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2화 〉 성녀 한유림이었다
* * *
내 머리 위에 선명히 뜨는 레벨을 보고 순간 링링이가 말을 멈춘다.
“뭐, 뭐냐멍! 지금 나 놀리는 거냐멍!”
공격을 멈춘 루나가 얼빠진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저 여자는 내 레벨이 적어도 45 이상이라 생각하고 있었을 거다.
아무리 격투술이 엉망이어도 어찌 됐든 오러를 뿜어낼 수 있었으니까.
설마 레벨 1이라고는 생각조차 안 했겠지.
“대체 정체가 뭐냐멍!”
“뭐긴 뭐야, 세계 최강 레벨 1이다.”
정확히는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레벨 1 고정 당한 사람이야.
“이건 말도 안 된다멍. 넌 도대체…”
“전투 도중에 말이 많네. 그럼 이번엔 내 차례인가?”
그녀가 당황한 틈을 파고 들어가 쇄도했다.
그러자 일순간 혼란에 잠겼던 루나의 눈빛이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
“뭐가 되었든 상관없다멍! 이긴 다음에 어떻게 된 건지 알아내면 된다멍!”
루나 또한 나에게 달려든다.
다시 시작된 2차전.
하지만 아까와는 조금 다른 양상이 펼쳐졌다.
슈슈슉
악마후보자 스킬 분신술.
어차피 성녀도 아니고 용사도 아닌 루나에게 굳이 후보자 스킬을 아낄 필요는 없잖아?
갑작스럽게 내가 2명으로 늘어나자 기겁하는 루나.
“뭐, 뭐냐멍!”
양쪽에서 똑같이 달려오는 나.
아주 똑같이 생겼다.
구분이 불가능할 정도.
두 명이 달려들자 루나가 피할 수 있는 각이 완벽히 사라진다.
여태까지 그녀가 나를 상대로 엇비슷하게 싸울 수 있었던 건 내 공격을 흘리고 카운터 형식으로 싸움을 끌어왔기 때문.
하지만 둘이 공격하자 그녀가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 사라진 것이다.
“이런 눈속임 따위는 속지 않는다멍! 크앙!”
뭐지?
수인녀 울음소리 귀엽네.
암컷이라 그런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달려들었다.
“어차피 둘 다 진짜일 수 없다멍! 오른쪽이냐멍?”
루나가 번뜩이는 동물적인 육감으로 진짜를 가늠해서 왼쪽은 버리고 오른쪽에 올인했다.
그녀로서는 최선의 선택.
그런데 이걸 어쩌나?
둘 다 진짠데?
퍼어억
결과적으로 그녀가 선택한 건 진짜 내가 맞았다.
그리고 내 공격도 훌륭하게 흘려냈다.
하지만 그럼 뭐해?
내 분신은 실체를 가지고 있는 데다가 스텟도 나랑 똑같다.
정확하게 턱주가리를 맞은 루나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끼이잉!”
암캐 울음소리 듣기 좋구요.
턱주가리 맞으면 루나라고 별 수 있나.
비틀거리던 그녀가 이내 풀썩 쓰러졌다.
“한 번에 기절시킨 게 좀 아쉽긴 하군.”
원래라면 가지고 놀다가 눈높이교육 해주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루나가 너무 잘 싸워서 그게 불가능했다.
다시 깨워서 뭔가를 하기엔 장소가 좋지 않다.
진지한 이야기는 마녀의 숲으로 가서 하자고.
“역시 마왕님 세다멍! 족장이 일대일 지는 걸 본 적 없는데 마왕님한테는 질 것 같다고 생각했다멍!”
두 사람 모두를 곁에서 지켜봤던 링링이도 나의 승리에 한 표를 던졌나 보다.
“링링, 기절한 루나를 업어라.”
“알았다멍.”
그녀를 들쳐업고 이동을 시작했다.
아직 모나스 시티는 한창 축제의 도가니.
우리 같은 대규모 인원이 밤중에 우르르 이동하는데도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결국, 도시 외곽에 도착했다.
경계병이 있으려나?
마나를 집중해 안력을 키우자 약간은 거리가 있던 성문 상황이 훤히 보였다.
“역시나 경계를 서고 있긴 하군요.”
“주인님 어떻게 할까멍?”
마찬가지로 눈이 좋은 셰릴과 링링이 상황파악을 하고 어떻게 할지를 물어온다.
정상적으로 나가려면 복면을 풀고 얼굴을 보여야 하는데.
현재 모나스 시티에서 가장 얼굴 팔린 사람들이 뭉쳐서 나가면 소문이 안 퍼질 수가 없다.
할 수 없네.
그냥 뚫자.
“처리해. 최대한 조용히.”
이제 이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잖아?
“그럼 움직이겠습니다.”
시작은 엘리샤.
원래도 늘 검은 옷을 입고 다니고 은밀한 걸음으로 다니던 그녀가 마치 도마뱀처럼 스르륵 움직였다.
“하아암~졸렵구먼.”
“씨팔, 남들 다 축제 즐기는데 우리는 뭐하는 짓인지.”
문지기들의 일상 대화를 들으니 엘리샤의 접근은 전혀 파악을 못 한 모양.
휘릭 퍽
번개같이 달려들어 구르카의 칼등 부분으로 뒷목을 내려찍는다.
“끄억!”
“누, 누구…억!”
옆에서 놀라서 소리를 치려던 문지기도 에밀리가 빠르게 달려가서 뒤돌려차기로 바로 침묵시켰다.
검만 잘 쓰는 줄 알았더니 체술은 언제 또 저렇게 늘었대?
정말 에밀리 쟤는 볼 때마다 실력이 느는 것 같아.
“저기 위에도 한 명 있어요!”
뒤늦게 성벽 위에 한 명을 파악한 올리비아가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정말이네?
나도 방심해서 위에 있는 놈은 보지 못했다.
밑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조리 지켜본 파수꾼이 황급히 목에 걸고 있는 뿔나팔을 입에 갖다댄다.
“이익!”
저걸 불면 정말 귀찮아진다.
마녀의 숲까지 내내 도망가야 하고, 만약에 도망가더라도 숲에서 또 대규모 전투를 치러야 할지도 모를 일.
“저거 어떻게 안되나?”
내가 직접 움직일까?
민첩스텟 200을 활용해서 폭발적인 가속을 하려는 찰나.
쐐애액
내 옆에서 섬광 같은 속도로 화살이 한 대 날아간다.
정확히 병사의 뿔나팔에 명중하는 화살.
퍼어억
“으허억! 뭐야!”
나이스! 메이가 한 건 해주는구나!
금발머리 하녀가 철궁을 들고 뿔피리를 화살로 부쉈다.
그사이에 빠르게 성벽을 타고 올라간 셰릴.
“사, 살려주세요…”
“잠시 주무시고 계세요.”
퍼억
역시나 뒷목을 쳐서 기절.
이로써 모나스시티 동쪽 문이 완전히 침묵했다.
그나마 축제라서 경계병이 3명밖에 없었나 보네.
평상시에는 20명 이상이 교대 근무를 하고 있다고 매튜한테 주워들어서 알고 있었다.
어찌 되었든 잘 통과했으니 더는 신경 쓸 필요 없지.
“성벽을 타고 넘자.”
“네, 주인님.”
모두가 고렙 전투원이기에 굳이 성문을 여는 수고 없이 마나를 발에 휘감고 벽을 넘었다.
턱 터억
“…서방님, 안 넘어오세요?”
이미 다 넘어왔는데 나만 넘어가지 않자 저 너머에서 메이의 의아한 목소리가 들렸다.
“인제 가려고.”
발에 힘을 줬다.
콰지직
천근추의 수법처럼 몸이 무거워지면서 자연스럽게 바닥에 금이 가며 발이 땅에 박혔다.
그 상태로 타이밍 맞춰 다리를 쭉 뻗자 발생하는 무지막지한 반탄력으로 튀어 오른다.
터어엉
총알처럼 하늘로 솟았다.
순간적으로 모나스 성벽이 작게 보였다.
공중에 20m 이상 뜬 거다.
콰아앙
땅에 떨어졌더니 무슨 포탄 터지는 소리가 났다.
그와 함께 퍼지는 자욱한 연기.
그곳을 뚫고 내가 나왔다.
마나 없이 순수하게 육체 힘으로만 성벽을 한 번에 뛰어넘은 것이다.
“역시 서방님 괴물이다멍!”
“이쯤 되면 인간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마족이신데 유희생활 나온 겁니까?”
“인간 맞아.”
누누이 말하지만 레벨 1 인간이란다.
질린 표정으로 나를 본 여인들에게 쿨하게 대답해주고 계속해서 이동했다.
이동은 순조로웠다.
이대로 가면 별다른 일 없이 마녀의 숲으로 도달하지도?
뒷일은 현무단주 매튜에게 맡겨놓았으니 걱정 없겠고.
웬일로 스무스하게 넘어가는구만.
“거기! 멈춰라! 당장 멈춰!”
역시 그럴 리가 없지.
추격자가 따라붙었다.
그런데 우리를 추격할만한 사람이 누가 있지?
아무리 생각해도 없는데.
그나마 가능성 있는 건 매튜가 죽음을 각오하고 모든 걸 폭로했다는 것 정도?
만약에 그랬다면 고독을 죽지 않을 정도로만 적당히 한 3년 정도만 흔들어줄 생각이다.
“또 산적 무리인가 봅니다. 처리하겠습니다.”
“…잠시만, 저들은 산적 따위가 아니야.”
뭔가 오싹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피부가 따끔따끔하고.
저쪽에서 누군가 나에게 살기를 쏘아보내고 있다고 육감이 경고를 보내온다.
다그닥 다그닥
상당히 멀리서 우리에게 소리를 친 것이었나?
오는 데도 한참이다.
“주인님? 이대로 달려서 따돌리시죠.”
“아냐, 전원 말을 타고 있어.”
발에 마나를 감아서 뛴다고 능사가 아니다.
경공술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마나를 기름처럼 사용하는 자동차라고 보면 된다.
저들은 말을 타고 여기까지 왔기에 마나를 아낀 상태.
이대로 경공술을 사용하면서 도주한다면 저쪽도 마찬가지로 말에서 내려 발에 마나를 감고 쫓아오겠지.
추격전이 벌어지면 기름이 떨어져서 먼저 정차해야 하는 건 우리다.
물론 저쪽이 똥차거나 자전거 수준이면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거리를 벌리면 되겠지만.
저 멀리서 나를 긴장시킬 정도의 살기를 쏠 정도 녀석이면 최소 람보르기니나 포르쉐급이다.
절대 못 따돌려.
난 도망칠 수 있어도 적어도 내 여자 중 몇 명은 잡힌다.
“전원 전투준비. 여기서 잡고 가야 해.”
장소는 모나스 시티에서 한참 벗어난 시골.
여기서 무슨 싸움이 일어나도 잘 모를 것이다.
아마도 우리를 추격하는 의문의 세력 또한 그걸 노리고 이쯤에서 존재감을 드러낸 게 아닐까 생각되는데.
남들 모르게 은밀하게 추격을 했다는 점에서 더 구리구리한 냄새가 나는 녀석들이다.
“긴장해. 만만치 않은 녀석들이다.”
“…알겠습니다.”
내가 이 정도로 긴장하는 걸 처음 봐서인가?
다들 진지한 표정으로 진형을 갖추었다.
메이는 활시위에 화살을 걸었으며,
셰릴은 레이피어로 전방을 겨누었고,
올리비아는 입으로 끊임없이 마법 주문을 중얼거렸다.
엘리샤는 내 옆에 딱 붙어서 스산한 눈빛으로 살기를 뿌렸고,
링링은 주먹을 들고 앞에 보이는 뿌연 먼지를 노려보았으며,
소피아는 커다란 화구(火?)를 양손에 띄워놓은 상태.
마지막으로 에밀리는 기절한 루나 옆에서 검을 들고 그녀를 지키는 자세를 취했다.
한 명이 빠졌는데? 누구였더라?
“여보…저는 뭘 해야 할까요?”
아, 맞다. 클레어였구나.
전투는 무서웠는지 창백한 표정으로 덜덜 떠는 G컵의 유부녀.
이 급박한 상황에도 난 그녀의 출렁거리는 젖통에 시선이 사로잡힌다.
“일단 올리비아 옆에 있어.”
올리가 우리 중에서는 나름 고렙이니 잘 지켜주겠지.
요년은 나중에 마녀의 숲에서 레벨업 시켜서 뭐라도 쓸모 있게 만들어놔야겠다.
다그닥 다그닥
히이이잉
드디어 기마대가 우리의 눈앞에 도착했다.
우리가 진형을 갖추고 기다리고 있어서일까?
선두에 선 남자가 다소 놀랐는지 몸을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내 냉기를 풀풀 풍기는 사내.
투구를 쓴 채 바이저를 내려서 솔직히 누군지 파악이 안 된다.
그냥 존나 세다는 것만 느껴질 뿐.
“헬로우?”
일단 형식적인 인사를 건네보았다.
뭐하는 놈인지 좀 알아보자고.
“뭐라는 거야?”
“너야말로 무슨 일로 우리를 쫓아온 거냐? 내 여자들 예뻐서 보지 한 번 먹어보려고 온 거야?”
내 저렴한 말에 옆에 서 있던 여자들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주, 주인님. 그런 말은 좀…”
“부끄러워요, 마스터.”
“맞다멍! 서방님 그런 말은 좀 고칠 필요가 있다멍!”
이 여자들 봐라?
섹스할 때는 제발 구멍에 좆 좀 넣어달라고 애걸하면서 여기서는 시치미를 뚝 뗀다고?
뭐, 남들 앞에서까지 헤픈 여자처럼 보이지 않으려는 그 마음 이해하마.
“그 더러운 말을 들으니 제대로 쫓아왔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어라?
엄청 강해 보이는 놈 옆에 꽤 강해 보이는 놈은 여자였나 보다.
갑옷을 풀장착해서 그저 체구 좀 작은 남자인 줄 알았건만.
그런데 목소리가 왠지 좀 익숙한데?
스윽
말 위에서 투구를 벗는 여자.
투구가 벗겨지면서 비단같이 고운 흑단 머리가 바람에 나풀거린다.
정체가 드러났다.
그녀는 바로…성녀 한유림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