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화 〉 진정한 공포가 뭔지 보여주마
* * *
오우.
이건 좀 처참한데?
도대체 얼마나 채찍을 맞은 거야?
바닥에는 루나가 어찌나 피를 많이 흘렸는지 차가운 돌바닥이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수인 특유의 빛나는 루나의 눈빛.
예전 세계 지구에서 밤중에 호랑이를 만나면 두 눈만 둥둥 떠보인다던데, 지금이 딱 그 느낌이다.
“도,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하하하!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루나는 고행을 좋아한다고요! 혼자서 저렇게 자신을 매질하며 훈련합니다.”
수석 검투사로 보이는 남자가 어쭙잖게 변명을 하는데 씨알도 먹히지 않는 소리.
어찌 되었든 72대천사를 대표하는 용사와 성녀는 7선종을 옹호하는 입장이기에 이런 상황에 분노를 느끼는 건 당연하지 않을까?
“무슨 짓을 벌이는 겁니까? 같은 숙소의 검투사를 이리 만들다니요! 제가 볼 때는 당장 루나 검투사는 검투대회를 기권하고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얼핏 들으면 용사가 루나를 걱정해줘서 하는 말 같지만, 잘 들어보면 검투 대회를 포기하라는 말이 들어있다.
그녀의 부상을 핑계 삼아서 강력한 경쟁자를 떨기려는 얄팍한 수작.
그 속셈을 나도 알았는데, 백호단의 수석 검투사가 모를 리 없었다.
“그, 그럴 순 없죠. 루나는 검투대회 핵심인력이니깐요.”
“또 섹스 안 해준다고 때렸냐멍! 어떻게 너희는 1년이 지나도 달라진 게 없다멍!”
갑자기 들려오는 링링의 목소리.
그러고 보니깐 링링도 한때 백호단이었지?
그러면 여기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알겠네.
“너, 너는 링링? 네가 왜 여기에…”
“이런 경우 한두 번 아니다멍! 예전에 내가 백호단 있을 때도 잠자리 거절하고 맨날 맞았다멍!”
그랬구나.
루나 나름대로 필사적으로 처녀를 지키려고 이런 불합리하고 모진 대우를 견딘 거였어.
“이 말이 사실입니까?”
“아, 아닙니다! 절대 아니고 루나는 그저 혼자 이렇게 고련하는 걸 즐기는 겁니다. 그렇지 루나?”
그러면서 눈깔에 힘을 팍 주는 수석 검투사.
루나가 여기서 진실을 말할 수도 있지만, 그랬다가는 우리가 돌아가고 나면 죽도록 고문당할 게 뻔했다.
“…네, 저는 고련을 즐깁니다.”
그녀의 눈은 이미 모든 희망을 모두 버린 듯해 보였다.
끊임없는 절망 속에서 더는 삶의 의지를 찾지 못하는 자의 방황하는 눈빛.
될 대로 되라.
하지만 처녀만큼은 주지 않겠다.
뭐 이런 마인드인가?
“족장! 나 링링이다멍! 내가 왔다멍!”
“…링링?”
그나마 같은 부족원을 보니깐 눈에 좀 생기가 도는 것 같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반짝인 것일 뿐.
이내 그녀의 생기는 무저갱 속으로 침잠해 들어간다.
“나 족장이랑 단둘이 할 말 있다멍! 모두 나가줬으면 좋겠다멍!”
링링이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물론 이건 사전에 계획된 행동.
링링과 루나가 단둘이 있을 시간을 줘서 탈출계획을 알리려는 의도다.
“…보기가 딱하군요. 나가 있자, 유림아.”
이미 저렇게 피투성이가 된 루나를 상대로 경쟁자 탐색은 의미가 없었고, 저 둘을 만나게 해주려고 온 것이기도 했으므로, 용사와 성녀는 순순히 자리를 비켜주었다.
끼이이익 쿵
철문이 닫혔다.
이제 저 안에서는 링링이 루나에게 탈출 계획을 말할 것이다.
그리고 난 이때를 틈타 궁금했던 점을 용사에게 물었다.
“용사님, 그런데 용사님의 이름이 참 특이한 것 같습니다. 이상철이라뇨? 판타지아 어느 가문 출신이십니까?”
의도적인 질문.
물론 나는 이상철이라는 이름이 지구에 있는 대한민국의 흔한 이름인 걸 알고 있다.
그렇지만 지금의 나는 데이몬이므로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다.
“별걸 다 궁금해하는군.”
내가 또 개인적으로 질문하자 기분 나빠하던 용사.
진짜 너 사람 그렇게 가리는 거 아니다.
“저도 궁금해요! 용사님의 이름이 참 특이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셰릴이 옆에서 맞장구를 쳐주자, 그제야 못 이기는 척 대답을 해준다.
“크흠흠! 셰릴님이 궁금해한다면야 어쩔 수 없군요. 사실 나는 이쪽 세계 사람이 아닙니다.”
오호라?
그럼 이놈도 나처럼 빙의한 건가?
“이전 세계에서 의도치 않게 죽은 후에 영혼이 죽은 용사의 몸에 빙의한 것이죠.”
“그랬군요! 대단해요!”
셰릴의 의도적인 리액션.
그래, 잘하고 있다, 셰릴.
그렇게 좀 더 맞장구 좀 쳐줘라.
아직도 이놈에게 알아낼 게 많거든.
“그럼 성녀님 이름이 특이한 것도 빙의라는 걸 해서인가요?”
은근슬쩍 물었다.
너무 자연스럽게 물어서인지, 용사가 술술 대답해준다.
“아니, 유림이는 빙의가 아니라 지구에서 수명을 마치고 환생을 해서 기억이 없더군요.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한유림은 케이스가 다른 경우군.
그나저나 기억이 없다는 건 나에게도 좋은 소식은 아니다.
만약에 기억이 있었다면 내가 송길준이라는 걸 밝히는 것만으로도 한유림과 급격히 가까워질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아니면 내 본모습을 알아서 더 거부했으려나?
그래도 같이 몸 섞은 떡정이 있는데 마냥 내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원래도 용사님은 성녀님을 이전세계에서 아시는 사이었나 봐요.”
“아하하! 사랑하는 아내였습니다!”
“그런 말씀하지 마세요! 전 기억에도 없는 일인데 그렇게 말씀하시면 부끄러워요!”
용사의 말에 살포시 놀라며 그를 제지하는 성녀 한유림.
하지만 이미 얼굴이 발그레해져 있는 것이 그녀도 용사를 내심 좋아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흐흐흐, 보기 좋은 커플이야.
한창 좋을 때지.
하지만 여기에 데이몬 한 스푼이 들어간다면?
최근에 클레어와 매튜를 찢어놔서인지 내 커플 브레이킹 능력은 제대로 물이 오른 상태.
어디 기회 한 번만 와라.
놓치지 않고 제대로 둘 사이의 관계를 망가트려 줄 테니 말이야.
끼이익 쿵
“오래 기다렸냐멍! 루나 족장과의 얘기 끝났다멍!”
확실히 링링과의 시간이 도움되었는지 루나의 얼굴이 처음보다 훨씬 얼굴이 좋아보인다.
애틋하게 서로를 바라보며 나오는 두 수인녀는 팔짱을 낀 것도 모자라, 서로의 꼬리를 비벼댄다.
…이거 백합 아니지?
분명 보지를 비비고 있는 것도 아닌데 묘하게 백합 느낌 나네.
아무튼간에, 중요한 얘기는 다 전했으리라 믿는다.
“용사와 성녀님, 제 부족원 링링과의 만남을 주선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어려운 일 아니었습니다. 솔직히 루나님의 무력을 탐색할 생각으로 왔지만…힘들면 검투대회를 포기해도 괜찮습니다.”
“아닙니다. 애초에 유리아 황비님의 배려로 이곳에 있을 수 있었기에 전 끝까지 싸워야 합니다.”
용사도 성녀 한유림의 형부가 피에른 대공이니 울프문 부족의 비하인드 스토리에 관해서는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어쩔 수 없군요. 루나님은 생각보다 강해서 쉽게 할 수 없을 테니 각오해 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저 또한 쉽게 당해줄 생각은 없습니다. 수인족의 정수가 무엇인지 보여드리죠.”
두 강자는 팽팽하게 눈을 마주치며 전의를 불태웠고 나는…옆에서 하품을 했다.
“하아아암~”
응? 하품 소리가 조금 컸나?
용사와 루나가 동시에 나를 본다.
용사는 이 미친놈은 뭐지? 하는 느낌이지만, 루나는 순간 눈빛이 번쩍하며 광채가 쏟아졌다.
역시 탈출계획을 들었구나.
그뿐만 아니라 현재 남은 수인족들의 사정이나 내 진정한 정체에 관해서도 모두 들었겠지.
마왕 데이몬.
72대천사를 숭배하는 판타지아 대륙에서는 배척해야 하는 1순위지만, 내가 루나 녀석이라면 악마의 손이라도 잡는다.
게다가 그 녀석이 자신의 부족을 구해줄 수 있을 정도의 강자라면, 더더욱 망설일 필요도 없다.
“…당신이 데이몬이군요.”
“그래, 반가워.”
고개를 까딱하고 말았다.
어차피 여기서 둘이 더 할 얘기도 없어.
자세한 얘기는 이런 어두침침한 지하실이 아니라 바깥 공기를 쐬면서 하자고.
“자자, 어서 나가자고! 남의 검투단에 오래 있는 것도 좋은 그림이 아니야.”
용사의 보챔으로 거의 떠밀리다시피 백호단을 나왔다.
나오자마자 역시나 셰릴에게 또다시 한다리를 걸치려 한다.
“오늘 특별히 셰릴을 보고 어려운 부탁을 들어줬네.”
그 와중에 생색은 또 엄청 내는구만?
링링과 루나를 만나게 해줬으니 빚을 갚으라는 거겠지.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어요. 일단 숙소에서 곰곰이 생각을 해보고 말씀드릴게요.”
“말만 그러지 말고 내 제안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시는 게 좋을 겁니다. 사실 전 이게 왜 고민할 거리가 되는지도 모르겠거든요.”
“본인을 위해서 어떤 쪽이 더 이득인지 잘 생각해보세요. 귀족이면 그런데 빠삭하잖아요?”
말만 제안이지, 굉장히 강압적인 권고인 데다가, 옆에서 성녀까지 은근슬쩍 거드는 솜씨가 일품이다.
이후에도 용사는 거듭 셰릴에게 떡밥을 던졌고, 셰릴은 나중에 생각해보겠다면서 은근슬쩍 피하는 지루한 공방이 잠시간 이어졌다.
“크흠흠, 어쩔 수 없군. 그럼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결투장에서 뵙지 않기를 바라죠.”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안녕히 가세요, 용사님과 성녀님.”
겨우 거머리 같은 스카우터 연놈들을 떼네였다.
이제 현무단 숙소에는 우리뿐.
용사와 성녀와 있던 내내 존재감 없이 서 있던 내가 입을 열었다.
“링링, 결과는?”
“그게…조금 곤란하게 되었다멍.”
음, 예상과는 다른 대답이군.
곤란할 게 뭐가 있다는 걸까?
그냥 약속된 날짜에 땅굴 통해서 나오라고 하면 되는 거잖아?
“루나 족장이 그렇게 힘들어할지 몰랐다멍! 희망을 완전히 잃어서 탈출하는 게 의미가 없다고 한다멍!”
아예 놓아버린 거구나.
검투장에서 싸울 때는 사나운 투지가 보이길래 괜찮을 줄 알았는데, 마음속은 상상 이상으로 허물어진 상태였나 보다.
“그래서 루나가 탈출을 거부해?”
“그건 아니었다멍! 오히려 족장은 걱정했다멍!”
“무슨 걱정?”
“괜히 탈출해서 마왕님을 따라가다가 이미 마녀의 숲에서 자유를 찾은 다른 부족원들까지 위험에 처하게 하는 게 아닐까 걱정했다멍!”
오호라, 자신이 이렇게 힘든 와중에도 다른 부족원들을 생각하는 그릇이라는 건가?
왜 족장이 되었는지 알만하군.
무력만 출중한 여전사가 아니었어.
상당히 탐나는 인재야.
비록 그녀에게 일어난 울프문 부족의 비극은 안타깝지만, 나에게는 오히려 귀한 인력을 곁에 둘 수 있는 호재다.
정했다, 루나.
너는 내가 반드시 가진다.
“그렇다면 대답은 한가지뿐이군.”
“무슨 대답이냐멍!”
“…압도적인 강함. 그게 내 대답이다.”
이미 실패한 족장년이 확실하게 보호를 받고 있는 내 소유의 암캐들을 어설프게 걱정해? 감히?
두고봐라.
루나년이 날 따르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정도로 압도적인 강함을 보여줄 테니까 말이야.
“다음 경기 일정이 언제지?”
“내일 청룡단이랑 있다멍! 아마 에이스 팔라딘 요한이 나오지 않을까 예상한다멍!”
“그 경기, 대기 선수 엔트리 모두 내려. 내가 출전한다.”
일정도 딱 맞네.
바로 내일.
진정한 공포가 뭔지 보여주마.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