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화 〉그동안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스팟
내 신형이 사라진다.
순식간에 늘어지는 내 잔상.
어차피 이건 금방 끝날 게임이야.
올리비아, 네 청혼을 받아들이겠다.
“…너프 마법진 가동!”
우우우웅
갑자기 동굴 바닥에 눈여겨보지 않았던 낯선 문양들에서 빛이 난다.
이게 마법사들이 말하는 마법진인 건가?
갑작스럽게 내 눈에 나타나는 불타는 글자들.
[모든 스텟이 20% 떨어졌습니다.]
두둥
“커헉!”
몸이 느려졌다.
마법사이니 무슨 수를숨겨두리라고는 생각했다.
당황하지 않고 재빠르게 내 스텟을 점검한다.
힘: 80 민첩: 80 지력: 73 행운: 72
20% 라니깐 많이 깎이긴 했다.
에밀리가 이거에 당했겠구나.
나야 무지막지한 스테이터스가 있으니 이 정도 깎이고도 여전히 준수하게 스텟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레벨 37인 에밀리는 순간 육체 능력이 급감해서 마녀들에게 저항도 제대로 못 했을 것이다.
“그래 봐야 새 발의 피야! 끝이다, 올리비아!”
올리비아의 지척까지 접근했다.
바로 뒷목을 쳐서 기절시킬 생각.
이상하게도 그녀는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왔음에도 당황하는 기색이 없다.
뭐지?
마법사들은 준비하는 자라고 들었다.
또 뭔가 수를 준비한 건가?
가만히 있던 올리비아의 입술이 달짝이며 마법이 시전된다.
“블링크.”
스팟
앗.
단거리 순간이동 마법?
이런 개사기 같은 년.
이러면 내가 스피드가 빠른 게 의미가 없잖아!
“치사한 년.”
“전투 중에 적을 욕하는 건 칭찬으로 받아들이라고 배웠습니다.”
이러면 상황이 애매해졌다.
압도적인 민첩스텟으로 반응도 못 하게 찍어누르려고 했는데 그게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물론 블링크는 마나를 써야 하는 마법이니 마력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방법도 있지만, 지력 스텟이 300인 저 마녀가 마나통이 얼마나 클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방법은 어떨까?”
스텟으로 찍어누르는 것이 안 된다면 후보자용 스킬을 쓰면 되지.
그리고 나에게는 일대일 한정 개사기 스킬이 있거든?
내 방에 들어오지 않을래?
“진실의 방 발동!”
“데빌 실드!”
터엉
막혔다.
공중에서 내가 쏘아낸 진실의 방이 막힌 것이다.
“악마력을 이용한 스킬을 쓰시는군요. 뭔지는 모르지만, 위험해 보이니 막겠습니다.”
성가신 년.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된다.
진짜 이거 잘못 걸린 것 같은데?
머릿속에서 부정적인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그럼 제 차례인가요? 스템 바인드!”
파락 파라락
땅에서 갑자기 식물 줄기들이 튀어나와 나를 잡으려고 한다.
한눈에 봐도 오크 팔뚝만 한 강낭콩 줄기들.
이전세계 지구에서 얼핏 보았던 동화책에 나오는 잭과 콩나물의 그 줄기 같다.
분명한 건 저거에 묶이는 순간 결투고 뭐고 끝장난다는 거다.
“흐아압!”
“아무리 발버둥 치셔도 소용없습니다! 당신이 오기 전에 이미 동굴 바닥에 씨앗을 잔뜩 심어놓았거든요. 순순히 본인의 운명을 받아들이시죠!”
이런.
이거 완전히 지뢰밭에 마음 놓고 들어온 거였구나.
앞으로 마법사와 싸울 때는 기습 위주로 풀어가야겠다.
준비된 마법사와 싸우는 게 이렇게 무모한 짓인지 몰랐네.
팍 팍 퍼퍽 퍽
일단 땅에서 올라오는 식물 줄기 둘을 주먹으로 쳐냈다.
스텟 100에 이르는 내 무지막지한 주먹에 맞은 식물들은 가루가 되어 떨어진다.
문제는 이 식물 줄기가 한두 개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대로는 내 체력이 못 버틴다.
마법사와 싸우면서 내 체력이 먼저 소진되는 상황은 예상외였는데 말이지.
“제법 잘 막아내시는군요. 그러면 이건 어떨까요? 데빌 미사일.”
매직 미사일이 광속성 마법이라면 데빌 미사일은아주 기초적인 암 속성 마법.
그렇지 않아도 올라오는 식물 줄기 쳐내느라 바쁜데 내 급소를 노리고 들어오는 흑색의 미사일이 아주 성가시다.
“너 전사랑 한두 번 싸워본 게 아니군.”
“호호호, 이래 봬도 마녀전쟁 당시에 선봉장으로 싸웠던 저입니다. 등 뒤에서 기습하는 기사나 전사들을 얼마나 많이 만나봤겠습니까? 얌전히 제 강아지가 될 운명을 받아들이시지요.”
올리비아는 오랜만의 결투가 재밌는지 얼굴까지 상기되어서 진한 미소를 짓고 있다.
반면에 나는 온몸이 땀에 젖어서 힘겹게 수비만 하는 상황.
이래서는 안 된다.
이대로 가다간 필패(必敗)
무언가 상황의 변수를 만들어내야만 한다.
“트아아압!”
수비를 포기했다.
움직임에 직접적으로 방해가 될만한 식물 줄기만 쳐내면서 달려간다.
퍽 퍽 퍽
“크허헉!”
입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데빌 미사일이 내 온몸을 쳐대면서 몸이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각혈을 한 것이다.
그런데 의외의 사실을 발견한다.
“…맞을 만한데?”
식물 줄기는 까다롭다.
움직임이 제한당하면 그다음에는 집중 포격을 당하니 당연히 막아야 한다.
반면에 데빌 미사일은 죽도록 아프기는 한데 맞는다고 기절을 하거나 몸이 불구가 될 것 같지는 않다.
“당신 도대체 지력스텟이 몇이지요? 실드도 없이 미사일을 깡으로 맞는데도 멀쩡한 게 말이 안 되는군요.”
아하.
난 여태까지 지력스텟이 머리만 똑똑해지고 마법과 마나통만 늘려주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마법 방어력도 같이 올려주나 보다.
물론 힘과 민첩으로 인한 피지컬이 어느 정도 받쳐준 상태에서 마법방어력이 높아야지 어느 정도 마법 공격을 생으로 맞아도 견딜 만할 것이다.
예를 들어 올리비아는 지력스텟이 300이니 나보다 마법방어력이 압도적으로높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고 그녀가 나처럼 똑같이 마법 미사일을 정통으로 맞아도 멀쩡하냐?
그건 아니다.
마법방어력이 극단적으로 높다 할지라도 고정 데미지, 즉 최소한으로 들어오는 피해가 있기에 체력이 낮은 올리비아는 데빌 미사일 한 방에 나가떨어질 것이다.
그러니 저 여자는 미리 실드 마법이나 기타 회피마법으로 알아서 맞지 않는 방법을 찾겠지.
어찌 되었든 어느 항목이든 스텟을 찍어 놓으니까 다 효력이 있네.
솔직히 지력에 100 투자한 것은 낭비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진짜 균형캐 만세다.
“이대로 끝내주마. 올리비아! 거기 딱 기다려라.”
엄포를 놓고 강낭콩 줄기는 치우고 데빌 미사일은 몸으로 맞으며 무지막지하게 접근했다.
그녀와의 거리는 이제 불과 3m.
손만 뻗으면 닿는 거리다.
텁
으응?
밑에를 보니 내 발목이 묶여있다.
뭐지?
강낭콩 줄기는 모두 쳐냈는데?
자세히 보니 강낭콩 줄기가 아니라 나무뿌리다.
“애초에 마법사는 승산이 없으면 싸우지 않는 존재죠. 제가 강낭콩 줄기 하나만 믿고 여기 가만히 서 있었을까요?”
그렇네.
올리비아의 강낭콩 줄기는 내 시선을 끌기 위한 미끼였을 뿐.
진짜는 나무뿌리였고 본인 근처에 숨기고 있다가 내가 무리해서 들어오자 단번에 속박을 걸어버린 것이다.
텁텁
발목은 시작이었고 어느새 손과 상하체 전부가 뿌리에 구속되었다.
말 그대로 옴짝달싹 못 하는 상황.
외통수에 걸려버린 것이다.
“앞으로는 목(木)속성 마법사나 마녀를 만나신다면 어디에서든지 자신을 속박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을 수 있음을 상기하시길. 뭐, 제 애완견이 되면 더는 알 필요도 없겠지만요.”
승리의 미소를 씩 짓는 올리비아.
이제 보니 입술도 초록색 립스틱으로 얇게 칠했네.
이 여자 왜 이렇게초록색을 좋아하는 거야?
저러니까 무슨 드루이드 컨셉 같네.
올리비아는 내가 나무뿌리로 완전히 속박당했는데도 딴생각에 잠겨 묘하게 여유롭자 신경이 거슬린 모양이다.
“왜 그리 여유로운 거죠? 무슨 숨겨놓은 수라도 있는 건가요?”
“아니, 그냥 네가 예뻐서.”
“…그건 컨셉인가요? 지나가는 여자한테 다 그렇게 말해요?”
“아니? 내 여자에게만 이렇게 말해주는데?”
내 말에 올리비아가 잠깐 멈짓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 말은이 세상에서 저한테만 예쁘다는 말을 한다는 것이군요.”
으응?
왜 말이 그렇게 되지?
올리비아에게 준엄한 사실을 알려준다.
“왜 그렇게생각하는지 모르겠는데 나에게는 30명의 여자가 있어.부인도 2명이지. 너는 내 세 번째 부인이 될 예정이야.”
“…난봉꾼 새끼. 순간 혹할 뻔했네. 그냥 죽어라! 이 쓰레기 새끼야!”
오우.
역효과였나 보네.
올리비아가 광분을 해버렸다.
손을 번쩍 들고 마법을 영창하는 그녀.
“다크스피어!”
스스스
그녀의 어깨 근처에서 족히 2m는 될만한 거대한 어두운 창이 보인다.
보니까 이건 데빌 미사일처럼 생으로 맞으면 큰일이 날 것 같은 사이즈다.
“4급 이상의 마녀나현자가 펼치는 스피어 계열 마법은 관통력과 파괴력이 높아서 당신의 그 무지막지한 마법방어력도 소용없을 겁니다.”
올리비아는 나를 아예 반 죽여놓기로 결심했나 보다.
이거 좀 곤란한데?
“큭,정말 꼼짝도 하지 않는군.”
“속박마법은 목속성 마법사의 기본소양이지요. 가시덩굴이 아닌 걸 감사하세요.”
어차피 창으로 꼬치구이 만들라고 하면서 뭔 개소리야?
결국, 내 복부에는 암흑창이 정확하게 꽂혀 들어갔다.
푸우욱
“으아아악!”
“아직 부족해! 너같이 여자 마음 갖고 노는 남자는 더 혼나야 해! 우드 애로우!”
푹 푹 푹
이제는 애로우 계열 마법으로 내 몸의 이곳저곳을 타격하며 고통을 주는 올리비아.
점점 정신이 혼미해진다.
이대로 나는 올리비아에게 패배하게 되는 건가?
“때가 되었군요. 충분히 고통을 주었다고 생각하니 이제 고독을 먹이겠습니다.”
그러면서 품속에서 징그러운 지네 한 마리를 꺼내서 다가온다.
“오, 오지 마라. 나 입 안 벌릴 거야.”
“벌리지 마세요. 제가벌려드릴게요.”
스스스슥
그녀가 손을 한번 휘젓자 나무줄기가 알아서 양쪽에서 내 입을 잡고 벌려버린다.
제기랄.
이런 수가 있을 줄은 몰랐어.
이러면 꼼짝없이 자고독을 먹어야 한다.
그리고 모고독을 가지고 있는 올리비아의 애완견이 되어버리겠지.
“아~해보세요. 아~”
“꺼…져…웁! 웁!”
자고독이 몸에 들어왔다.
끔찍한 무언가가 내 머릿속에 들어갔음이 분명히 느껴졌다.
뇌 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무언가.
“당신은 이제 완벽한 내 애완견이 되었군요. 후훗.”
“뭔 개소리야…아직 게임 안 끝났어.”
“과연 그럴까요?”
그러면서 올리비아는 품에서 모고독이 든 유리병을 꺼낸다.
그리고는 엄지손가락만 한 유리병을 가볍게 흔들기시작한다.
탁 탁 탁
“…으아아아아악! 아파! 제발 그만! 그만해! 크아아악!
아, 존나게 아프다.
이건 절대 저항할 수 없는 종류의 고통이다.
서유기에 나오는 제천대성 손오공의 머리를 옥죄는 긴고아가 이러할까?
머리가 반으로 쪼개지는 듯한 느낌이 방금 들었다.
“가볍게 병을 흔들어주기만 해도 안에 있는 모고독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죠. 영혼이 연결되어있는 자고독도 당연히 모고독의 스트레스에 영향을 받고요.”
한마디로 엄마 따라서 아들도 광분한다는 거잖아?
뭐 이런 벌레들이 다 있지?
보면 볼수록 거지 같은 녀석들이네.
그나저나 너무 아팠다.
이건 악마들이 상대를 복속시키기 위해서 하는 영혼의구속과는 조금 다른 느낌의 고통인 것 같다.
하지만 절대 저항할 수 없는 종류인 건 이거나 그거나 비슷하지.
“그 빌어먹을 모고독 병을 탈취하겠어!”
“어머? 그렇게 자기 생각을 다 드러내면 안 되죠.”
내가 모고독 병을 뺏어버리겠다는 말에 귀엽다는 듯이 다가와서 내 볼을 쓰다듬는 올리비아.
난 묶여있어서 그녀가 내 볼을 쓰다듬고 있는데도 아무런 짓도 할 수 없다.
그녀가 승리자의 미소를 지으며 내 귀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제가 뺏겨줄 리가 없잖아요. 후후훗.”
끝났다.
올리비아 승.
데이몬 패.
이제 데이몬은 올리비아에게 완벽히 조종당하는 인형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그동안 사상 최악의 주인공을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