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3화 〉 지금까지 튜토리얼
* * *
성녀였구나.
이러면 옆에 있는 남자가 누군지 바로 유추할 수 있다.
스윽
역시나 투구를 벗자 그 안에는 익숙한 얼굴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용사와 성녀님께서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왜 왔는지는 알 것 같지만.
일단은 예의상 물어본다.
“데이몬, 너야말로 왜 이 야밤에 몰래 도시를 빠져나간 것이지?”
날 추궁하려는 건가?
대답할 말은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다.
“몰래라니요. 현무단장님이 급한 일로 저희를 차출시켜 외부임무를 보낸 것입니다.”
내 상사가 보냈다는데 어쩌려고?
네가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예전부터 4대 검투단 소속 검투사는 간간이 외부임무 때문에 나간 이력이 있다.
무엇보다 메튜는 직급은 내 상사지만 실제론 권속이니 내가 원하는 대로 대답해주는 꼭두각시.
적어도 지금 시점에서 이상철이 명분을 내세워서 나를 몰아세우거나 조종하려들 수는 없다.
“당당하게 나가려는 사람이 경비병을 모두 제압하고 나가나?”
“괜한 소문이 퍼질까 봐 그런 겁니다. 아시다시피 저희는 지금 도시에 온갖 소문을 몰고 다니는 집단 아닙니까?”
경비병 안 죽여서 다행이다.
죽이고 나갔으면 이런 변명도 안 통했을 텐데.
기절만 시켜놨으니 대충 둘러대기 편하다.
“검투사 데이몬의 말이 맞습니다.”
옆에 나선 클레어와 소피아도 지원사격을 해주었다.
아무래도 이들은 현무단주의 공식적인 아내들이니 말에 훨씬 무게가 있음이 사실이다.
“모두 설명할 수 있는 절차로 나가는 것이니 이제 비켜주시지요.”
“맞아요. 저희야말로 이런 야심한 시각에 뒤에 기마대를 이끌고 저희를 쫓아온 연유가 궁금한 걸요?”
클레어와 소피아가 번갈아 가며 적절하게 대답하고 오히려 용사에게 역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럴 만도 한 것이, 현재 용사와 성녀의 뒤에 중무장하고 거대 전투마에 타고 있는 인원만 대충 봐도 30명 정도.
레벨가리개를 껴서 확실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레벨 30대 초반에서 후반 사이의 익스퍼트급 고수들인 것 같다.
그런데 주작단 쪽 검투사들은 아닌 것 같은데?
전에 아룬마을에서 만났던 현무단 검투사들은 무장이 다양했는데.
눈앞의 의문의 기마대들은 무장이 거의 비슷하다.
주로 방패와 메이스 위주의 무장.
게다가 이 잠깐의 대화 중에도 오와 열을 습관적으로 맞추고 가지런히 정렬한 점으로 미루어 짐작해보면…
“홀리엔 법국 쪽 전투사제님들이시군요.”
움찔
뭘 그렇게들 놀라시나?
정곡을 찔렀나 보네.
복면으로 얼굴 가린다고 다가 아니라고.
“용사님, 대답해 주시지요. 저희를 이토록 맹렬하게 쫓아오신 이유는요?”
이제는 내 질문타임이다.
너 왜 왔냐? 상철아.
단도직입적인 질문.
그러자 용사는 볼을 긁적이며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연다.
“현재 천신의 눈물은 어디에 있지?”
아하? 그게 문제였구나?
검투대회 우승상품 천신의 눈물.
원래는 자기 거라고 하더니만.
설마 그것 때문에 이 군대를 끌고 온 거야?
“천신의 눈물은 저에게 없습니다. 모나스 시티에 있는 현무단주에게 있지요.”
“거짓말하지 마라.”
아니, 속고만 사셨나?
왜 사람 말을 못 믿을까?
물론 거짓말이긴 하다.
감이 좋은걸?
“정말입니다. 일개 검투사인 제가 검투대회 우승상품을 어찌 가지고 있다는 겁니까?”
“어차피 누구에게 있든 상관없다. 그쪽으로도 병력을 보내놨으니.”
그 말은 매튜네 집도 지금 불청객의 방문을 받고 있다는 거네.
그쪽에는 딱히 수비병력이 없으니 매튜는 단번에 사로잡혔겠군.
“올리비아.”
“네.”
“고독충을 터트려라.”
“존명.”
매튜를 정보원으로 두고두고 써먹으려고 했는데 조금 아쉽게 되었다.
괜히 법국 놈들에게 잡혀서 고문당하다가 천신의 눈물 행방 말고도 쓸데없는 말을 할 수 있으니 이쯤에서 꼬리를 잘라버린다.
화르륵
올리비아가 고독충이 든 유리병 자체를 화염마법으로 깔끔하게 지워버렸다.
아디오스, 매튜.
덕분에 잘 놀다 갑니다.
네 아내였던 클레어의 보지는 내가 잘 써주마.
자궁에서 내 아이도 뽑아낼 테니 하늘에서 잘 지켜보도록.
이렇게 정보원 하나를 잘라냈다.
심기가 조금 불편한걸?
용사와 성녀에 대한 적개심이 모락모락 피어난다.
“용사님, 솔직히 당황스럽군요. 설마 천신의 눈물이 탐나셔서 저희를 쫓아오신 겁니까? 마치 강도처럼 보물을 강탈하시려고요?”
내 말에 용사의 얼굴이 급격하게 붉어진다.
그러니까 본인도 쪽팔린 건 알고 있었네?
“그건 애초에 우리 물건이었다! 오히려 강도는 너희지!”
“애초에 저희 현무단은 정정당당히 대회를 통해서 천신의 눈물을 얻어냈습니다. 같은 대회에 참가해놓고 우승자의 상품이 원래 본인 물건이라고 우기는 자신의 꼴이 우습지도 않습니까?”
이 정도면 뼈 때린 거 맞지?
역시나 용사가 대답할 말이 궁해졌는지 말도 하지 못한다.
그때, 그런 용사의 옆에서 지원 사격이 들어온다.
“이유는 그것 말고도 또 있어요.”
이번엔 유림이 너냐?
할 말이 없어서 어버버대는 용사 옆에 있던 성녀가 앞으로 나서며 앙칼진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당신은 검투대회에서 감히 법국의 재산이자 72대천사님의 분신인 고귀한 성녀의 옷을 찢었으며, 천박한 그…말도 안 되는 성기를 저에게 보였죠. 그것만으로도 이미 중죄입니다.”
큭큭큭.
내 흑염룡이 말도 안 되는 수준이긴 하지.
칭찬 고맙다.
“그건 모나스 검투장의 전통적인 룰에 따른 것 아닙니까? 승자독식, 패자유린도 모르시고 검투대회에 참가하셨던 건 아니시겠지요.”
“닥치세요! 어찌 되었든 제 몸은 소중합니다! 귀족조차 아닌 평민 놈들에게 함부로 보일 몸이 아니었단 말이야!”
여기서 아몰랑 아무튼 너 싫어를 시전하시네?
분명 모든 행동에 이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성녀는 선민의식에 사로잡혀서 본인을 보통 인간과는 다른 특별한 여자라고 생각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는 똑같이 젖통 두 개 보지 하나 달린 계집으로 보이는데 말이야.
“그래서 어찌하겠다는 겁니까? 설마 저희를 잡아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겁니까?”
“필요하다면 그리해야겠지요.”
이제는 딱히 적의를 숨기지도 않는다.
야밤에 상당한 규모의 기마대를 끌고 온 거로 봐서는 천신의 눈물을 검투대회 우승과 관계없이 힘으로라도 뺏을 생각이었나 보네.
그 와중에 우리가 몰래 성을 나가는 모습을 포착했고.
혹여라도 눈앞에서 천신의 눈물을 놓칠까 봐 여기까지 따라온 건가?
겸사겸사 자신을 능욕한 나에게 복수도 할 겸?
“그러게 왜 좋은 말로 할 때 기권하지 않은 겁니까? 일을 번거롭게 만들었어요.”
여유를 찾은 한유림이 입꼬리를 살며시 올린다.
어차피 어망 속의 물고기, 독 안의 든 쥐라는 건가.
“이게 판타지아 대륙 만인의 존경을 받던 용사와 성녀의 참모습이었군요. 정말 실망입니다.”
“상관없습니다. 당신같이 천한 놈이 저를 어찌 생각하든지요.”
성녀 요년은 진짜 오만함의 끝판왕이었구나.
겉으로는 성스럽고 겸손하고 착한 척하면서 속으로는 나는 근본적으로 너희와 다르다고 생각하는 년이라니.
앞과 뒤가 다른 여자를 보니깐 갑자기 작업 마렵네.
하지만 지금은 섣불리 덤빌 때가 아니다.
이렇게 의도적으로 저들에게 말을 걸었던 이유도 대화하는 동안 작전을 짤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레벨 30대의 철갑 기마대 30명.
내 여자들 레벨이 4, 50대에 육박한다 해도 쉽지 않다.
루나가 기절해있는 상황에서 우리 인원은 10명도 채 되지 않는 상황.
낙관적으로 생각해도 1대 3의 싸움이다.
게다가 클레어는 전투 능력도 없고.
저들을 모두 제압한다 해도 내 여자 한 명이나 둘이 죽으면 결국 손해지 않은가.
게다가 가장 큰 문제는 용사와 성녀다.
이 연놈들이 끼어드는 순간, 내 여자 중에 사망자는 분명히 나온다.
그건 안 된다.
어떻게 훈련하고 조련시킨 암컷들인데.
나랑 눈만 마주쳐도 보지 촉촉하게 적시면서 가랑이 벌려주는 여자들.
갈 때 가더라도 내 애 하나 정도는 낳고 가줘야지.
“메이.”
“네, 주인님.”
역시 중요한 순간에는 내 첫째 부인 메이를 부른다.
“너를 임시부대장으로 임명한다. 최대한 사망자, 부상자가 나오지 않도록 시간을 끌어라.”
“네? 그러면 주인님은요?”
내가 있는데 왜 자기가 부대장이냐 이거지.
왜냐하면, 내가 곧 없을 예정이거든.
스윽
외투 안쪽 속주머니에서 반짝이는 유리병을 꺼냈다.
황금빛 물결이 넘실대는 액체가 담긴 유리병.
누가 보아도 천신의 눈물이었다.
“역시 당신에게 있었군요!”
“이럴 줄 알았다! 이 간악한 도축가 놈!”
내가 우승 상품을 가지고 있는 게 왜 욕먹을 일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그래, 천신의 눈물은 나 데이몬에게 있다. 그러면…나 잡아봐라!”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쳤다.
콰아앙
엄청난 굉음이 울려 퍼졌다.
무릎을 굽히고 마나를 다리에 두른 후, 민첩스텟 200을 풀로 활용하여 총알처럼 쏘아져 나가자, 땅이 버티지 못하고 폭탄 터지는 소리를 낸 것이다.
“저, 저놈 잡아라!”
눈앞에 천신의 눈물을 보여주고 도망쳤으니 누굴 쫓아가야 할지는 명확해진 셈.
용사와 성녀, 그리고 기마대가 나를 쫓아가려는 순간이었다.
쐐애액
까앙
“끄어억!”
“히이이잉!”
말 위에 서 있던 기마무사 한 명에게 마나가 실린 애로우가 쏘아졌다.
훈련이 잘된 병사였는지 방패에 마나를 두르고 반사적으로 막긴 했지만, 낙마는 피할 수 없었다.
“어딜 데이몬에게 가려는 거냐! 허락하지 못한다.”
내 여자들이 이를 악물고 결사항전을 다짐하며 발목을 붙잡기 시작했다.
“파이어 볼!”
“스템 바인드!”
올리비아가 나무줄기를 소환해 말의 다리를 묶었으며.
소피아가 추격경로에 연신 화염구를 때려 넣었다.
“하아앗! 대쉬 소드!”
“크아앙! 서방님한테는 못간다멍!”
“…백화일검.”
셰릴의 레이피어가 재빠르게 늘어나며 상대를 향해 쇄도했고.
링링이 짐승의 포효를 내질렀으며.
에밀리의 검에서 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짜악 짜악
“일어나주세요…루나님.”
클레어는 연신 기절해있는 루나의 뺨을 쳐서 깨운다.
그래, 저렇게 강한 애가 이런 중요한 순간에 기절하면 얼마나 손해냐?
빨리 좀 깨워라. 클레어야.
그리고 그런 클레어와 루나를 엘리샤가 그림자처럼 따라붙어 구르카를 들고 호위한다.
상황이 이러니, 기마대도 도망친 나를 무턱대고 쫓기가 힘들어졌다.
어떤 식으로든 내 여자들을 정리하고 가야 한다.
“…여러분들은 저 발칙한 년들을 잡으세요. 기왕이면 사로잡되, 죽여도 상관없습니다.”
“신의 뜻대로!”
잔뜩 성이 난 성기사들이 이내 말의 방향을 내 여자들 쪽으로 돌린다.
그리고 남은 건 용사와 성녀.
“어서 쫓아가자. 이대로라면 놓칠지도 몰라.”
용사와 성녀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나를 쫓아오기 시작했다.
눈치 빠른 내 여자들은 저 둘만큼은 막지 않았다.
내가 일부러 저 둘 때문에 도망쳤다는 걸 알았기에.
“이러면 1차 작전은 성공인가?”
용사와 성녀를 내 여자들에게서 떼어내겠다는 의도는 성공했다.
어차피 저 여자들을 다 죽여도 천신의 눈물을 가진 나를 놓치면 말짱 도루묵이니 최고전력 둘이 나를 쫓을 수밖에 없겠지.
“거기 안 서?”
“너 같으면 서겠냐? 에베베!”
혀를 내밀고 약을 올리면서 달리자 저들의 속도가 더 빨라진다.
파파팍 파파파팍
이 정도면 거의 스포츠카 수준인데?
내가 생각해도 내 속도가 경이롭다.
문제라면 저들과 내 거리가 멀어지지 않는다랄까?
분명 전력을 다해서 뛰고 있는데 무슨 수를 썼는지 용사와 성녀도 곧잘 나를 따라온다.
탓
도망을 멈추었다.
더 달리는 건 의미가 없다.
이미 내 여자들과 전투사제가 싸우는 곳에서부터 한참 떨어졌다.
내가 멈추자 저들도 따라 멈추었다.
휘이잉
싸늘한 바람이 황야에 우두커니 서 있는 우리 셋을 휘감는다.
오랜만에 이전 세계 지구의 인연들이 한 데 모였구나.
예전에는 이렇게 셋이서 곧잘 저녁 식사를 같이하곤 했는데.
갑자기 추억 돋네.
그때와 달라진 점은 저 둘이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다는 것 정도?
그들에게서 나를 향한 부정적인 감정들이 느껴진다.
무척이나 익숙하다.
이전 세계 송길준 때부터 데이몬이 된 지금까지 나에게는 늘 저런 식의 감정이 따라다녔으니까.
하지만 난 그러한 감정에 먹히지 않았다.
포기하지 않았고 투덜대지 않았다.
모조리 내면에서 승화시켜 손아귀에 넣고 휘두르면서 이 자리까지 왔을 뿐.
어찌 보면 용사와 성녀와 마주한 바로 이 순간이 내가 여태까지 살아온 삶의 결과물이자, 판타지아 대륙에서 최후의 악인이 되기 위한 1탄일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지금까지는 모두 튜토리얼이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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