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1화 〉 레벨 1이었다
* * *
나는 솔직히 상황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루나가 생각 외로 엄청 미녀였기에 딱히 다투고 싶지 않았고, 링링이처럼 살살 구슬려서 따먹으려 했다.
내가 원하던 그녀와 나의 대화로그는 이렇다.
루나: 부족원들을 구해줬냐멍? 정말 감사하다멍.
나: 핫하하! 별거 아니었어.
루나: 그럴 리가멍. 정말 큰 신세를 졌다멍. 그런 의미에서…
나: 그렇다면 사양하지 않고…
쿵떡쿵떡 소떡쿵
이게 내가 예상하던 그림.
그리고 이제 현실로 돌아와 보자.
“변태 놈! 링링이 남자면서 왜 내 몸을 보는 거냐멍!”
오케이.
현실 파악 완료.
강아지 교육 실시.
드르륵
“어디 가냐멍.”
루나의 말을 무시하고 콜로세움의 외벽 구석으로 향했다.
각목 하나를 들었다.
아마 외벽 보수를 하고 남은 건축자재.
스릉 스릉
손에 강기를 일으켜서 각목을 갈았다.
부엌칼을 갈 때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뾰족한 각목의 끝단이 뭉툭하게 변했다.
조선 시대 아낙네들이 빨래터에서 옷 두들기던 나무방망이 모양.
“…설마 무기를 가져온 거냐멍?”
“내가 살던 세계에서는 속담이 하나 있지. 미친개는 맞는 게 약이라고.”
무슨 소리를 하는지는 모를 것이다.
하지만 그게 중요하랴.
끝에 개 어쩌고 하는 말만 들어도 어떤 의도로 말했는지 지나가던 어린애도 알 텐데.
스스스스
요년 봐라?
기세가 제법이다.
다들 잘 모를 것 같아서 말하는 건데, 요즘 나는 검투장에서 손꼽히는 고수들이랑 꽤 많이 싸웠다.
첫 번째는 팔라딘 요한.
알비온 연맹에서도 에이스 팔라딘으로 여겨졌고, 레벨 40 이상의 잔뼈 굵은 고수다.
두 번째는 성녀 한유림.
성녀라는 것 자체만으로 일단 엄청 강한데, 심지어 천사를 강신시킨 상태로 대등하게 싸우기까지 했다.
그런 연놈들이랑 비교할 때, 루나의 기운은 절대 밀리지 않았다.
대략적으로 가늠해보자면 요한보다는 한 수 위, 강신한 한유림보다는 두 수 아래?
물론 강신을 하지 않은 한유림과는 비교 대상조차 아니고.
“인간, 각오는 되었겠지멍?”
츠츠츠츠
눈부신 백발을 휘날리는 루나가 천천히 내 주위를 돌면서 탐색전을 벌였다.
흥분했던 아까 상태 봐서는 바로 멧돼지처럼 돌격할 줄 알았건만.
생각보다 침착하네?
그럼 내 쪽도 탐색 한 번 해드려야지.
데이몬식 개사기 탐색 들어갑니다.
악마의 눈 발동!
상태창
이름: 루나
칭호: 울프문의 딸
직업: (전)울프문 부족 족장
LEVEL: 55
힘: 150 민첩: 150 지력: 12 행운: 120
보너스 스탯: 0
카르마 수치: 310
스킬: 환수화
상태: 혐오.
예전에도 루나에게 악마의 눈을 돌려보고 감탄했던 사항이지만, 권사가 레벨 55까지 올린 건 정말 대단한 거다.
물론 어떤 병장기를 잡든지 간에 레벨 50은커녕 30을 넘기도 힘든 게 판타지아 대륙이지만.
주무장에 따라 레벨 올리는 난이도가 크게 차이 나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일단 검이나 창을 든 평범한 전사가 가장 레벨 올리기가 쉽고.
다음은 날붙이로 된 특수무기를 든 용병.
마지막으로 권사는 무기 자체를 들지 않기에, 이중에서는 가장 어려운 편에 속한다.
그 이상으로 레벨 올리기 어려운 직종을 찾자면 마법사 정도?
새삼스럽게 올리비아가 대단해 보이네.
그래도 걔는 나이라도 많잖아?
겉으로 보기는 영락없는 젋은 여자여도 말이지.
하지만 루나는 나이가 어리다.
링링에게 듣기로는 20대 초반.
딱 먹기 좋은 나이군.
“내 얼굴에 뭐 묻었냐멍? 왜 그렇게 쳐다보냐멍.”
악마의 눈을 발동하고 루나의 얼굴 위에 뜨는 스테이터스를 유의 깊게 읽자, 내가 빤히 쳐다보는 것 같아서 기분이 나빴나 보다.
“네 얼굴이 예뻐서.”
쿨하게 대답해주자 일그러지는 그녀의 얼굴.
아니 예뻐서 좀 쳐다봤다는데 왜 화를 내는 거지?
“정말 저질이다멍. 여자친구가 있으면서도 대놓고 다른 여자를 넘보는 파렴치한. 역시 인간 남자는 다 똑같다멍.”
이 여자 무슨 피해의식 있나?
그러고 보니깐 상태창에 혐오라고 쓰여 있었다.
그동안의 짬밥으로 알아낸 게 있었는데, 악마의 눈을 발동했을 때 보이는 상태항목은 탐색 당한 사람이 나에게 느끼고 있는 감정이라는 사실이다.
난 루나를 딱 두 번 만났는데 단지 링링을 두고 다른 년에게 눈길 한 번 줬다고 바로 혐오를 때려버린다고?
생각해 보면 난 예전에도 루나에게 악마의 눈을 발동한 적이 있었지.
그때는 분명히 상태창에 슬픔, 절망, 우울 따위의 마이너스한 감정이 적혀있었는데.
지금은 혐오로 바뀌어있네?
“야, 싸우기 전에 하나만 묻자.”
“도축가가 이렇게 말이 많은 남자인 줄은 몰랐다멍.”
비꼬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돌직구를 날렸다.
“왜 나를 혐오하는 거지?”
“그걸 몰라서 물어보는 거냐멍? 링링을 두고 내 몸을 훑는 그 시선을 못 느꼈을 거라 생각하냐멍?”
“단순히 그 이유로 날 혐오한다고?”
아니 시발 쳐다볼 수도 있는 거 아니냐?
여자친구 있으면 다른 여자 쳐다도 못 봐?
그거 가지고 혐오하면 이전세계 지구에서 모든 여자친구는 자기 남자친구를 혐오했어야 해.
말도 안 되는 억지.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거다.
“혹시 그동안 인간에게 하도 당해서 그냥 인간 남자가 싫은 건 아니고?”
움찔
정곡을 찔렀네.
왠지 그럴 것 같더라니.
하긴, 그동안 루나 이 계집이 인간족에게 당했던 걸 생각하면 그럴 만하다.
부족남자들은 모조리 인간 녀석들이 죽였고.
그 죽인 놈들 주동자가 자신을 부인도 아닌 첩 삼으려 하고.
싫다니깐 유리아 황비 도움받아서 겨우 검투장으로 탈출.
그곳에서는 걸핏하면 남자 놈들이 채찍을 때렸으니.
순결만 지키고 있었다뿐이지, 정신은 만신창이겠군.
그래서 인간 남자만 보면 저절로 혐오버튼 발작하는 건가?
사실상 트라우마 느낌의 정신질환 앓고 있는 여자라 보면 되겠다.
올리비아 초창기 때 느낌 나네.
걔도 초반에 내가 예쁘다 어쩌다 했더니 엄청 싫어했잖아.
분명한 건 둘 다 남자를 밀어내는 건 똑같지만, 이유는 반대라는 거다.
올리 같은 경우는 너무 오랜 기간 마녀들 사이에 묻혀 지내다 보니, 남자를 전혀 몰라서 경계하고 거부하는 타입이었고.
반면에 루나의 경우는 남자의 바닥을 너무 많이 봐서 증오에 가까운 거부를 하는 거겠지.
이러니까 나 무슨 심리 분석가 같네.
하지만 여자를 조교하기 위해서 그녀의 심리상태를 파악하는 건 필수.
그래야 1초라도 더 빨리 그녀를 무너트릴 수 있으니까.
지구에서 괜히 수많은 여자를 작업 칠 수 있었던 게 아니다.
웬만한 육체 고문에도 견디던 깡다구 있던 년들.
심리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정신공격에는 버티지 못했다.
내 앞에서 스스로 무릎 꿇고 보지를 벌리며 암컷 행세를 했던 년들의 얼굴이 새록새록 기억나는군.
“무슨 생각을 그리하는 거냐! 이 기분 나쁜 놈!”
아, 맞다.
나 싸우는 중이었지?
내가 탐색하는 척하면서 골똘히 생각에 잠기자, 열 받은 루나가 참지 못하고 먼저 달려들었다.
스팟
루나의 신형이 주욱 늘어나면서 나에게 쇄도한다.
역시 권법가답게 초반부터 거리를 좁히려는 모습.
“루나, 그런데 말이야.”
파아악
나도 마찬가지로 거리를 좁힌다.
고수 간의 싸움은 간격 싸움.
무기를 든 시점에서 사정거리는 내가 더 앞선다.
원래라면 최대한 뒤로 빼면서 몽둥이로 그녀의 접근을 저지하며 야금야금 데미지를 입히는 싸움 방식이 정석일 터.
하지만 상관없지.
난 전투든 섹스든 붙어서 부비적거리는 걸 좋아하거든.
일단 들러붙고 보자.
무기를 들고 오히려 거리를 좁히자, 당연히 루나는 놀랄 수밖에 없다.
“미, 미친놈! 알아서 달려들다니! 기본기도 없는 놈이 어떻게 성녀를 이겼냐멍?”
너무 궁금해하지 마.
이제 곧 몸으로 체득하게 될 테니까.
콰아앙
루나와 내가 격돌하자, 엄청난 굉음이 콜로세움 구역에 울려 퍼졌다.
아마 바깥에서는 축제라서 누가 축포라도 터트렸나 생각하겠지.
신경 쓰지 않고 루나와 공방을 벌였다.
퍽 퍼퍼퍽 퍼퍽
난타전을 벌였다.
나는 몽둥이를 마구 휘둘렀고, 루나는 그런 내 몽둥이세례를 피하면서 카운터치는 식으로 중간중간 빈틈에 정권을 찔러넣었다.
20여 수 정도를 겨룬 결과.
“아오! 제발 좀 맞아라. 커헉!”
“…정말 이상한 놈이다멍! 성녀를 어떻게 이겼는지 이해 안 된다멍!”
일방적인 구타를 당하고 있다.
왜지? 왜일까?
내 도합스텟은 800인데?
쟤는 기껏해야 400대 언저리잖아.
피지컬이 두 배 차이면 지구에서는 50kg대 격투가와 100kg대 격투가의 일대일 대결이나 마찬가지건만.
이걸 지는 게 말이 돼?
왜 나는 유효타가 한 대도 없고 죄다 치명타만 맞고 앉아있는 거지?
퍽
“크허억!”
원래 미녀한테 맞는 주먹은 안 아프다던데.
그건 다 개소리였네.
역시 루나는 괜히 모나스 검투대회 작년 우승자가 아니었다.
최적화된 스킬 분배서부터 민첩하고 빠른 몸놀림, 상대의 힘을 역이용하는 기술, 약점을 찾는 본능까지.
여태까지 싸워왔던 상대들과 비교하는 게 미안할 정도.
장담하건대 내가 출전하지 않았고 한유림이 강신스킬이 없었다면, 올해 검투대회 우승도 당연히 루나의 몫이었을 거다.
팔라딘 요한? 에이스? 경험많은 용병?
좆까라 그러지.
아마 10분 컷 났을 거다.
성녀 한유림도 강신스킬이 사기였던 것이고, 그 스킬없이 붙었으면 나한테도 졌으니 뻔할 뻔 자.
그나마 붙어볼 만한 상대를 골라보자면 필드에서 마법 준비를 완료한 올리비아 정도?
준비된 고대 마녀라면 권사인 루나도 제법 애를 먹었겠지.
예쁜 얼굴을 하고 주먹은 어찌 이리 매서울 수가 있을까?
퍼퍼퍽
복부를 맞고 간신히 숨을 몰아쉬었다.
온몸에 땀이 뚝뚝 흘러서 시야가 흐릿하다.
그 와중에 질린 얼굴로 나를 보는 루나.
눈송이털로 뒤덮인 동물귀가 연신 접혔다 펴지기를 반복하는 거로 보아, 그녀도 상당히 당황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도, 도대체 어떻게 된 몸이냐멍! 카운터를 몇 대를 맞았는데 기절도 하지 않고 멀쩡할 수 있냐멍!”
미안하지만 내 몸이 좀 단단해.
도합스텟 800이니 체력이랑 방어력, 마법저항력은 웬만한 하급 마족 수준.
강신 상태 성녀의 라이트 계열 스킬도 견뎌냈으니 말 다했지.
악마의 눈 같은 탐색스킬이 없는 루나로서는 혼란스러울 만하다.
나름 검투대회 우승자란 놈이 몽둥이를 휘두르는데 딱 봐도 아마추어 수준.
그런 와중에 무슨 수를 썼는지 오러는 또 뿜어내요.
게다가 아무리 유효타를 처맞아도 오뚝이처럼 일어나니, 도대체 이놈 정체가 뭔가 싶을 거다.
“이건 말도 안 된다멍! 대체 레벨이 몇이냐멍!”
“내 레벨이 궁금해? 알려줄까?”
궁금할 만도 하지.
이해한다.
원래 신사의 비밀을 캐는 건 숙녀의 도리가 아니라지만.
너는 예쁘니깐 한 번 보여줄게.
스윽
손가락의 반지를 슬쩍 뺐다.
그러자 레벨가리개가 벗겨지면서 머리 위에 선명히 뜨는 내 레벨.
바로 레벨 1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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