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4화 〉 오랜만에 육각링
* * *
자, 감상적인 이야기는 이쯤하고.
이제는 성녀와 용사와 진득한 대화를 해야할 차례.
“데이몬, 난 처음부터 네가 마음에 안 들었다.”
용사 이상철의 말이었다.
“이유는?”
이제 본모습이 까발려졌으니, 딱히 존댓말을 쓸 필요도 없다.
“너만 보면 이전세계의 빌어먹을 놈이 떠오르거든.”
큭큭큭.
그 빌어먹을 놈이 누군지 알 것 같습니다만.
일단은 모르쇠로 일관해주자.
“이전 세계? 그게 무슨 소리지?”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튼 넌 마음에 들지 않아.”
역시나 처음 보는 데이몬이란 시골 귀족의 몸에 예전의 인연 송길준이 들어갔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는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천신의 눈물을 넘겨라. 그러면 팔 하나 정도로 자르고 봐주지.”
“용사님, 그게 무슨 소리죠? 팔 하나로는 안 돼요. 저놈은 날 보고 그…걸 세웠다고요.”
옆에 있던 한유림이 펄쩍 뛰며 반대했다.
그 와중에 내 우람한 거시기를 차마 지칭하지 못하겠는지 말을 더듬는 그녀.
생각해 보면 그녀가 검투장 때처럼 남자의 물건을 볼 일이 있었을까?
적어도 성녀가 된 이후로 자신의 알몸을 보며 욕정한 자지는 처음 봤을 거다.
그만큼 그녀에게는 당시의 일이 큰 충격이자 자존심의 스크래치로 남았겠지.
“전 그 정도로는 만족하지 못하겠네요. 최소한 저놈을 법국으로 데리고 가서 혀를 자른 뒤 제가 타는 마차의 말 대신으로 써야겠어요.”
곁에 둔 뒤 두고두고 부려 먹겠다는 말을 아주 천박하게 하시네.
상식적으로 사람을 말로 쓴다는 게 72대천사의 현신이라는 여자의 입에서 나올 말인가?
내가 볼 때는 판타지아 대륙의 천사와 악마 개념은 어딘가 뒤틀려 있다.
“데이몬, 들었나? 목숨이라도 건지고 싶으면 쓸데없는 저항은 말아라.”
한유림이 반대하자, 이상철도 처음에는 팔 한 짝만 자르겠다는 말에서 목숨만 살려주겠다는 말로 선회했다.
이렇게까지 나를 배려해주니 나도 선의의 대답을 해줘야겠군.
“지랄하네.”
“…뭐?”
“지랄한다고.”
내 말에 순간 멍해진 두 남녀.
맨날 주변에서 우쭈쭈 당했더니만 이런 도발적인 말을 처음 듣나?
그러면 다시 한 번 말해줘야겠군.
“여자만 보면 정신 못 차리는 찌질이랑 천사 이름 파는 창녀 주제에 뭐가 그리 잘났나?”
“너…너!”
“내 말 아직 안 끝났어. 너희가 용사랑 성녀면 다야? 야밤에 이런 짓 하는 걸 다른 사람이 보면 차라리 나를 용사로 생각했으면 생각했지, 너희는 그냥 강도라 생각할 거다.”
이 말이 맞다.
나는 겉으로 보기엔 법을 어긴 것이 없다.
비록 마녀랑 다니고 검투단을 습격해서 사람을 죽이고 노예를 빼돌리고 탈주 중이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같잖은 여유 그만 부리고. 그냥 덤벼. 왜 이렇게 혓바닥이 길어?”
S급 도발.
이 이상의 도발은 없다.
그리고 용사와 성녀도 이미 눈이 회까닥 돌아버렸다.
“이런 개 같은 놈!”
스르릉
용사가 검을 뽑자 눈부신 광휘가 터져 나오며 어둠으로 뒤덮인 황야가 순간적으로 밝아졌다.
성검 제트칼리버.
뭔가 제트 대신 엑스가 들어가야 할 것 같지만, 그러려니 하자고.
아무튼, 딱봐도 엄청난 명검을 뽑은 용사의 몸이 서서히 커지면서 등 뒤에 천사의 날개가 형성된다.
“뭐야, 너도 강신 스킬이 있었던 거냐?”
“당연한 것 아닌가. 용사와 성녀가 괜히 대천사의 현신으로 불리는 게 아니다. 물론 인제 와서 무릎을 꿇는다고 봐주지 않는다.”
제기랄.
조금 일이 꼬였는걸.
그렇지 않아도 성녀의 강신이 상대하기 까다롭다고 생각했는데.
용사의 강신은 성녀보다 더 강할 테니 만만치 않은 전투가 될 것 같다.
“분신술.”
슈슉
일단 따지지도 않고 분신술을 사용했다.
지금 상황에서 후보자 스킬을 아끼는 건 바보짓이니까.
당연히 분신의 개수는 1개.
저런 강자들을 상대로 스텟 깎이고 숫자만 많은 분신은 의미가 없다.
나와 스텟이 똑같은 분신 하나만 딱 소환한다.
용사가 내가 소환한 분신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뭔가 한 수를 숨기고 있긴 했군. 분신술인가?”
역시 지구에서의 기억이 있는 놈이라서 이게 분신술인지 바로 알아본다.
바로 다음 탐색 스킬을 사용한다.
악마의 눈 발동!!
스팟
상태창
이름: 이상철
칭호: 72대천사의 현신, 환생자(기억보존)
직업: 용사
LEVEL: 65
힘: 420(210) 민첩: 420(210) 지력: 20(10) 행운: 60(30)
보너스 스탯: 0
카르마 수치: 550
스킬: 강신, 불굴의 의지, 용사검법
상태: 분노, 강신상태
어…어라?
얘 스텟 왜 이래?
도합스텟 800 이상?
여태까지 강신이 뭔가 했었다.
하지만 스텟창을 보니 확실히 알겠다.
강신 상태에서는 스텟이 두 배 뻥튀기되는 건가 보다.
일단 용사의 레벨이 60이 넘을 거라는 건 짐작하고 있었다.
과거 검투장에서 유림이 보지를 따먹으려고 했을 때, 상철이 녀석이 인지하지 못할 정도의 빠르기로 내 목에 검을 갖다 댔었거든.
비록 방심한 상태였고 눈앞에 성녀보지 밖에 보이지 않았다고는 하나, 어중이떠중이라면 내 목에 칼을 들이대기 전에 이미 눈치채고 피한다.
60레벨 이상이면 그랜드 마스터를 넘어서 히어로 레벨.
과연 용사는 용사군.
무엇보다 저 괴랄한 스텟을 보아라.
평상시라면 도합스텟 400대 초반 언저리.
반면에 내 스텟은 카르마로 비정상적으로 뻥튀기 되어서 800 언저리니깐 솔직히 할만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내 계산 미스다.
바로 옆에 있는 성녀에게도 악마의 눈을 사용했다.
스팟
상태창
이름: 한유림
칭호: 72대천사의 현신, 환생자(기억삭제)
직업: 성녀
LEVEL: 60
힘: 20(10) 민첩: 20(10) 지력: 620(320) 행운: 140(70)
보너스 스탯: 0
카르마 수치: 20
스킬: 강신, 라이트 계열 마법
상태: 분노, 강신상태
오우야.
성녀도 알고는 있었지만 도합스텟 800이네.
원래라면 400인데 강신으로 800까지 늘린 건가.
“으응? 어디서 악마의 냄새가 나는걸?”
역시 용사와 성녀인가?
악마후보자 스킬을 쓰니 바로 뭔가 이상함을 감지하고 코를 킁킁댄다.
다행인 건지는 몰라도 탐지계열 스킬은 소량의 악마력만 사용하기 때문에 들통 나지는 않았다.
“아무튼, 너의 그 잔재주도 우리 앞에서는 의미 없다.”
“용사님, 그래도 조심하세요. 저놈에게는 신성력을 제한할 수 있는 뭔가가 있을지도 몰라요.”
아하.
얘내들이 강신만 해놓고 왜 간을 보나 했더니.
전에 올리비아가 설치해준 대 신성력 제한 마법진이 마음에 걸렸구나?
물론 지금의 나는 그런 수를 준비하지 못했다.
한마디로 지금 판타지아 대륙에 온 이래로 가장 큰 위기라 볼 수 있겠다.
“괜찮아, 신성력이 제한당해도 내 검술로 찍어누르면 된다. 그리고 분신이라는 건 어차피 가짜는 진짜에 비해 약하기 마련. 동시에 치면 저 녀석도 별수 없어.”
미안하지만 분신은 나랑 똑같은 능력을 갖추고 있단다.
루나도 저거에 당했는데 너도 결국 똑같이 사고하는구나.
하지만 다른 점은 루나는 2대1로 다구리 맞았고 이쪽은 애초에 적이 2명이라는 점?
숫자의 우세를 점할 수 없다는 말이다.
결국 나와 용사, 그리고 내 분신과 성녀 간의 1대1 매치가 시작되었다.
“죽어라! 데이몬!”
촤아압
용사의 신형이 주르륵 늘어났다.
잔상이 뒤에 생기면서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내 앞에 도달한다.
그의 민첩과 힘스텟은 나보다 압도적으로 높다.
그동안 스텟으로 찍어눌러서 내 부실한 전투스킬을 커버해왔는데 이번만큼은 그것이 통하지 않는다.
후우웅
“흐앗!”
고개를 숙이자 서늘한 광검이 내 머리를 스친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여서 살았다.
아마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그대로 두개골이 가루가 되었으리라.
“시발! 존나 무섭네.”
“…그게 도축가라 불리는 네 진면목이었는가? 스텟만 높지 싸움 줄 전혀 모르는 놈이군.”
역시 용사는 한 번의 움직임으로 내 밑천을 모조리 파악해 버렸다.
“개 같은 놈! 아직 안 끝났어!”
파악
그래도 나름 지구에서 아마추어 복싱 선수였다고.
빠르게 복싱스텝으로 파고들어 잽을 날렸다.
그런 날 보고 피식 웃는 용사.
“지금 장난하냐?”
쩌어엉
머리가 어질했다.
순간적으로 시야에 잡힌 용사가 두 개로 늘어났다가 다시 합쳐졌다.
다리에 중심이 잘 잡히지 않는다.
저 칼자루 부분에 관자놀이를 가격당한 것이다.
“그래도 몸은 튼튼하네. 강신한 상태로 정통으로 일격이 들어갔는데 버텨내다니.”
용사의 목소리에는 여유가 가득했다.
반면에 나는 방금 입은 부상을 추스르기도 바빴다.
이대로 가면 안 돼.
어떻게든 뭐라도 하자.
“어디서 여유질이야!”
“쯧쯧, 이미 한 번 손해를 봤으면서 그걸 메꾸겠다고 무리하게 들어오는 거냐.”
퍼억
다리에 격렬한 통증.
내가 멧돼지처럼 달려들자 슬쩍 옆으로 피한 용사가 내 허벅지를 돌려차기로 깐 거다.
“아으윽.”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그대로 주저앉았다.
중심을 잃은 것이다.
그런 나를 보며 용사가 칼날을 질질 땅에 끌면서 다가온다.
“도대체 너는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스텟을 얻을 수 있었을까? 어디서 마공서라도 받았어? 아니면 의문의 지하조직으로부터 인체개조라도 받은 거야?”
혼잣말하며 발길질을 한다.
피하려고 했지만, 중심이 무너져서 주저앉은 상태에서는 불가능했다.
바로 얼굴을 정통으로 얻어맞고 10m 이상 날아갔다.
콰앙
“커억, 쿨럭쿨럭.”
입술이 완전히 터졌는지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제기랄.
저 강신 상태만 어떻게 해도 해볼 만 할 텐데.
그러면서 옆을 슬쩍 보았다.
펑 퍼어엉
“정말 쥐새끼처럼 피하는군요. 하지만 언제까지 피할 수 있을 것 같나요?”
성녀와 내 분신의 전투.
예상대로 한유림이 압도적으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사실 검투대회 때도 신성력 제한 마법진이 아니었으면 불리한 전투였다.
“어서 그 얍삽한 수를 다시 꺼내보시죠. 그걸 대비해서 일부러 아이템까지 끼고 왔으니깐요.”
어차피 쓰고 싶어도 못 쓴다 이년아.
아무튼, 분신이 성녀를 이기기는커녕 시간이라도 끌어주면 다행인 걸 확인했다.
“어딜 보는 거냐! 나한테 집중해라!”
퍼억
복부에 정확히 들어간 용사의 발길질에 다시 한 번 바닥에 꼴사납게 구른다.
나려타곤이라고 했던가.
무협지에서 옷이 더럽혀지는 걸 아랑곳하지 않고 개처럼 굴러서 상대의 공격을 회피하는 걸 그리 부르던데.
방금 같은 경우는 적에게 맞아서 자의가 아닌 타의로 굴렀으니 더 창피한 셈이다.
“정말 실망이다. 난 이거보단 더 격렬한 전투가 될 거로 생각했어. 이런 허섭스레기 같은 놈이 그동안 검투대회에서 분탕질을 치고 천신의 눈물을 가져가다니.”
용사가 나를 비웃는 와중에도 끙끙대며 머리를 굴렸다.
이길 방법이 있나?
일단 육탄전은 전혀 답이 없다.
저놈이 지금 나를 농락하려고 일부러 검을 쓰지 않는 거지.
끝내려고 하면 진작에 끝냈어.
할 수 없다.
이 수는 기왕이면 최대한 숨기려고 했는데.
일대일 한정 개사기 스킬 또 꺼내야겠네.
바로 진실의 방.
그동안 용사의 공격을 당해준 것은 정말로 그의 공격이 빠르고 매서워서 못 피한 것도 있지만, 이 스킬을 사용하려고 그를 방심시키려는 의도도 있었다.
어쨌든 용사는 천사의 현신이니 악마후보자 스킬을 방어하는 무언가의 수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캭, 퉤! 그럼 잘 가라. 만나서 더러웠고 다시는 보지 말자.”
용사가 땅에 침을 뱉고 마무리를 하려고 두 손으로 빛나는 검을 들어 올렸다.
검에서 너무 빛이 나서 순간 눈이 부신다.
“죽어!”
검이 내려치는 순간.
지금이 바로 적기다.
눈을 번뜩이며 스킬을 사용한다.
“진실의 방 발동!”
스팟
역시나 방어하지 못했다.
그렇게 나와 이상철은 오랜만에 육각링에 입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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