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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3화 〉 피투성이 루나



〈 123화 〉 피투성이 루나

* * *

물론 큰소리는 쳤지만, 당장 내가 어떻게 뭘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판타지아 대륙에서 용사란 존재는 72대천사의 힘을 직계로 이어받은 강력한 존재.

특히 일신의 무력수련도 게을리하지 않았을 테니, 시끄러운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은 나로서는 지금 건드려서 좋을 건 하나도 없다.

다만 적립을 해놨다는 거다.

그리고 데이몬의 데스노트에 이름이 한 번 적히면 절대 지워지지 않는다.

한편, 셰릴은 성녀와 용사가 생각보다 진심인 것을 알자 살짝 당황한 모습.

“주작단이 현무단을 통째로 인수할 생각이라고요?”

“그렇다고 하더군요. 안타까운 사고였긴 했지만, 정예병력을 잃은 시점에서 현무단은 더는 현무단이 아니게 되었지요.”

어차피 인수사항은 내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안 되니깐 매튜는 아마 나중에 답변하겠다고 할 거고.

여기가 문제네.

성녀 한유림이 은근한 목소리로 셰릴에게 권유했다.

“셰릴님 혹시 꿈이 있으신가요?”

“…꿈이요?”

“네, 아직 이렇게나 젊으신데 나름 인생의 목표가 있으실 것 아니에요?”

“분명 있으시겠지. 대륙 최고의 여기사가 된다거나, 멋진 남편을 만나거나 등등 있으실 거로 생각합니다.”

용사와 성녀가 쿵짝이 잘 맞네.

양쪽에서 셰릴을 옥죄니깐 그녀의 눈동자가 다소 혼란에 잠기는 게 보인다.

일단은 둘이 뭘 더 말하고 싶은지 궁금하니 얌전히 들어보자.

“그 꿈, 저희와 함께한다면 충분히 이루실 수 있습니다.”

애초에 셰릴은 꿈을 이루었는데 말이야.

그녀의 꿈은 내 좆집이었거든.

현재도 충실히 그 역할을 이행하고 있고 말이야.

“특히 제 언니는 홀리엔 법국의 이름난 성녀이기도 하고, 갈리아 제국에서도 손꼽히는 실력자 피에른 대공의 아내이기도 해요.”

오호라?

이건 좀 의외의 정보인걸?

계속 말 듣고 있길 잘했다.

그나저나 피에른 대공은 여기저기 안 끼는 데가 없네.

귀녀대원의 리만표국을 전멸시킨 암수도 그놈이고, 루나의 울프문 부족을 멸망시킨 것도 그놈.

마지막으로 성녀와 용사와 아주 가까운 사이인 건가?

생각해보니 무슨 음습한 짓을 꾸미고 있는지 모른 첫째 형 제임스랑도 뭔가 연관이 있을지 모르잖아?

이놈 도대체 뭐지?

그렇지 않아도 내 행보에 방해될 인물이라 생각하긴 했는데 슬슬 거슬려지네.

“대공님과 저희의 도움을 받으면 셰릴님은 변방의 조금 유망한 귀족에서 단숨에 판타지아 대륙 최고위층의 사교계에 화려하게 데뷔할 수 있습니다. 언제까지 이런 시골에서 고생만 하실 거예요? 이제 빛 좀 보셔야죠.”

말하는 투가 어째 연예계 데뷔할 거냐고 묻는 소속사 사장 말투네.

하긴, 내 여자 셰릴 정도면 판타지아 대륙에서 연예인이라 해도 무방하지.

일단은 셰릴에게 눈치를 주었다.

알아서 잘 대답하라는 말.

어차피 눈치 빠른 셰릴은 대충 내가 원하는 말을 잘 지어서 낼 것이다.

“음…상당히 매력적인 제안인 건 부정할 수 없겠네요. 솔직히 지금 이 자리에서 당장 결정할 수는 없는 일인 것 같아요.”

“이해합니다. 이번 검투 경기가 끝날 때 전에만 알려주세요. 만약에라도 결투장 위에서 만나게 된다면 사정을 봐 드릴 수가 없으니깐요.”

우승상품 천신의 눈물을 반드시 가져가야 하는 스탠스를 취하는 용사와 성녀.

그들 눈에 우리 현무단 내 여자들은 한 수 아래로 보이는지 표정과 몸짓에는 여유가 가득했다.

저 잘난 콧대를 부숴주고 싶은데…

툭 툭

응?

어디선가 감촉이 느껴진다 싶더니 엘리샤가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찌르고 있다.

“왜? 엘리샤, 무슨 일이야?”

그러자 내 귀에 대고 귓속말로 속삭이는 엘리샤.

“좋은 생각이 떠올라서요. 용사와 성녀가 이름값을 내세워서 검투대회 중에도 저희 현무단 숙소에 들어올 수 있었으니, 저들에게 부탁하면 백호단 숙소로 들어가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좋은 방법인데?

그런 방법이 있었구나?

엘리샤의 말대로 원래 이 시기에 상대 검투사가 경쟁 검투단에 방문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정말로 용사와 성녀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한 일.

그런 용사와 성녀의 이름값을 빌려서 백호단에 가서 루나를 만난다면?

굳이 검투대회를 치르지 않고 그녀를 볼 수 있는 거다.

탈출 계획도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겠지.

역시 연륜을 무시하지 못하는군.

이런 와중에 이런 생각을 떠올리다니.

포상으로 바로 엘리샤의 치마 안으로 손을 넣어 보지를 만져주었다.

“하으응♥ 흐깅♥”

“응?”

“방금 이상한 소리가 들렸는데?”

“아, 아무 소리도 아닙니다!”

내 기습적인 클리토리스 습격에 엘리샤가 자신도 모르게 높은 옥타브의 교성을 내지르자, 이를 이상하게 여긴 용사와 성녀.

하지만 내 여인들은 대충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부러운 눈빛으로 엘리샤를 바라본다.

너희도 보지 토닥토닥 받고 싶으면 엘리샤처럼 좋은 생각 떠올리렴.

“용사님, 성녀님, 죄송하지만 작은 부탁이 있는데 들어보시겠습니까?”

“…부탁이요?”

내가 앞으로 나서서 말하자 단숨에 떨떠름한 표정이 되는 이상철.

이상철, 얼굴 펴라.

옛 친구 만났는데 표정 꼬라지가 그게 뭐냐?

죽빵 마렵게 말이야.

“네, 저희 현무단에 있는 수인 검투사 링링이 루나 족장을 못 본 지가 몇 달이 넘었습니다. 이대로라면 검투대회가 끝나도 루나를 만날 수 있을지 불투명해서요. 혹시 같이 가주셔서 링링이가 족장님과의 만날 수 있도록 해주실 수 있을까요?”

이름값 좀 빌려줘라.

이런 말을 길게 풀어쓴 거다.

귀족적인 화법이었고 용사도 단번에 내 말의 요지를 알아들었다.

“음…백호단의 루나요? 확실히 한 번쯤 만나볼 가치가 있는 인물이긴 하다만…”

다만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꼴이 부탁하는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거다.

여태까지 나는 검투대회에 나가서 무위를 보여준 적도 없었고, 이렇게 다재다능한 여자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남자로 껴있으니, 용사가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게 이해가 된다.

그렇다고 이렇게 대놓고 사람을 무시해?

이상철 이놈 이전에 지구에서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이전 세계에서 나한테 한 번 데이고 나니깐 인성 어디 한구석이 조금 꼬인 것 같다.

“저기, 저도 부탁해요! 링링은 제 친한 친구이기도 하거든요!”

“용사님! 나도 부탁한다멍! 족장 안 본 지 오래됐다멍! 보고싶다멍!”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눈치채고 재빠르게 용사에게 붙어서 아양을 떠는 셰릴과 링링.

그러자 이 단순한 이상철 놈이 단숨에 입이 헤벌레한다.

“좋소! 아름다운 레이디들이 부탁한다면 어쩔 수 없지. 어차피 루나도 한 번쯤 보려 했으니 어서 가시지요!”

얼씨구?

보지들이 부탁하니깐 바로 프리패스네?

더러운 세상이다 정말.

어찌 되었든 목적을 완수했으니 일단은 참고 넘어간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성녀 한유림을 보았다.

여전히 빵빵하고 탐스러운 젖가슴.

굴곡진 골반이 남자의 음심을 자극한다.

하지만 난 한유림의 가장 매력이 뭔지 안다.

바로 보지조임.

저년 명기 중의 명기다.

나도 지구에서 그녀와 첫 잠자리를 가져보고 놀랄 정도였으니 말이야.

거의 기천의 여자와 잠자리를 가졌지만, 보지 조임만큼은 저년이 단연 압도적이었다.

과연 판타지아 세계에서도 똑같은 몸을 가지고 태어났는지 궁금하군.

“저기요, 어딜 쳐다보는 거죠?”

“죄, 죄송합니다. 시선을 둔다는 게 어떻게 그쪽으로 가버렸네요.”

아차.

내가 너무 한유림의 몸을 대놓고 훑어봤나?

내 시선을 느낀 한유림이 불쾌한 표정으로 가슴골을 가리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자네, 데이몬이라고 했나?”

용사 이상철이 나를 노려본다.

아까 내 여자들이 붙었을 때는 헤벌레했으면서, 내가 지 여자 쳐다본 것만으로도 저렇게 개 같은 표정을 짓는다고?

“조심하게. 성녀는 그 자체로 성스러운 여인이야.”

“물론입니다! 존경의 마음으로 쳐다본 것뿐입니다. 판타지아 대륙에서도 유명하신 분 아닙니까?”

적어도 보지 조임에 관해서는 존경하는 게 맞으니깐 내 말에 거짓은 없다.

“…그 말 믿겠다. 하지만 앞으로 시선을 똑바로 두도록.”

말 참 좆같이 하네.

어차피 지금 성녀를 따먹을 생각 없으니깐 괜히 난리 좀 피우지 마라.

다만 주작단 vs 현무단 검투장에는 내가 꼭 좀 나가야겠다.

이상철과 의미 없는 신경전을 펼치면서 어느새 도착한 백호단의 숙소.

역시나 두 명의 문지기들이 우리들의 길을 막았는데, 용사와 성녀를 알아보고 눈이 휘둥그레진다.

“용, 용사님? 성녀님 아니십니까?”

“72대천사의 가호가 그대들과 함께하기를. 반갑습니다.”

저렇게 성직자 포스로 인자한 미소를 지을 줄도 아는 걸 보니깐, 용사가 이름만 용사지, 사실상 정치인이나 다름없는 것 같다.

그리고 저 문지기들도 괘씸한 게, 그전에 나와 링링만 왔을 때는 절대 통과시키지 않겠다는 의지가 다분했었는데, 지금은 이미 마음속 무장이 반쯤 해제된 듯하다.

“72대천사의 어린 양들이여, 저와 제 일행이 백호단의 루나님을 조금 만나 뵙고 싶은데 가능하겠습니까?”

“그, 그게…원래 규정상 안 되는 게 맞지만…용사님이시니깐 특별히 입장을 허락해드리겠습니다.”

역시나 바로 프리패스구나.

이래서 사람이 이름값이 중요하다니깐?

“혹시 저희에게 축복 한자락 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얼씨구?

무슨 교황 납신 줄 알겠네.

용사에게 축복까지 받으려고 하는 문지기들.

이상철은 그런 그들의 머리에 손을 얹고 눈을 감은 채로 읊조린다.

“위대하신 72대천사님들이시여. 이 어린 양들에게 숭고한 축복과 은혜로운 자비를 내려주소서.”

“아아아!”

“천사님들이시여!”

문지기들이 이미 신성함에 절여져서 녹진녹진해진 지 오래.

우리는 아주 편하게 백호단 숙소로 들어올 수 있었다.

“…당신들은?”

“용사님? 성녀님?”

“용사와 성녀님이 백호단에 왔다!”

“와아아아!”

역시나 백호단 숙소 내에서도 용사와 성녀는 엄청난 인기다.

제기랄.

나도 용사로 빙의했으면 좋았을 텐데 왜 악마 후보자 따위가 된 거야?

새롬.

듣고 있냐?

듣고 있냐고!

또 드라마 보느라 이쪽은 신경도 안 쓰고 있겠지.

진짜 나중에 다 두고 봐라.

내 이름을 판타지아 대륙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게 만들어주마.

그리고 새롬 너는 내 자지에 박히면서 24시간 내리 근무다.

“저희는 루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잠시 찾아뵐 수 있을까요?”

“아…루나요?”

잠시 난처한 표정이 된 검투사들.

무슨 일이라도 있나?

“걔는 지금 독방에 있을 텐데.”

“독방이요? 개인수련이라도 하고 있나 보군요.”

“그, 그렇습니다!”

“그럼 바로 안내해주시죠.”

잠시 주저하던 검투사 한 명이 머뭇머뭇하다가 일단은 용사를 안내했다.

자연스럽게 그의 뒤를 따라가는 나와 내 여인들.

링링은 벌써 족장을 만나는 게 기대되는지 눈빛이 촉촉하다.

“여기가 독방입니다.”

“…여기가요? 개인수련 하기에는 조금 비좁아 보입니다만.”

말이 독방이지, 그냥 감옥이네.

굳게 닫힌 철문 너머로 3평이나 남짓한 공간이 있는 게 보였다.

“루나가 저렇게 작은 곳에서 고행하는 걸 좋아해서요. 그녀만의 개인적 취미랍니다. 저희도 말려봤지만…하하하!”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말라멍! 그럴 리가 없…읍읍!”

재빨리 링링의 입을 막았다.

지금 괜히 루나의 대우에 대해 문제 삼아봐야 우리에게 좋을 건 하나도 없거든.

끼이이익

철문이 열리고 루나의 모습이 드러났다.

전에 잠깐 봤었던 눈송이가 내려앉은 하얀 털과 삐죽거리는 귀여운 동물 귀는 여전했지만, 참혹할 정도로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 * *



사상 최악의 주인공〈 123화 〉 피투성이 루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