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화 〉 너희 선에서 정리하렴
* * *
나와 원정대는 올리비아의 은신처 바깥으로 나왔고 마녀의 숲에 남아있기로 한 여인들과 아이들, 그리고 다른 몬스터들이 우르르 나와서 우리를 배웅했다.
“흑흑…주인님 꼭 무사히 돌아와 주세요.”
“멍멍, 우리도 과부 되기 싫다멍. 마왕님 아직 떠나지도 않았는데 그립다멍.”
보통의 인간 여자부터 귀가 축 늘어진 수인녀들까지 숲의 유일한 남자인 내가 떠나자 무척이나 슬퍼하는 기색이다.
“금방 돌아오마. 게다가 너희 족장 때문에 가는 거잖아.”
“맞다멍. 우리는 마왕님에게 감사한다멍.”
“족장 구하고 오면 우리가 돌아가면서 섹스해주겠다멍!”
부끄러운 기색으로 몸을 배배 꼬는 수인녀의 꼬리를 한 번 만져준다.
“히이익!”
몸에 전류가 찌릿찌릿 오는지 몸을 배배 꼬는 그녀.
아래는 보지 않아도 축축이 젖어있겠지.
“나 없는 동안 과제 다 해놔.”
“…스승님, 도대체 그걸 언제 다해요.”
“몰라. 다 안 하면 나 갔다 오고 나서 과제 두 배로 내줄 거야.”
“나쁜 스승님!”
한쪽에서 귀녀대원들의 칭얼대는 소리가 들려온다.
얘내들은 처음에는 내가 떠나는 걸 아쉬워하더니만, 이제는 올리비아의 과제가 더 큰 문제였는지 그녀에게 매달리는 모습이다.
그래.
꾸준히 마법을 배워서 나중에 써먹을 만한 인재가 되길 바란다.
뚜벅 뚜벅
“으응?”
“마스터, 저 30호입니다.”
귀녀대원 중에 가장 연장자이고 아카데미 퀸 출신이던 미녀 30호.
그녀가 나와서 부복한다.
“무슨 일이지?”
“저도 갈리아 제국으로 가는 원정대에 넣어주십시오.”
“이유는?”
“길잡이가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맞군.
내가 그 중요한 걸 왜 생각을 못 했지?
지금 원정대원 중에 갈리아 제국을 자세히 알만한 사람이 없다.
올리비아는 수십 수백 년 간 마녀의 숲에서 집순이 했고.
메이와 셰릴, 엘리샤는 윌렛왕국민.
에밀리도 마찬가지고.
티모는…논외로 치자.
그나마 링링이지만, 사실 링링도 마녀의 숲까지 수레에 갇혀서 왔으니 길을 알 리가 없고, 본래 고향은 달빛 초원이다.
“원정대원들이 이대로 나가면 길을 헤맬 가능성이 큽니다. 저희 귀녀대원은 윌렛왕국과 갈리아제국을 왔다 갔다 하면서 보부상 노릇을 했으니 길 안내에는 자신이 있고요.”
생각해보니 귀녀대 애들 리만 표국 출신이었지?
현재 갈리아 제국에서 이 여자들보다 길을 잘 아는 여자는 없겠군.
“야, 소피, 너 내가 내준 숙제하기 싫어서 나 쫓아오는 건 아니고?”
“아, 아니에요! 스승님!”
큭큭.
숙제하기 싫어서 따라붙었군.
뭐, 그래도 30호가 하는 말이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어.
“좋아, 30호.”
“네,”
“이름이 소피라고?”
난 얘 이름도 몰랐다.
아마 올리비아는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번호 대신 이름을 알아뒀나 보다.
울컥
자신의 이름이 주인에게 불리자 옥구슬 같은 눈물을 흘리는 30호가 고개를 끄덕인다.
“넵! 제 이름은 소피아예요.”
“좋아, 소피아. 너도 원정대다. 길잡이 형식으로 끼는 걸 허락한다.”
“존명.”
이로써 길잡이까지 완벽하게 해결되었다.
“지금 즉시 떠난다. 해가 뜰 때까지 달릴 거야. 동틀 무렵에 근처에서 거처를 알아본다!”
모두의 배웅을 받으며 마녀의 숲을 떠났다.
나와 메이, 셰릴과 엘리샤, 에밀리와 링링, 그리고 티모와 소피아는 전속력으로 달렸고, 그 위로는 올리비아가 비행마법으로 따라붙었다.
“이쪽으로 가면 제가 전에 정기적으로 들렀던 마을 하나가 나타납니다. 첫날 밤은 여기서 지내는 거로 하시죠.”
길 안내는 30호의 안내에 전적으로 맡기기로 했으니 이견이 없다.
어쨌든 갈리아 제국의 검투장과 노예시장 근처로만 가면 되니깐 말야.
탁 타다닥
마을까지 5km 정도 남았다.
지구에서라면 자동차를 타고 10분, 15분 만에 쉬익 갈 수 있는 거리지만, 이곳은 차가 없는 세계이므로 우리는 잠시 멈추어서 쉬기로 한다.
“그래도 제법 빠르군.”
아닌 게 아니라 민첩스텟들이 다들 높고 레벨 30대가 넘어서인지 웬만한 말이 걷는 속도만큼은 따라붙어서 금세 먼 거리를 올 수 있었다.
탁 타탁 탁
현재시간 새벽 5시.
곧 동이 틀 시간이다.
다들 저녁 7시부터 지금까지 달린 거다.
땀으로 푹 젖은 여인들이 행여 내게 땀 냄새를 풍길까 봐, 부산을 떨며 근처 계곡에서 목욕하고 향긋한 향수를 뿌렸다.
“왜 벌써 목욕을 하는 거야. 어차피 다시 또 달리면 땀날 텐데 말이야.”
“주인님께 언제나 깨끗하고 준비된 모습을 보이고 싶어서요. 움직이다가 저희 몸을 사용하실 수도 있잖아요?”
여자들이 교육이 잘 되었어.
특히나 내 아내들과 첩들을 데리고 와서인지 충성심이 아주 높다.
“소피아.”
“네, 넵!”
에밀리와 티모를 제외하면 여기서 유일하게 부인이나 첩이 아닌 30호가 내 물음에 부동자세를 하며 대답한다.
“모나스는 어떤 곳이지?”
자유도시 모나스.
우리가 갈 도시의 이름이다.
“좀 특이한 도시예요. 제국 황실의 입김이 잘 미치지 않는 곳이기도 하죠.”
“그래서 노예시장이 활성화되어있다는 건가?”
“맞아요, 게다가 세율도 낮아서 상인들이 무척 좋아하는 도시예요.”
소피아의 말로는 보통의 상인들은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영지의 영주나 수도일 경우에는 왕에게 꽤나 많은 양의 세금을 내야 한다는 모양이다.
“하지만 자유도시 모나스에는 상인조합의 본부가 있어요. 그렇다 보니 상인들의 힘이 세서 도시 수뇌부도 조합의 눈치를 안 볼 수가 없고, 조합도 필요 이상의 세율 증가에 항상 저항해 왔죠. 다른 도시보다 신분에 따른 차별이 덜한 곳이기도 해요.”
“멍! 저 말은 틀렸다멍!”
소피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링링이 딴지를 걸었다.
“…링링님? 이래 봬도 갈리아 제국에서 20년 넘게 살아온 저입니다. 제 말이 어디가 틀렸다는 건가요?”
“노예들에게는 모나스만큼 지옥이 없었다멍! 거기 노예들은 개보다도 못한 취급받는다멍!”
흠, 둘의 의견이 갈리는군.
“무슨 소리예요! 전 아카데미에서 평민 출신이라고 얼마나 은연중에 무시를 당했는데요! 능력도 안 되면서 귀족이라는 껍데기 하나로 으스대는 놈들이 유일하게 발도 붙이기 싫어하는 도시가 모나스예요!”
“멍! 우리 입장에서는 귀족이나 평민이나 다 똑같은 놈들이다멍. 왜 귀족에게 무시당하면서 우리 같은 노예들은 더 무시하냐멍! 검투장에서 생활하는 동안 나랑 친하게 지냈던 인간 노예들은 다 귀족보다 부자 평민들 더 싫어했다멍!”
아무래도 내 여자들의 신분이 다양하다 보니 이런 일도 일어나는구나.
귀녀대원들은 평민.
수인녀들은 한때는 원주민이었다가 노예생활을 겪었고.
육림대는 농노출신이지.
심지어 셰릴은 귀족이고 말이야.
“셰릴, 너는 할 말 없어? 여기서는 너와 내가 유일한 귀족인 것 같은데?”
“…글쎄요. 도련님도 알다시피 저희 왕국에는 부유한 평민이라는 계층 자체가 존재하지 않잖습니까?”
맞다.
이놈의 소국 윌렛왕국, 거기에서도 중심이 아니라 지방에 있는 베르너 백작가에 부르주아 출신의 자본가 자체가 없다.
전통적인 귀족들에 의한 봉건 통치가 꾸준히 이어오고 있는 촌동네 나라.
“그래도 성 밖에 의원 쟝 아저씨는 매일 밀 두 포대를 벌 정도의 부자였어요!”
우리 순진한 메이.
하루에 밀 두 포대 벌었다고 부자라고 하네.
하긴 밀 한 포대가 지구 시세로 치면 20만 원이니깐, 요새 지구로 치면 월 600.
연봉 7천만 원 이상 버니까 부자 측에 드는 건 맞네.
하지만 그것도 시골 알부자 정도이지, 갈리아 제국 상인조합의 거부들은 수십만 골드에서 수백만 골드,
지구로 치면 수백 수천억을 굴리는 놈들일 거다.
“나나 셰릴 같은 시골 촌귀족들이 낄 대화는 아닌 것 같군. 올리비아, 어떻게 생각해?”
“인간 계층 간의 갈등은 제가 살아왔던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오던 일이었습니다.”
올리비아의 연륜이 느껴지는 말에 신경전을 벌이던 여인들의 이목이 자연스럽게 쏠린다.
“세상 오래 살다 보면 깨닫는 게 있습니다. 수많은 요소가 복잡하게 맞물리는 게 우리네 세상이지만, 굳이 이 모든 걸 파악하려 애쓸 필요는 없습니다. 나에게 필요한 것만 생각하면 되는 겁니다.”
올리비아가 그래도 오래 살았다고 나름 괜찮은 해법을 내놓는군.
“올리비아의 말에 동의한다. 너희도 알다시피 내가 소유한 여자들의 출신은 다양해. 과거를 완전히 잊을 순 없겠지만, 쓸데없이 옛날 일로 분란을 조장하면 나도 내가 어떻게 행동할지 모르겠다.”
내 말을 들은 여자들이 입을 다문다.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갔다간 내가 어떻게 돌변할 수 있는지는 충분히 알고 있기에 다들 얌전해졌다.
“내가 원했던 건 자유도시 모나스의 객관적인 정보야. 소피아. 앞으로 네 사견은 자제할 수 있으면 최대한 자제하도록.”
“명심하겠습니다, 마스터.”
그래도 링링과 소피아의 말로 어느 정도 모나스에 관한 윤곽은 잡혔다.
나라의 간섭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도시.
그래서 기존 지배층의 손길에서 벗어난 부유한 평민들이 만든 상업조직이 도시의 경영에 관여.
이 때문에 노예시장과 같은 음지 시장이 급격히 성장.
노예의 인권은 기존 귀족체제 아래의 농노보다 더 바닥을 친다.
대충 요약하면 이 정도가 되겠군.
“알 지식은 대충 알았으니 다음 촌락에 가기 전에 미리 푹 쉬어둬. 두 시간 정도 있다가 출발하겠다.”
내 말을 들은 여인들이 각자 가져온 짐을 풀고 본격적으로 쉴 준비를 한다.
하지만 왜인지 이 판타지아 대륙에서는 우리를 잡아먹지 못해서 안달인 놈들이 너무 많다.
쐐애액
화살이 날아온다.
솔직히 스텟이 괴물 같아져서 날아오는 화살이 느려 보이네.
“주인님! 피하십시오!”
챙
내 정식 호위대인 육림대의 대주 엘리샤가 눈을 번뜩이며 재빨리 구르카를 빼 들고 날아온 화살을 쳐냈다.
눈 좀 붙이려다 허겁지겁 일어난 내 여인들.
화살이 날아온 저편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들린다.
“큭큭, 새벽에 이게 웬 횡재냐!”
“다 젊은 여인들입니다. 몸매도 작살나는군요.”
“난 저 금발 머리 하녀는 내 것이다!”
“난 저 여기사! 제법 꼴리는 엉덩이군.”
저렴한 대사를 거리낌 없이 지껄이며 나타나는 털복숭이 남자들.
딱 봐도 이마에 나 산적이오 써붙이고 다니는 놈들이다.
왜 항상 이런 대륙에서는 여행만 떠나면 산적이 맨날 나오는 걸까?
그리고 이런 산적이 주인공 일행을 잡아낸 소설을 난 읽은 적이 없다.
“엑스트라들 왔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엑스트라 모르냐?”
당연히 모르는 눈치.
내 일행의 면면을 스윽 훑어보다가(티모의 경우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후드를 쓰고 있어서 고블린인지 몰랐다.) 나 빼고는 모두 여자인 걸 알고 눈살을 찌푸린다.
“사내 하나가 계집을 이렇게 많이 끼고 있다니. 죽여 마땅한 놈이구나.”
“심지어 수인 여자도 하나 끼고 있습니다.”
“수인 여자가 보지 조임이 그렇게 좋다는데 오늘 처음으로 맛보겠군. 흐흐흐.”
성희롱이나 다름없는 말을 들은 여인들의 눈꼬리가 올라가면서 표정들이 서늘해진다.
하지만 이런 야산에서 예쁘고 몸매 잘빠진 젊은 여자 여러 명을 만난 산적들은 극도로 흥분해서 다른 건 하나도 눈에 안 보이나 보다.
“야, 너희는 눈깔이 없냐? 레벨 안 보여?”
“두목, 저 남자가 뭐라는 겁니까?”
“모르겠다. 난 저 레벨 1짜리가 왜 개기는지 이해가 안 돼.”
내 힘숨찐 모드에 완전히 넘어가 버렸네.
세상 어딜 가나 레벨 1은 이런 대접을 받고 살아야 하나 보다.
“저놈 팔다리 다 자르고 나무에 묶어두죠. 그런 다음에 저놈이 데리고 다니는 계집들을 돌려가면서 눈앞에서 따먹는 겁니다.”
“크핫하하하! 그것참 좋은 방법이군!”
난 여자들 레벨을 말하는 거였는데.
저 띨빵한 놈들이 여자들 가슴이랑 엉덩이 보느라 레벨은 보지도 않고 있다.
혹시나 남자는 위협이 될 수 있으니 내 레벨을 봤지만 겨우 레벨 1.
그래서 기세등등하고 있구나.
“얘들아, 정리해라.”
내가 나설 필요도 없다.
너희들 선에서 정리하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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