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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7화 〉 딱히 신경 쓸 필요 없겠지



〈 97화 〉 딱히 신경 쓸 필요 없겠지

* * *

“하아압!”

“큭큭, 요년 뭐냐? 귀엽네!”

거구의 소드마스터를 향해 달려드는 에밀리.

그녀의 검에는 백색 검광이 빛나고 있다.

그런 에밀리의 뒷목을 셰릴이 즉시 잡았다.

“셰, 셰릴님?”

“무작정 달려들면 안 돼. 우리보다 스텟도 높고 체격도 좋은 놈들이다. 돌면서 찌를 타이밍을 봐.”

역시 셰릴은 그동안 남자들 틈바구니에서 훈련을 받아서인지 함부로 덤비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그녀가 찌르기에 적합한 레이피어를 든 이유도 이러한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서였겠군.

“호오? 기사인가?”

“자세도 제법 되어있네.”

“저렇게 젊은데 레벨이 높은 이유가 있군.”

확실히 소드마스터들도 셰릴의 날카로운 기세를 느끼고는 마찬가지로 자세를 낮춘다.

“얘들아! 이년들은 우리가 상대할 테니 끼어들지 마라!”

잘 됐다.

저 소드마스터들이 호기를 부린다.

2대2 매치.

“호오! 재밌겠는데?”

“나머지 놈들 빨리 잡고 구경해야지.”

다른 검투사들도 분위기를 느끼고 오히려 네 명이 싸울 공간을 내어준다.

확실히 무대에서 숫자 맞춰서 싸워버릇한 검투사라 이런 결투에 끼지 않는 걸 기본 원칙으로 하나보다.

“나머지 놈들 먼저 쓸어버리자!”

“와아아아!”

문제는 우리 쪽이다.

셰릴과 에밀리는 건들지 않지만, 나머지 우리들을 향해 다가오는 17명의 검투사.

“하아압!”

쩌어엉

“으응? 너도 여자잖아?”

“내가 여자인 거에 보태준 거 있냐?”

엘리샤가 온통 흑의 복면을 쓴 데다가 키까지 커서 남자인 줄 알았나 보다.

하지만 막상 가까이서 보니 온몸의 S자 굴곡과 풍만한 가슴이 검은 옷으로도 미처 가려지지 않았다.

“아니 없지. 대신에 제압해주고 아줌마 보지 헐 때까지 박아줄게.”

“내 보지는 주인님 외에는 사용할 수 없다. 꺼져라, 벌레!”

쩡 쩌어엉

엘리샤의 구르카가 화려하게 휘둘러지며 검투사의 검을 쳐냈다.

정말 그동안 마녀의 숲에서 치열하게 연습을 한 티가 난다.

많이 늘었네.

하지만 문제는 엘리샤에게 덤비는 남자가 하나가 아니라는 점.

“이봐! 아줌마? 나랑도 놀아줘!”

“크읍!”

깡 깡

엘리샤의 손발이 꼬이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저쪽의 수가 많은 데다가 레벨도 그녀랑 비슷하다 보니 상대하기 어려운 게 당연하다.

피핏

“아악!”

“됐다! 자세 무너졌어! 마무리해!”

“죽이지는 마! 살려서 따먹어야 해!”

이런.

결국, 실수가 나오고만 그녀.

팔 한쪽에 칼이 스치면서 피가 배어 나온다.

그 틈을 타서 검투사 중 한 명이 엘리샤를 등 뒤에서 덮치려고 한다.

“…파이어 볼!”

콰아앙

소피아가 캐스팅을 끝내고 엘리샤를 급히 지원했다.

그러자 엘리샤를 자빠트릴 생각에 눈이 벌게진 검투사 한 명이 화구(火?)를 정통으로 얻어맞았다.

“끄, 끄아아악!”

“뒤져라!”

틈을 놓치지 않은 엘리샤가 정신없어하는 검투사의 오른손을 구르카로 베어버린다.

서걱

“커흐어억!”

“다시는 그 못된 손으로 여자를 희롱할 생각하지 마라! 칼도 잡지 마!”

다행히 한 명을 처리했지만, 아직 그녀를 노리고 있는 검투사는 세 명 이상.

쐐애애액 깡

빈틈을 노리고 기습하려는 검투사의 눈을 향해 날카롭게 찔러 들어가는 화살에 검투사가 결국 공격을 포기하고 방어를 한다.

“칫!”

“저 궁수하고 마법사가 거슬리는군.”

“저놈들 먼저 잡자!”

잔뜩 화가 난 검투사 놈들의 어그로가 원거리 공격수들에게 몰린다.

“여기 나도 있다멍! 날 무시하지 말라멍!”

“너, 너는 링링?”

오.

그래도 검투사 생활 좀 했다고 링링을 알아보는 놈들도 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링링은 수준급 권사.

재빨리 뒤돌아서 남자를 등진 링링이 그의 팔을 잡고 엎어치기 한판을 따낸다.

퍼어억

“끄어억!”

저거 분명히 허리 나갔다.

유도에서 업어치기는 바닥에 매트라도 있지, 이런 흙바닥에서 저렇게 메쳐지다간 허리 똑 나가는 건 순식간이다.

휘리리릭

검투사의 감각인가?

아니면 수인족 특유의 본능인가?

업어치기 한 상태로 자세가 무너진 그녀를 노린 검투사의 도끼를 링링이 놀라운 유연성으로 허리를 꺾어 피해낸다.

“잘했다췩! 저놈은 내가 마무리한다췩!”

티모놈도 대롱에 달린 철침을 쏘아 링링을 공격하느라 역으로 자세가 무너진 적의 목을 정확히 뚫어낸다.

꿀렁 꿀렁

“커억! 말도…안, 돼!”

목에 피를 쏟으며 쓰러지는 검투사.

그렇게 벌써 다섯이 쓰러졌다.

이제야 우리가 보통이 아닌 걸 알았는지 얼굴에 미미한 긴장이 도는 사내놈들.

“이런 씨바련들. 너희는 곱게 죽을 생각은 버려라. 보지 부서지도록 박은 뒤에 팔다리 다 잘라서 노예시장에 팔아줄게.”

“모나스로 돌아가는 동안 발가벗겨서 묶어놓고 말에 끌려가도록 만들겠다.”

쯧쯧.

남자 놈들은 이래서 안 돼요.

자기네 동료 다섯 명이 죽은 와중에도 우리를 ‘죽일’생각이 아니라 강간을 위해서 ‘사로잡을’ 생각인가 보다.

이 녀석들이 진작에 우리를 죽이려고 들었으면 꽤나 곤란했을 텐데 말이야.

콰아아아앙

“끄아아악!”

“아니! 빌튼이! 빌튼이 죽었어!”

“호호호, 겨우 그따위 마법 실력으로 어디 가서 현자 행세하지 말렴!”

나이스.

마법사 VS 마법사 싸움이 벌써 끝났나 보다.

내게 올라운더를 부여받은 올리비아는 시작부터 플라이 마법으로 날아서 상대 마법사와 맞붙었다.

원래라면 대규모 마법을 펼쳐야 하지만 상황이 급박해서 낮은 위계의 마법을 효율적으로 써야 하는 상황.

그리고 수백년 전에 일어난 마녀사냥 때도 활약했던 올리비아는 대규모 마법이든 이런 근접전투든 상관하지 않고 수월하게 할 수 있는 능력자였다.

“크헉, 어떻게 그런 식의 마법 활용이 가능한 거지?”

6급 현자.

그는 멍청하게도 마법사들끼리 전투한다는 생각에 상대보다 더 큰 마법을 준비하려고 주문을 중얼거렸다.

당연히 올리비아에게는 먹잇감이나 마찬가지였고, 블링크로 뒤를 잡고 채 다크 미사일을 불러내 상대의 옆구리를 뚫었다.

황급하게 캐스팅을 취소하고 블링크를 시도해 달아났지만, 놀랍게도 올리비아는 그의 순간이동 좌표까지 계산해서 도착 지점에 정확히 스템 스피어를 꽂아넣은 거다.

“내가 뛰어난 것도 있지만, 넌 너무 경험이 없었어. 잘가렴.”

촤아악

그렇게 마탑의 핵심 인력으로 취급되는 6급 현자가 허무하게 올리비아에게 죽었다.

“마, 마녀 아닌가? 저 정도 술사면 마녀 같은데?”

“이런 시발! 이젠 사정 봐주면 안 된다! 모조리 죽여라!”

드디어 전력을 다해 맞부딪치기로 결심한 검투사들.

우격다짐으로 메이와 소피아, 그리고 티모가 있는 쪽으로 밀고 들어온다.

원거리 공격수들 먼저 처리할 생각.

슬쩍 보니 엘리샤와 링링은 각각 두 명씩 맡아서 다굴당하느라 정신이 없다.

완벽히 노출된 거다.

메이는 궁술 연습만 했지, 근접전투 연습은 하나도 하지 않았기에 한 명이라도 숙련된 전사가 붙었다간 단숨에 제압당할 거다.

그건 올리비아에게 마법만 배웠던 소피아도 마찬가지.

그나마 티모는 레인저 출신이니 어느 정도는 대응할 수 있겠지만, 메이와 소피아 양쪽이 무너지면 같이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다.

“후훗, 드디어 이 몸이 나설 때인가?”

중2병 걸린 컨셉으로 머리를 한 번 쓸어준다.

이 전장에서 혼자 손 놓고 있었던 내가 출격하면 모두가 벌벌 떨겠…

“저 새끼만 남자다! 저놈부터 죽여!”

“씨발놈. 자기 혼자 계집을 이렇게나 많이 끼고 다녀?”

“그래 봐야 레벨 1이야. 금방 족치고 다른 년들도 잡아.”

눈깔 뒤집고 달려드네.

자뻑 분위기 아니었나 보네.

“뒤져!”

후우우웅

서늘한 곡도의 단면을 타고 반사되는 빛이 내 눈을 시리게 한다.

검에 넘실대는 마나가 누가 봐도 익스퍼트의 완숙에 다다른 수준.

무술에 문외한인 사람이 이 순간을 겪었다면 실금을 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

그런데 그 검을 바라보는 나는 이상하게 긴장이 전혀 되지 않는다.

“느려.”

“…엉?”

“으응?”

뭐지?

마나가 넘실대는 검을 맨손으로 잡아버렸다.

내 스텟이 깡패인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 일 줄 몰랐는데.

“이게 무슨.”

“나도 모르겠다. 일단 한 대 맞자.”

수박이 터졌나?

가볍게 머리에 꿀밤 한 대 놔줬는데 바로 빨간 물 터지면서 수박이 개봉된다.

이전 세계 지구에서 땡볕 비치는 한여름에 시원한 그늘이 지는 원두막에서 먹었던 수박이 참 맛있었는데 말이야.

팡 팡

뒤이어 오는 검투사 두 명의 머리통에도 주먹을 날려준다.

힘 225 민첩 225.

레벨 30대 중반 검투사들이 내 주먹에 반응도 못 하고 정통으로 얻어맞았다.

퍽 퍽

수박 두 통 개봉 완료.

뒤따라오던 검투사들이 순식간의 세 명의 뚝배기가 열린 걸 보고 멍하니 나를 바라본다.

“뭐, 뭐지?”

“분명 레벨 1인데…”

“호호호! 너희 같은 벌레의 눈으로 마왕님의 레벨을 재단하려 하다니! 참으로 어리석구나!”

하늘에 떠서 대형 마법을 준비하고 있던 올리비아가 내 모습을 보고 기세가 등등해서 목소리에 마나를 싫어 쩌렁쩌렁 울리도록 외쳤다.

“뭐? 마, 마왕?”

“그러고 보니 저 녹색 머리 여자는 마녀 같은데?”

“젊은 여자들이 어쩐지 레벨이 너무 높다 했어.”

“설마 진짜 마녀들이고 저 남자는 마왕인 거야?”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일을 당하자 슬슬 인지 부조화가 오는 검투사들.

그들의 눈동자에 공포가 어린 순간, 이미 게임은 끝난 거나 마찬가지다.

“호호호! 모두 위대한 72 대마왕 중의 1좌이신 데이몬님의 재림을 찬양하거라!”

큭큭.

어쩐지 수인녀들을 만난 이래로 자꾸 마왕행세를 자주 하게 된다.

현실은 72 마왕은커녕 하급 마족 새롬도 못 이긴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나를 마왕으로 여겨 검투사들에게 패닉을 유도할 수 있다면 마왕이 아니라 마신 행세까지도 할 수 있다.

“그, 그럴 리가 없다!”

“없으면 직접 당해봐.”

그대로 뒤를 잡았다.

역시나 반응도 못 한다.

내공에서 기운을 뿜어 올리자 자연스럽게 내 손을 타고 올라오는 수강(手)

환골탈태 이후에 심법수련을 하면서 압도적인 스텟을 바탕으로 이미 강기를 형성할 정도로 경지가 올라있었던 것이다.

물론 예전에 워낙 많은 웹소설을 읽어서 배경지식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는 점도 내 급격한 성장의 주요한 요소 중 하나다.

“어휴, 이제 뒤를 돌아보면 뭘 어쩌자는 거냐?”

그래도 나름 익스퍼트급이라고.

등 뒤를 잡은 나를 눈치채고 곡도를 휘두르려 했지만, 이미 어깨가 잡혔다.

우드드득

“끄아아악!”

“오른쪽 어깨니까 다시는 딸딸이 못 칠 거다.”

“크허헉…난…왼손으로…딸딸이를 친다. 넌 잘못 맞췄어…”

아하. 왼딸잡이?

그러면 왼손도 해줄게.

우드드득

“끄아아악!”

“앞으로는 양발로 딸딸이를 치도록.”

그게 신체 구조상 가능한가?

나도 모르겠다.

내 몸도 아니니깐 딱히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

* * *



사상 최악의 주인공〈 97화 〉 딱히 신경 쓸 필요 없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