날 쳐다보는 여인들.
완전 애기들이네, 이년들.
하긴 보니까 제일 나이 많은 애도 20대 중반이니 아기가 맞나?
“일단 자라.”
또 재웠다.
쿨쿨 아주 잘 잔다.
귀녀대 애들이 자는 동안 육림대 애들이 음식을 갖다 놔주었다.
“킁킁! 킁!”
“우웅, 맛있는 냄새.”
울고 자고 음식 냄새가 나오니까 또 일어나려고 한다.
너희가 무슨 암퇘지냐?
신체반응이 아주 정직하네.
“일어나서 밥 먹어.”
이게 무슨 노예냐?
무슨 상전 20명 돌보는 것 같네.
일어나자마자 밥까지 처묵처묵 잘 먹고 물항아리로 샤워까지 말끔하게 끝낸 여인들은 젖은 머리로 다시 침대위에 걸터앉았다.
잘 먹고 잘 자고 감정도 어느 정도 털어낸 귀녀대는 어제와는 확연히 다르게 안정된 눈빛으로 날 본다.
“야, 동물들아. 잘 먹고 잘 싸고 잘 씻었냐?”
“…네, 마스터.”
그래도 호칭은 빼먹지 않고 부르네.
원래는 바로 보지 개통부터 끝내주려고 했는데 마음이 조금 바뀌었다.
“너희 얘기 좀 해봐.”
“…무슨 얘기요?”
“어차피 우리는 최소 한 달은 이 비좁은 곳에서 벌거벗은 채로 같이 먹고 자고 싸고 씻고를 같이 할 거야. 그러니 서로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겠어?”
내 말에 아무도 쉽사리입을 열지않는다.
뭐, 그러면 나부터 먼저 말하면 되지.
“내 이름도 제대로 말 해주지 않았군. 나는 데이몬 베르너. 윌렛 왕국 베르너 백작님이 내 아버지다.”
“귀, 귀족이셨어요?”
“그런데 어떻게 그런 짓을…”
다들 내 말에 경악하는 눈빛이다.
아니 왜?
내가 어때서?
“뭐가 그렇게 놀랍지?”
“아무리 봐도 기초교육을 받은 귀족다운 교양이 보이지 않길래…흡!”
여자 한 명이 자신도 모르게 속마음을 꺼냈다가 실수했음을 깨닫고 입을 자신의 두 손으로 틀어막았다.
“맞아, 나는 거기서 망나니로 유명한 막내아들이다. 내 소문 들어봤나?”
도리도리
확실히 갈리아 제국 년들이라 그런지 변방 왕국의 백작가 막내아들이 어떤지까지는 잘 모르는 모양이다.
“망나니로 유명하다는 걸 본인 입으로 말한다는 건…당신은 스스로의 평판에 대해 잘 알고 있음에도 이를 묵과하고 있었다는 얘기군요.”
역시 똑똑한 년들이라 핵심을 잘 짚어낸다.
“맞아, 내 위에는 형이 둘 있다. 나와는 달리 외가들이 다들 빵빵하시지. 우리 엄마는 나 어렸을 때 의문의 행방불명을 당했고 말이야.”
그 행방불명도 내 계모들의 소행일지도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나중에 내 친엄마에 대해서 메이에게 잠깐 물어본 적이 있었다.
‘서방님의 어머니요? 저도 그때는 성에 없을 때라 잘은 모르긴 하는데 들리는 소문으로는 대낮에 갑자기 방 안에서 사라지셨대요.’
젊은 귀족 여자가 갑자기 대낮에 방에서 사라졌단다.
이게 말이 되냐?
이건 백 퍼센트 내부인의 소행이다.
납치 후 살해 같은 거 말이야.
그리고 내 계모들은 크래스 장원에서 날 독살시키려 한 걸 봐서는 충분히 그런 짓을 벌일 수 있는 위인들이다.
“내 개인적으로는 내 계모들의 소행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그쪽 집안도 평탄하진 않군요.”
“위에 형이 둘이나 있다면 사실상 가주직 승계는 물 건너갔겠어요.”
“형제끼리 사이가 좋지 않으니 유산 싸움도 심각하겠군요. 마스터는 그래서 이런 산속에 숨어지내는 건가요?”
내가 한번 내 정보를 풀어주니 다들 귀를 기울여 집중한다.
“그래, 나는 백작가 막내로 내 생을 끝낼 생각은 없어. 이미 내 어머니들에게 독살될 뻔하기도 했고 말이야.”
“!”
“…정말 잔혹하군요.”
“그래서 마스터 인성이 이렇게 뒤틀렸던 건가요…”
마지막 년 말이 좀 신경 쓰이긴하지만 놔두자.
그래, 원래 똑똑한 년들은 아무리 밟아놔도 제 말은 끝까지 하더라고.
저게 날 놀리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순수하게 저렇게 생각해서 하는 말임을 안다.
지금 분위기를 망치긴 좀 그러니깐 넌 나중에 보지 개통식때 보자꾸나.
“그래서 산속에 숨어서 내 전력을 키우고 있는 거다.”
“셰릴이라는 여기사의 레벨을 봤어요. 38레벨이시더군요. 그 정도면 왕국에서도 손꼽히는 전력일 텐데요.”
“에밀리라는 소녀 봤어? 그 여자애는 35야.”
“그 문신녀들도 25던데?”
자기들끼리 레벨에 대해서 수군수군한다.
그러더니 한 명이 대표로 나서서입을 열었다.
“혹시 마스터께서는 레벨을 올리는 특별한 방법이라도 있으신 건가요?”
“내가 몬스터를 조종할 수 있다는 건 잘 알겠지. 그렇다면 레벨 올리는 건 쉬운 일 아닐까?”
“!”
머리 회전 빠른 년들이라 그런지 내가 어떻게 레벨을 올릴 수 있었는지 바로 알아차렸다.
“이럴 수가! 그럼 마스터는 무한정 강해지는 게 가능하겠군요!”
“그런데 왜 마스터는 레벨이 1이죠?”
아, 일일이 대답해주기 귀찮다.
“그만 물어봐. 충분히 알려줄 만큼 알려줬으니깐 말이야. 이제 내 차례야. 너희는 왜 고블린의 습격을 받은 거지? 수십 년간 택배 회사 했는데 고블린 습격 하나 못 막아?”
난 이게 의문이었다.
리만 표국.
나중에 물어보니 셰릴도 들어봤다던 표국이다.
외국인도 알만한 표국이면 거의 거대 상단, 즉 대기업인데 어떻게 고블린 습격 한 번에 이렇게 허무하게 망해버린 거지?
“너희는 수십 년 간 상행을다녔으면 전용 길도 있지 않나?”
“맞아요, 저희가 상행하러 다니는 길들은 모두 검증된 안전한 길이에요. 그리고 설사 고블린이 아니라 오크가 습격했다 하더라도 저희 상단의 병력들은 막을만한 전력이었죠.”
“그런데 왜 고블린 따위에게 망한 거야?”
내 말에 여자들이 서로의 눈치를 보며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한다.
하, 나 참.
이 지경이 되고서도 주인이자 마스터인 나에게 뭔가를 숨기려고 한다고?
내 눈빛이 점점 스산하게 변하는 걸 느낀 걸까?
눈치 빠른 여자가 황급히 대답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마법사들의 습격이 있었어요. 우리 측 고수들은 그 마법에저항도 못 하고 시작부터 제압당했죠.”
이러면 이해가 된다.
매복해 있던 마법사.
불시에 날라오는 대형 마법.
마법의 단점은 기나긴 캐스팅 시간.
그러나 미리 지점을 잡고 대기하고 있었으면 시간은 충분했을 터.
순식간에 날아오는 대형 마법.
고수들은 피할 수 있었겠지만 그랬다간 뒤에 가족들이 다칠 수 있으니 할 수 없이 부상이나 사망을 감수하고 막았겠지.
고수들은 제압당하고 남은 패잔병들을 400명가량의 고블린 전사들이 일시에 들이닥쳐 쓸어버리는 모습.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내 머릿속에 그려지는 듯하다.
“고블린들 중에 샤먼(주술사)도 있나?”
“있다고는 들었지만, 저희한테 쏟아지는 마법 수준이 단순히 몬스터 샤먼이 부릴만한 마법이 아니었어요.”
맞다.
생각해보니 내가 그 고블린 부족들을 쓸어버렸지?
샤먼이 있었으면 내 녹귀대와 중갑대가 이들 부락을 습격했을 때 진작 마법을 쓰며 정체를 드러냈어야 한다.
하지만 마법을 쓰는 고블린은 단 한 마리도 없었어.
나는 이 얘기를 귀녀대 애들에게 해주었다.
“그러니까 아마 마법사는 고블린과 상관없는 다른 인간들의 세력이 너희 상단을 노렸을 확률이 높아.”
“맞아요, 저희는 아마도 피에른 대공 쪽 마법사 아닐까 생각 중이에요.”
“피에른 대공? 그게 누구지?”
“피에른 대공을 모르신다고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묻네.
야, 이 년들아.
내가 외국 대공 이름도 일일이 알아야 되냐?
“…마스터는 무슨 딴 세계에서 있다가 오신 분 같군요. 판타지아 대륙의 최고 권력자를 모르시다니요.”
최고 권력자?
하기야 갈리아는 [제국]이니깐 왕국인 윌렛과는 비교가 안 되겠지.
거기에 대공이면 거의 황제급 아니야?
“그는 제국의 대공일 뿐만 아니라 황제 폐하의 숙부, 그리고 7급 현자로써 마탑의 탑주이기까지 해요. 권력과 명예, 능력까지 모두 갖춘 제국 최고의 남자죠.”
그렇구만.
그렇게 잘난 놈을 내가 왜 모르느냐 이거지?
시발, 모를 수도 있지.
대한민국에서 하루하루 살기 힘들었던 나도 미국 대통령 이름을 성인 되어서야 알았다.
“그래서 그 대공인지 뭐시긴지가 왜 너희 리만 표국을 조졌는데?”
“…그건 아마 저희가 유리아 황비님 쪽에 줄을 댄 상단이기 때문일 거예요.”
유리아 황비?
이건 또 누구야.
아, 좆나 지루하네.
왜 내 나라 이야기도 아닌데 이렇게 들어줘야 되냐?
근데 지구에서도 생각해보면 미국 대통령 선거도 대한민국 포함 전세계가 지켜보긴 했지.
이것도 그런 느낌인가?
“유리아 황비님이 누구신지도 모르는 표정이시군요.”
“정말 마스터는 어떤 의미에서는 대단하네요.”
“아무튼, 설명드릴게요. 황비께서는 현재 9살이신 황제 폐하의 공식적인 아내이자 폐하의 친누나이십니다. 그러니 몇 년 전까지는 공주님이셨죠.”
뭐?
친누나이자 황비?
그러면 그 9살짜리 꼬꼬마 왕은 지 친누나랑 결혼한 거야?
예전에 고대 이집트에선 왕족의 혈통을 보존하기 위해서 근친이 성행했다고 하는데 이것도 그런 개념인가?
“당시 공주님께서는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피에른 대공의 힘이 너무 커지고 있어서 이대로 있다간 나라 전체가 대공에게 넘어갈 예정이었죠.”
“맞아요, 이러다 공주님까지 외국으로 시집을 가게 되면 제국은 끝장이라 생각하고 본인의 인생을 포기하고 친동생과 결혼식을 올린 거예요.”
그렇구나.
여기도 근친이 자연스러운 곳은 아니었어.
친동생이랑 섹스하는 괴랄한 짓은 할 수 없으니 사실상 동생은 명목상의 남편이고 평생 독수공방하겠다는 말이었군.
“그런데 애초에 유리아 황비와 피에른 대공은 왜 싸우는 건데? 권력 때문이야?”
“각자 원하는 정책의 색깔이 너무나 달라요.”
여자들이 미주알고주알 떠드는 정보는 이랬다.
현재 갈리아 제국은 재정적으로 상당히 곤란한 상태라고 한다.
그 이유로는 황실 자체의 사치와 부정부패도 있겠지만, 가장 주요한 요인은 홀리엔 법국에 매년 바치는 헌금량이 가혹할 정도로 높기 때문.
유리아 황비는 이 폐단을 개선하고자 홀리엔 법국에 매년 상납하는 헌금량에 대한 개정 정책을 발의했다.
하지만 이는 큰 반대에 부딪혔다고 한다.
왜냐하면, 피에른 대공의 아내가 홀리엔 법국 출신의 성녀이기 때문.
“뭐? 성녀가 결혼을 해? 이 세계는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마스터, 제 설명 좀 계속 들어보실래요?”
아놔, 이 년들이 미쳤나?
말 끊었다고 지랄하네.
암튼 궁금하니까 계속 들어는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