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화 〉 자그마치 레벨 10!
* * *
“재, 재수 옴 붙었네!”
“진짜 마왕이야! 도망가! 전원 후퇴!”
기세가 꺾였다.
내가 진짜로 힘을 발휘하자 상대조차 되지 않는 허접들이었던 거다.
내 스텟이 200/200/130/100.
이게 얼마나 개사기 스텟이었는지 마녀의 숲을 빠져나오고서야 실감한다.
“어딜 도망가려 하죠? 응분의 대가를 치르세요!”
쐐애애액 푹
“크어억!”
메이의 화살이 매섭게 뒤통수에 날아와 꽂힌다.
적들이 전의를 상실했으니 내 여자들의 사기가 올라가는 건 당연하다.
아룬마을에서의 참상을 떠올린 그녀들의 눈에 독기가 서린다.
“천벌을 받을 놈들! 너희는 죽어 마땅하다.”
서걱 서걱
엘리샤에게 등을 보인 채로 말을 타려고 시도했던 두 남자의 무릎에 생기는 빨간 실선.
그녀가 반달 모양의 구르카로 대퇴부를 끊어놓은 거다.
허벅지 근육이 절단나고 말에 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히이이잉
운이 나쁘게 말까지 도와주지 않고 앞발을 쳐들자 도망도 치지 못하고 볼썽사납게 바닥을 데굴데굴 구른다.
“살, 살려주십시오, 마녀님들.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틀렸다.
완전히 내 여자들을 마녀로 믿고 있어.
“…좋아, 살려주지.”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텁
새빨간 피가 뚝뚝 떨어지는 구르카를 털어낸 엘리샤가 웬일로 적의 생존자들을 살려주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멍? 엘리샤 이모, 저들을 살려줄 가치가 없는 놈들이다멍.”
신나게 검투사를 몸에 구멍을 뚫어주고 있던 링링이 우연히 그런 엘리샤를 보고 물었다.
그러자 아무 말없이 검지로 하늘을 가리키는 엘리샤.
“하늘을 봐라.”
“…멍?”
고오오오오
불길한 마나의 파동.
어찌나 기운이 집약되었는지 하늘의 구름까지 마나의 결을 따라 소용돌이를 그리고 있다.
전투가 벌어지자마자 3분 이내에 상대 마법사를 제압한 올리비아.
여유가 생긴 그녀가 하늘에 떠 있던 채로 주문을 외워서 준비한 마법이 드디어 펼쳐지는 것이다.
“떨어져라! 다크 레인!”
암속성 기후(??)마법.
순간 사위가 어두워지며 대낮 같던 하늘이 한밤중이 되었다.
시야가 없어지니 검투사들의 공포심이 극대화되는 건 당연지사.
하지만 그들이 피할 공간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후드드드득
콰아앙
“끄아아악! 마녀다!”
“이런 빌어먹을 마녀들!”
“천사님들께서 너희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아!”
대단하다.
아룬 마을의 죄 없는 사람들을 그렇게 잔인하게 죽여놓고 천사를 찾는 꼴이라니.
역지사지라는 말을 전혀 모르는 놈들인건가?
어찌 되었든 다크 레인이 뿌려지며 검투사들의 몸에 구멍이 송송 뚫린다.
“당황하지 마라! 검으로 쳐내다 보면 중요부위 정도는 보호할 수 있다.”
오호?
그래도 적팀에 레벨 40짜리 부관으로 보이는 검투사가 정신을 차리고 침착하게 막아내려 한다.
맞아.
사실 올리비아의 다크레인은 조금 급하게 캐스팅한 감이 없지 않다.
얘내들은 레벨 40에 육박하는 놈들이니 사실 정신만 똑바로 차렸어도 두세 명 다치고 끝났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전장에서 너처럼 정신 똑바로 차린 지휘관은 적의 최우선 목표가 된다는 사실을 모르나보군.”
이미 내가 그 녀석의 옆을 잡아버렸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다크레인을 쳐내다가, 이 빗속에서 멀쩡히 서 있는 나를 보고 검투사의 두 눈이 공포에 잠식된다.
솔직히 비처럼 쏟아지는 암흑마력탄을 맞고 있는 나도 온몸이 뻐근하긴 하다.
하지만 지력과 운스텟이 130/100인 나는 이런 집중되지 않고 넓은 면적에 퍼부어지는 마력탄을 견딜 정도의 몸은 된다.
환골탈태한 후 기본적인 근골도 더 질기고 단단해지기도 했고 말이야.
일부러 아프지 않고 멀쩡한 척을 했고 검투사 눈에는 이런 비를 맞고도 멀쩡해 보이는 내가 괴물처럼 보여도 할 말이 없다.
“대체 어떻게…”
“사악해져라. 그러면 가능하다.”
물론 저세상에서 말이다.
판타지아 대륙에서 나보다 사악해지면 내가 그 즉시 처단할 거라서 말이야.
서걱
수강으로 목을 날렸다.
마지막으로 정신을 붙잡던 검투사를 마무리했으니 나머지 피라미들은 알아서 지리멸렬.
결국, 비가 그칠 때 즈음에는 땅 위에 서 있는 검투사들은 쌍둥이 소드마스터 둘뿐이었다.
쾅 콰아앙
“크윽! 이런 개 같은 경우가!”
“부하들도 다 죽었는데 너도 따라가는 게 어때?”
“뚫린 입이라고 못하는 말이 없구나.”
부와앙
칼을 크게 횡으로 휘두르자 셰릴이 급하게 머리를 숙여 피한다.
그리고 드러난 빈틈.
셰릴이 놓치지 않고 날카롭게 레이피어를 찔러넣는다.
핏
“읏!”
“그렇게 큰 동작을 하면 다음 내 공격은 어찌 막으려고 하지?”
오우.
셰릴.
대단하군.
소드마스터를 가르치는 소드익스퍼트라니.
확실히 지금 저 마스터 놈은 부하 놈들이 모두 죽자 극도의 불안감에 휩싸여서 이성적인 사고를 못 하고 있다.
“뒤져라! 개 같은 년!”
“으읏!”
콰아앙
역시 소드마스터는 소드마스터인가?
거대한 쯔바이핸더에서 나오는 섬뜩한 보랏빛의 오러가 죽음의 기운을 가득 품고 일렁거린다.
여기서 잠깐 알아보자.
오러=강기(?)
마나=기(?)
오러소드와 마나소드가 부딪치면 어떻게 될까?
이건 이전 지구 세계의 철기 문명과 청동기 문명을 생각하면 된다.
철로 만들어진 병장기와 청동기로 만든 병장기가 부딪친다고 청동기 무기가 무슨 갈대 나무마냥 바로 파삭 부서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연속적으로, 그리고 힘을 흘리지 않고 계속해서 정면으로 들이받는다면 먼저 부서지는 쪽은 청동기 무기가 될 것이다.
소드마스터의 오러와 익스퍼트 고수의 마나소드도 비슷한 원리다.
쾅 쾅
“크으읏!”
“크핫하하! 그럼 그렇지! 밑천이 보이는구나!”
오러로 찍어누르기 시작하자 셰릴의 레이피어에 실린 검기의 농도가 점점 옅어진다.
저대로라면 곧 검이 부서지겠군.
무기가 부서지는 순간 게임 오버다.
“그럼 어디 한번 도와주러…”
“셰릴님! 제가 도와드릴게요!”
백화일검 제3무, 십본앵(???)
뭐지?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만해(卍?)를 외쳐야 할 것만 같은데.
기분 탓인가?
에밀리의 칼에서 하늘하늘 떨어지는 마나의 조각들.
날카로운 유리조각처럼 셰릴을 상대하느라 정신없던 소드마스터의 몸에 박히기 시작한다.
푹 푸푹 푹
“끄아악! 동생 놈아! 이 어린 계집 하나 붙잡지 못하고 뭘 하고 있었던 거냐!”
나름 일란성 쌍둥이라도 형 동생이 있었구나?
그리고 자신의 동생을 바라본 형이 믿기지 않는 광경을 보고 기함한다.
그리고…나도 놀랐다.
“무, 무슨! 어떻게 저런 일이 일어날수가!”
“뭐야! 에밀리, 너 지금 소드마스터를 잡은 거야?”
에밀리.
요 맹랑한 소녀가 레벨 40대 초반 익스퍼트면서 마스터에 반열을 오른 45짜리 고수를 일기토로 잡아내 버린 거다.
눈조차 감지 못하고 목이 달아난 채 몸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소드마스터의 시체.
그러자 남은 놈의 사기도 급속도로 떨어져 버렸다.
“저세상에 가서는 네가 죽인 사람들에게 영원토록 죗값을 갚거라!”
푸우욱
온몸에 십본앵 조각이 박혀 피투성이가 되어 움직이지 못하는 남자를 셰릴이 마무리한다.
“이건…이럴 수 없어…”
털썩
결국, 마지막 놈이 쓰러졌다.
20명의 검투사를 모조리 제압한 것이다.
탁 탁
에밀리가 칼에 묻은 붉은 피를 털어낸 뒤에 검집에 검을 납검했다.
모두가 어안이 벙벙한 상태.
아직 어린 소녀에 불과한 에밀리가 2m가 넘는 거구의 소드마스터를 잡았으니 그럴 만도 하다.
“자, 잘했어! 에밀리!”
“덕분에 살았다. 고맙구나.”
“대단해, 그동안 그렇게 검 연습을 하더니 많이 늘었어!”
내 아내들이 하나둘씩 와서 에밀리를 껴안아주고 칭찬해주자,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미미하게 피어오른다.
나로서도 이건 예상 밖의 상황.
솔직히 난 셰릴과 에밀리가 2대2 매치를 이기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그냥 시간만 끌어줘도 장한 일이라 생각했는데, 그 이상을 해주었어.
뚜벅 뚜벅 텁
내가 나서자 에밀리를 얼싸안고 칭찬해주던 여자들이 일제히 한 발짝 물러선다.
그리고 나와 에밀리만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서로의 눈이 마주치자, 아까의 미소는 어디에 팔아먹었는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는 에밀리.
뭐지?
갑자기 왜 정색해?
쟤 나 싫어하는 거 아니야?
설마 아니겠지.
“수고했다.”
머리를 쓰담쓰담 해주었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푹 익은 홍당무가 되어버린다.
고개를 아래로 숙여서인지 앞머리에 가려져서 에밀리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네.”
딱 단답.
제대로 대답도 안하고 슬쩍 자리를 떠버린다.
도대체 얘는 머릿속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네.
아무튼 그녀의 실력은 셰릴을 근소하게 앞선 것 같고, 경험까지 갖춰지면 저 천무지체년이 어디까지 갈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그리고 올리비아. 그만 내려와라.”
“네, 서방님.”
“정말 고생 많았다. 네가 상대 마법사를 먼저 제압해줘서 기세가 이쪽으로 넘어올 수 있었다.”
이 말이 맞다.
올리비아는 내 기대만큼 해주었다.
내 여자 중에서 유일한 레벨 50대 여인.
수적 우세로 기세등등하게 싸우던 적들이 처음으로 당황했을 때가 바로 아군 마법사의 사망을 확인했을 때다.
그리고는 바로 위로 올라가서 대형마법을 캐스팅해서 적들을 계속해서 불안하게 만들었지.
물론 다크레인이 내릴 때쯤에는 내 활약으로 검투사들이 반쯤 패닉상태이긴 했지만, 이미 그전의 공으로도 에밀리에 이어 두 번째로 MVP를 받을 만하다.
바로 그녀에게 접근해서 엉덩이를 부드럽게 만졌다.
주물주물
“히잉!”
“너의 공은 반드시 보답 받을 것이다. 나 데이몬의 이름으로 약속하지.”
“아…좋아…사랑해요♥주인님♥”
앙증맞은 엉덩이를 희롱당하면서 올리비아가 내 품에 폭 안겼다.
얼굴에는 미소가 한가득한 게 나에게 인정받았다는 사실이 그 무엇보다 기쁜 모양이다.
“그리고 다른 여인들 또한 모두 수고 많았다. 나는 너희의 고생을 잊지 않을 것이다.”
다른 여인들도 토닥여줬다.
그러자 올리비아를 부러워하던 다른 여인들도 이내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대충 상황은 정리되었나?
아니, 아직 몇 개가 더 남았군.
“…거기 언제까지 숨어있을 셈이지?”
내가 무성한 수풀 한쪽을 바라보고 말하자 다른 여인들이 어리둥절한 모양이다.
솔직히 나도 도합스텟 600에 달하는 기감이 아니라면 느끼지 못할 뻔했다.
하지만 강력한 기운을 뿜어내는 검투사들이 모두 사라지고 나고 혹시 몰라 기감을 뿌리자 무언가가 걸린 것이다.
“주인님? 저기에 뭐가 있나요?”
“너무 멀어서 기감이 닫질 않네요.”
조금 거리가 있긴 했다.
셰릴이 고개를 갸웃하고 다가가며 기감을 뿌리자 그녀의 얼굴이 굳었다.
너도 발견했구나.
한치의 고민도 없이 칼을 뽑고 수풀로 달려가는 그녀.
“누구냐!”
“히익! 살려! 살려주십쇼! 제가 잘못했습니다!”
바스락
수풀을 헤치고 나니, 그곳에는 40대로 보이는 뚱뚱한 남자가 엎드린 채로 셰릴에게 두 손을 싹싹 빌고 있다.
“어우, 역하네.”
바지에 노란물이 줄줄 새서 바닥에 지도를 그리고 있었다.
4살도 아니고 0하나 더 붙은 아재가 저러는 건 딱히 보기 좋은 그림은 아니다.
“멍멍! 나 이사람 누군지 안다멍!”
링링이 저 남자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지더니만 삿대질을 했다.
누군데 그래?
빨리 알려줘.
궁금해지려 한다.
“이 사람 현무단주다멍! 모나스 검투장 4대 검투단주 중에 한 명이다멍!”
“히익! 너는…링링? 여기 있었구나!”
뭐지?
링링이를 알고 있어?
그리고 현무단주는 또 뭐지?
일단 중요한 것부터 짚고 넘어가자.
“검투단주니까 한마디로 이 썩을 놈들을 이끌던 놈이라는 거지?”
“맞다멍! 이 검투노예들 주인이 이 사람이다멍!
아하.
대장이 너구나?
전투가 벌어지자 부하들 던져놓고 자기는 풀숲에 숨어있었던 거였어.
“레벨 가리개를 벗겨봐.”
얼마나 잘났기에 이런 으리으리한 부하들을 거느리나 보자.
내 말을 들은 메이가 앞장서서 강제로 사내가 차고 있는 팔찌를 빼내었다.
“그래도 4대 단주인지 뭐시긴지면 상위 귀족일텐데 레벨도 높겠지.”
마침내 가리개가 해제되었다.
그러자 그의 머리 위로 뜨는 레벨.
그는 자그마치…레벨 10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