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화 〉 제일 중요한 걸 못 찾네
* * *
“잠, 잠깐만요! 형님!”
“왜, 설마 내가 찜해놓은 저 기사년 먹겠다는 거냐? 남의 떡에 손대려다간 손 잘린다. 욕심 작작 부려.”
“그, 그게 아니라! 저년들 레벨이!”
멍청한 녀석들.
드디어 레벨을 확인해봤나 보다.
도대체 저런 지능으로 산적질은 어떻게 해먹고 살았던 거야?
하긴.
여태까지 레벨 5도 안 되는 평민들만 털어먹다 보니 레벨을 보지 않는 게 습관화되어있던 거겠지.
오늘에서야 그 값을 치르겠구나.
잘 가거라.
멀리 안 나간다.
“다 30레벨 이상입니다!”
“저거 사기 레벨 아니야?”
“맞아, 괜히 위협을 줘서 접근하지 못하게 하려는 수작이 틀림없어!”
“막상 붙어보면 별것도 아닐 겁니다.”
급기야 현실을 부정하기 시작하는 산적들.
큭큭큭.
이런 새벽에 숲 속에서 야영하는 젊고 섹시한 여자가 한가득하니 따먹고는 싶고.
레벨은 마음에 걸리고.
그러니까 저 레벨이 뻥이라고 머릿속으로 세뇌 중인 거구나?
“주인님, 어떻게 할까요?”
나만 아니었으면 벌써 달려나가서 토막을 내버렸을 게 분명한 내 여인들.
내 명령이 없어서 아직까지 참고 있나 보다.
“저런 놈들 어떻게 처리할지까지 나에게 일일이 묻지 마. 너희는 이제 저 정도 벌레들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정도 수준의 여자들이다.”
그래.
이미 레벨 7~10 사이 산적들 한마디에 불쾌할 만한 레벨들은 아니잖니?
결국, 나는 잡고 있는 맹수의 고삐를 풀어버렸다.
내 명령에 자유를 얻은 여인들.
그대로 눈앞에서 하나둘씩 신형이 사라진다.
팟 파팟 팟
“응? 갑자기 눈앞에서 사라졌…”
“네놈 뒤에 있다. 이 변태새끼야.”
완벽하게 뒤를 잡은 셰릴.
레벨 40대 중반에 접어들기 시작하는 그녀의 레이피어가 번뜩이자, 산적 한 명의 머리에 공기가 통할 수 있는 구멍이 생기는 건 순식간이다.
…시원하겠네. 저 녀석.
머리에 산소가 더 잘 공급될 테니 저세상에서는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렴.
“크아아악!”
“이런! 제기랄! 계집 따위가!”
여성 비하 발언을 하던 레벨 8 산적이 거대한 도끼로 눈앞에 수인 여자를 향해 내리친다.
터업
“겨우 이거냐멍. 검투장에서 너 정도로 약한 놈은 맹수 먹이로 던져주곤 했다멍.”
힘 대 힘.
내리치는 도끼를 양손바닥을 마주쳐서 막아낸 링링.
그대로 아랫배에 이단옆차기를 내리꽂자, 양손에 도끼를 들어서 방어할 수단이 없는 남자가 직격타를 맞고 어제 먹은 음식을 모조리 땅바닥에 보여준다.
“씨발 좆됐다! 모두 도망가!”
“이미 늦었어! 우드 애로우!”
끝단이 뾰족한 나무 화살이 상황이 잘못되었음을 느끼고 도망가려는 산적에게 비처럼 쏟아져 내린다.
오우.
인간 고슴도치가 되었군.
모든 급소에 나무 화살이 박힌 채로 어기적거리다가 결국 쓰러져서 일어나지 못한다.
“시발, 뭔가 이상하다 했어. 저런 괴물 년들. 난 도망간다!”
인간 집단이 있으면 그중에서 눈치 빠른 녀석도 한 명쯤은 있기 마련.
교전이 시작되자마자 꽁지가 빠지게 달아나버린다.
저건 잡기 힘들려나?
내 생각을 부정이라도 하듯 그의 뒤로 엄청난 속도로 화살이 날아간다.
쐐애액 퍼억
“끄, 끄어어어…”
털썩
정확하게 심장이 꿰뚫린 남자는 잠시 자신의 가슴을 살펴보다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을 보인 뒤 쓰러져버린다.
“메이, 궁 솜씨가 많이 늘었어.”
“감사해요, 서방님. 셰릴이 가르쳐줘서 정말 많이 늘었어요.”
자그마치 200m가 넘는 거리였는데 당기기도 힘들어 보이는 대궁으로 쏘아 맞혔다.
그동안 메이가 얼마나 틈틈이 활 연습을 했는지 알만한 부분이다.
“그건 그렇고. 엘리샤, 너는 왜 나가지 않았지?”
“저는 서방님의 호위대장입니다. 바깥의 적이 있을지라도, 급한 일이 아니라면 항상 사랑하는 주인님 곁을 지켜드리겠습니다.”
마치 이전 세계 일본의 닌자 복장처럼 온몸을 시커멓게 둘러싼 육림대주 엘리샤.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반짝이는 그녀의 흑요석 눈동자를 마주하자 새삼 마음이 든든해짐을 느낀다.
그래.
호위대장이 이런 맛이 있어야지.
저런 쩌리들은 주인의 안전을 위협할 수준도 되지 않아서 나서지 않고 주위를 살피고 있었구나.
“살, 살려주십시오, 레이디들. 제가 잠시 정신이 나갔던 것 같습니다. 이번 한 번만 살려주시면 다시는 이곳에 얼씬도 하지 않겠습니다.”
순식간에 정리되는 자신의 동료들을 눈앞에서 지켜본 마지막 생존자는 이미 실금을 했는지 바지가 축축이 젖어있다.
“뭐? 레이디? 아까는 계집 어쩌고 했잖아.”
이미 세 명의 머리를 깔끔하게 베어낸 에밀리가 얼굴에 피를 묻힌 채로 새빨개진 검을 마지막 생존자의 어깨에 턱 올려놓는다.
“암요, 레이디들이시지요. 저는 저런 절대 레이디들을 얕잡아 본 적이 없습니다. 전 이번 일로 산적 일도 손 씻고 새 사람 되서 살겠습니다.”
에밀리의 눈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엎드려 비는 아저씨.
아무래도 나이가 어린지라 에밀리는 이쯤 되니까 조금 마음이 약해지나 보다.
“파이어 볼.”
“안, 안 돼! 끄아아악!”
화르르륵
뒤에서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귀녀대원 소피아가 참다못해 올리비아에게 배운 화염계 마법으로 생존자를 불태워버린다.
땡그랑
살이 익는 고통에 남자가 바닥에 구르며 정신없이 난리를 피자, 품속에서 짧지만 날카로운 비수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에밀리 대주, 항상 조심하세요. 저렇게 당신의 동정을 구하면서 뒤로 칼을 갈고 있는 자들은 갈리아 제국에 널리고 널렸습니다.”
“아…네! 명심할게요!”
그제야 저 남자가 엎드린 채로 자신을 노리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에밀리.
눈에 독기가 서리며 이미 불타서 숨이 끊어지기 직전인 산적 놈의 목을 검으로 날려버린다.
뎅겅
“…앞으로 봐주지 않겠어.”
아직 어린 여자애에게 벌써부터 세상의 쓴맛을 보여주는 점이 조금은 마음에 걸리지만, 그래도 모르는 것보다는 낫겠지.
15살이면 어린 나이도 아니고, 이런 세상사의 이치는 일찍 알면 알수록 본인의 생존율을 높일 수 있는 법이다.
지구에서도 느낀 거지만 오래 살아남는 사람은 그저 잘난 놈이 아니라, 항상 긴장을 늦추지 않는 녀석들이었어.
결국, 엑스트라들은 요란한 등장과는 다르게 너무나 허무하게 사라졌다.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쉬려고 했는데 땀이 나서 그럴 생각 안 들겠지?”
“네, 바로 마을까지 가면 안 될까요?”
“그러도록 하지.”
엑스트라 산적들을 가볍게 물리친 우리는 바로 소피아가 전에 정기적으로 들렀던 시골 마을 아룬을 향해 달렸다.
“아룬에 가는 건 정말 오랜만이네요. 거기 주점 아주머니가 요리를 기가 막히게 잘하세요.”
“그럼 아점은 거기서 먹으면 되겠군.”
가볍게 대답을 하고 걷는 속도를 높였다.
물론 내 민첩스텟은 200에 육박하고 환골탈태 후에 신체 조건까지 우월해졌으니 마음먹고 달리면 준족처럼 달려나갈 수 있다.
하지만 굳이 전력으로 달릴 필요가 없기에 내 여인들의 속도를 맞춰주었고, 여인들의 속력도 충분히 빨랐다.
탓 타탓
결국, 아룬에 도착했다.
그리고 소피아가 그리워하던 이 시골 마을은…잿더미가 되어 있었다.
“이, 이게 어찌 된 일이지?”
“…참혹하군.”
별의별 꼴을 다 본 나로서도 이건 꽤 작품이었다.
마을 전체가 전소해버린 것이다.
나무로 만들어진 집들은 죄다 잿더미가 되어서 원래 형태를 알아보기가 힘들었고, 우물로 짐작되는 곳에는 익사체들이 둥둥 떠 있었다.
길을 걸을 때마다 모래바닥 중간중간에 말라붙은 핏자국이 있었으며 절단된 사지가 굴러다닌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죽일 놈들!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가 있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찾아내서 죽여야 해요!”
“흑…흑흑…얼마나 아팠을까…”
이제 10살도 안 되었을 것 같은 아이들을 팔다리에 못을 박아서 나무 기둥에 고정시켜 놓았다.
그리고 그런 나무 기둥 앞에는 벌거벗은 여인들의 시체가 있었는데, 목이 사라지고 몸통만 있는 시체도 있었으며, 배가 갈라진 임산부의 시체도 있었다.
그리고 시체가 된 모든 여인의 공통점은 보지에 정액이 말라붙은 자국들이 선명히 보인다는 점이다.
“보아하니 나무에 애들을 박아넣고 고통에 겨워하는 모습을 어미들에게 지켜보게 하면서 강간을 했군.”
“흐, 흐흐흑. 정말 너무해…”
메이가 내 옆에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옆에서는 굳은 표정의 셰릴이 이 참상에서 애써 긍정적인 점을 찾아내려고 노력한다.
“그나마 저 여인은 누가 해줬는지는 몰라도 거적때기라도 얼굴에 덮어줬어요.”
누워있는 채 붉은 거적때기에 얼굴을 덮인 채로 정자세로 누워있는 여자의 시체.
가랑이 사이가 엉망이 된 것이 여성기가 찢어져서 흘러나온 피로 인해 과다출혈로 사망 한 것으로 짐작된다.
“…저건 거적때기가 아니야. 여성기를 칼로 가르고 자궁을 적출해서 얼굴에 덮어둔 거다.”
“웁, 우우웁!”
내 말에 결국 구토감을 참지 못한 엘리샤가 옆에서 어제 간단하게 먹었던 빵을 토해내 버렸다.
“죄, 죄송합니다, 주인님.”
“괜찮아, 처음 보는데 그럴 수도 있지.”
“아닙니다. 동생들도 많이 보는데 추태를 보였습니다.”
나름 연장자라고 중심을 잡아주려는 모습은 나쁘지 않다.
그리고 구토하는 사람은 엘리샤뿐만이 아니다.
검투장에서 별의별 꼴을 다 봤을 텐데도 링링도 땅바닥에 계속 토를 쏟았고, 올리비아도 좋지 않은 안색으로 먼 하늘을 바라보는 게 속에서 올라오는 구토감을 진정시키려는 게 눈에 보였다.
털썩
“소피아! 소피아 언니! 정신 차리세요!”
“에밀리, 소피아 좀 부축해줘.”
“네!”
에밀리도 정신없는 와중에 충격에 기절한 소피아의 어깨를 들쳐멨다.
아무래도 이 중에는 소피아가 알던 사람도 있었을 테니 가장 충격이 심했겠지.
“취익! 인간들 이상하다! 동족들을 이렇게 다루는 게 이해 가지 않는다!”
티모마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한다.
그나마 이 녀석에게는 인간들이 이종족이다보니 좀 잔인하기는 해도 불쾌감 정도만 느끼는 모양이다.
“주인님, 주인님은 괜찮으세요?”
“난 괜찮다.”
한바탕 토를 쏟은 셰릴이 나에게 물어보았다.
나야 지구에서 희대의 싸이코였으니 이런 장면에 딱히 감흥이 생기진 않는다.
“어떻게 괜찮을 수가 있죠? 주인님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네요.”
“전장의 지휘관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냉철한 이성을 갖춰야 하는 법이지.”
멋있어 보이는 개소리 한 번 지껄여줬다.
여자들은 내 개소리에 감화되어 고개를 끄덕이며 날 보고 감탄한다.
“그보다 이 마을을 이렇게 한 녀석들의 단서를 찾아라.”
“네, 주인님, 반드시 단서를 찾아내겠어요.”
굳이 이 마을 녀석들의 복수를 해주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나와 내 여자들이 하루 쉬었어야 한 거점을 망친 죄는 물어야겠군.
겸사겸사 카르마도 좀 얻고 말이야.
팟 파팟
그녀들의 신형이 사라졌다.
단서를 찾으라고는 했지만 마을을 정리하라는 명령도 그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영특한 내 여자들은 그 말을 알아듣고 빠르게 시체들을 정리했다.
못에 박힌 아이들의 시체를 빼냈고 잘린 시체조각들을 하나로 모아 하나로 만들어주었다.
티모는 구덩이를 파서 죽은 사람들을 일일이 묻어주었다.
“취익! 귀찮다! 이 행동이 주인님 명령이랑 관계가 있는 행동인지 의문이다! 취익!”
“죽고 싶지 않으면 얌전히 땅 파라.”
“…알겠다! 취익!”
가장 레벨이 높은 올리비아가 서늘한 표정으로 말하자 티모가 기겁을 하며 땅을 팠다.
시체들을 묻어주고 혹시 모를 전염병의 방지를 위해 마을을 다시 한 번 불태웠다.
탁 타탁 탁
불꽃이 타는 소리를 들으며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어주는 내 여인들.
얘들아.
그건 좋은데 단서는 없었냐?
제일 중요한 걸 못 찾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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