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5화 〉 내가 이길 거야
* * *
오랜만에 진실의 방에 입장하니 감회가 새롭다.
이곳에서 많은 역사가 이루어졌지.
셰릴의 손발목을 꺾어 암컷타락시키며 놀았던 기억이 머릿속을 선명히 떠돌고 있다.
“크윽! 몸이 왜 이렇게 무겁지?”
용사의 당황한 표정을 보니 십 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것 같네.
요놈을 대체 어떻게 요리해야지 잘 요리했다는 소문이 날까?
“네놈…악마후보자였나? 이 방 전체에서 악마 냄새가 진동을 하는군.”
탐색스킬인 악마의 눈과 달리, 이런 대규모 일대일 스킬에서까지 용사의 눈을 속일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어차피 상관은 없다.
악마의 스킬이 걸리지 않을까 걱정을 한 거지, 일단 걸리기만 하면 내 필승은 확실하니까.
“알 필요 없다. 지금부터 너는 내 밑에 깔려서 패배를 곱씹으면 될 일이야.”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실제로 거의 다 이긴 거나 마찬가지였고.
힐끗 시선을 올려서 상태창에 떠오른 내 스텟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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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육체가 감당이 안 된다.
단전에서 솟구치는 힘이 내 몸을 터트릴 것만 같다.
마치 팔팔 끓는 물을 냄비에 담아두고 밀봉한 것만 같은 느낌.
환골탈태를 해두지 않았다면 진작에 혈도와 기도가 모조리 파열돼서 저세상행이었겠지.
“으으으!!”
하지만 괜찮다.
이 정도 힘 따위 충분히 견딜 만하다.
용사를 족치면서 힘을 쓰다 보면 한결 편해질 거다.
맞은편에 있는 저놈은 당장 스텟이 반 토막 난 놈.
속안에 끓어오르는 이 힘으로는 툭 치면 뒤질 거다.
바로 생각을 행동으로 옮겼다.
“뒤져랏!”
콰아앙
내 이동이 소리의 속도보다 빨랐다.
340m/s보다 빨랐다는 소리다.
음속을 돌파하면서 생긴 굉음이 주변을 찢어발길 듯 울렸다.
세상이 느려지는 신비한 기분.
주변의 풍경이 일그러지는 듯하다.
육각링이 물결처럼 출렁이더니 합쳐져서 소용돌이가 된다.
지구에서 어떤 과학자가 말하기를, 빛에 가까운 속력은 시간을 왜곡시킨다고 했다.
그 과학자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도 알 것 같다.
이상철은 당연히 반응조차 못 했다.
잘 가라, 상철아.
당연히 한 번에 보내주지는 않을 거야.
팔다리부터 부수고 눈 앞에서 네가 사랑하는 그녀를 범해줄게.
지극히 나다운 생각을 하면서 용사의 정강이를 향해 싸커킥을 날렸다.
그의 다리가 축구공처럼 날아가는 상상을 하면서.
고통에 일그러져 질질 짜는 모습을 보면서 내 고간을 세우기 위해.
“큭큭큭.”
나도 모르게 실소가 새어 나온다.
정말 판타지아 대륙은 마음에 쏙 드는 곳이다.
특히나 내 옛 인연을 다시 만나서 능욕하는 이 기분은 짜릿하다 못해 뇌가 녹아내릴 지경이다.
“으랴아앗!!”
후우웅
다리를 휘저었다.
그런데 뭔가가 허전하다.
타격감이 느껴져야 하는데.
이상하다 싶어서 봤더니 용사가 뒷발을 살짝 빼서 내 발차기를 피했다.
이해가 되질 않는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스텟차이가 얼마인데.
거의 4배 아닌가?
“이딴 스킬 하나 믿고 깝친 거냐! 으아아아!”
우드득 우드득
어디선가 들리는 섬뜩한 소리.
인체를 수없이 해부한 나에게는 익숙한 소리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
근육이 파열되는 소리.
용사의 몸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네놈 따위에게 절대 지지 않는다!!”
우렁차게 소리친 용사가 엄청난 속도로 나에게 쇄도했다.
스텟차이 따위는 개나 주라는 듯이.
실제로도 상당히 빠른 속도였다.
못 피할 건 없다.
그냥 피하면 되는…
움찔
몸이 안 움직인다.
왜 안 움직이는 거지?
혼란스럽다.
그 와중에 용사는 실핏줄이 터져서 피눈물을 흘리며 나에게 다가온다.
처절하다 못해 아름다울 정도의 정신력.
“개 같은 놈. 스스로 노력한 건 하나도 없으면서 스킬만 믿고 나대는 새끼!”
퍼어억
“크허헉!”
복부에 강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와 함께 등 뒤에도 비슷한 충격이 올라왔다.
용사의 주먹에 맞은 내가 그대로 육각링의 벽에 부딪힌 탓이다.
벽이 부서지진 않았다.
지구에서의 평범한 육각링이었다면, 방금의 충돌로 강철벽이 널빤지 부서지듯 바스러졌을지도.
하지만 진실의 방 속 육각링 벽은 겉으로만 강철벽이지, 실상은 차원의 경계와 같은 공간특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견고했다.
그런만큼 내 신체에 가해지는 충격은 두 배, 세 배를 넘어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 정도다.
현재 내 몸은 지금 금강불괴를 넘어서 신급 육체라 생각했건만.
어째서 이리 무력하게 밀리는 걸까?
[용사의 스킬 불굴의 의지가 발현되었습니다.]
그게 뭐야?
새롬에게 물을 시간도 없었다.
다만 새롬이는 이 장면을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있었고, 내가 무슨 생각을 할지 다 안다는 듯이 바로 스킬 설명에 들어간다.
[불굴의 의지: 위기의 순간에 잠재력을 끌어올립니다.
용사의 스텟은 그대로나, 격이 상승하여 무한한 정신력과 인내력이 부여됩니다. 신력이 1 증가합니다.]
정신력과 인내력.
그게 무한이라고 승부가 이렇게 된다고?
단순히 버서커전사 된다는 거 아니었어?
신력은 또 뭐고?
이해할 수가 없네.
[그걸 이해하지 못하면 마계에 올라오실 생각은 접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제 도움은 여기까지입니다.]
스팟
허공을 맴돌던 불타는 글자가 사라졌다.
뇌리를 떠돌던 의문을 해결할 새도 없었다.
신체와 정신에 가해진 데미지를 견디지 못하고 진실의 방이 해제되고 있었기에.
스스스스
진실의 방이 완전무적 스킬은 아니었구나.
처음으로 진실의 방에 들어가도 끝내지 못한 상대를 만났다.
그전까지는 진실의 방 스킬이 빗나갔으면 몰라도 일단 한 번 들어가면 모조리 아작을 냈건만.
뚝 뚝뚝
피가 철철 흘러내려 시야가 흐릿했다.
하지만 그건 용사도 마찬가지.
그런데 둘의 눈빛이 다르다.
저놈은 절대 질 리 없다는 눈빛.
나는 포식자를 우연히 마주친 고라니의 눈빛이다.
“개 같은 놈…악마의 하수인 놈…버러지 같은 새끼…네 한 호흡마다 소비되는 산소가 아깝다.”
극도로 증오하는 눈빛으로 다가오는 그의 어깨에는 알 수 없는 힘이 넘실거렸다.
분명 뼈가 부러졌을 텐데도.
근육이 파열되었을 텐데도.
인대가 나갔음에도.
저 빌어먹을 놈의 걸음은 멈추지 않는다.
“용사…이게 용사였구나…”
뒤늦게 탄식과 함께 이 대륙이 왜 ‘판타지아’인지 깨닫는다.
생각해보면 당연하다.
모든 소설에서 그렇다.
용사가 주인공이고 여인을 구하고 악당을 물리치며 해피엔딩을 맞는 100억 개가 넘는 소설.
거기에 악당이 설 자리 따윈 없다.
난 왜 여태까지 이 세계가 나를 위한 맞춤 세계라고 생각했을까?
소설에서도 악당이 기연을 찾아 강해지는 상황은 너무나 많다.
모두가 그때 으핫하하 따위의 엑스트라 웃음소리를 흘리며 주인공을 이길 수 있을 거라 자신하지.
“그런 악당의 강함마저도 주인공의 시련을 위해 소비되는 하나의 소재일 뿐이거늘…”
나도 모르게 조용히 뇌까렸다.
처발리고 있는 현 상황이 가슴 속 깊이 이해되었다.
독자에게 흥미진진함을 주기 위해서.
주인공이 너무 쉽게 때려 부수면 재미없으니까.
단지 엑스트라를 ‘한 끗발’ 올려준 거다.
난 그것도 모르고 조금 더 강해진 줄 알고 희희낙락했던 거고.
“뭐라 중얼대는 거냐!”
퍼어억
그의 어퍼컷이 내 턱에 정확히 명중했다.
데에엥
에밀레종을 타종하는 듯한 진동이 내 몸을 휩쓸었다.
다리가 저절로 풀려서 털푸덕 주저앉았다.
일어나려고 노력했지만, 자꾸만 몸이 주저앉는다.
콰지지직
어떻게든 땅을 딛고 일어나려는 내 손을 용사가 무참히 밟아버렸다.
손바닥의 뼈가 가루가 될 정도로 부러진 게 느껴졌다.
“크허억! 크아아악!”
“아프냐? 아프냐고.”
“……”
말을 하지 못하는 나를 보며 용사가 입술을 삐뚜름히 올린다.
저 얄미운 미소를 지워버리고 싶은데.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차라리 잘 됐어.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는 놈이라도 평범한 놈을 급습해서 죽인다는 게 영 찝찝했는데 말이야.”
내가 악마하수인이라는 점이 퍽 마음에 들었나 보네.
명분과 실리를 모두 챙길 수 있는 이 상황이 좋은 거겠지.
“난 널 쉽게 죽일 생각이 없다. 지금부터 천천히 짓밟아주겠다. 확실한 눈높이를 알려줄 때까지 밟아준 뒤, 유림이가 만족할 때까지 눌러준 뒤에, 죽여달라고 질질 짤 때까지 너를 가지고 놀아주마.”
퍽 퍼억 퍼억
무차별 구타.
온몸에 가해지는 충격에 나는 새우처럼 등을 두드리면서 맞는 수밖에 없었다.
“크핫! 크하하하!”
용사의 빌어먹을 웃음소리가 내 고막을 울렸지만, 이미 팔다리가 다 부서졌기에 저항할 수조차 없다.
팍 쿠웅 퍼퍽 쿵
거의 10분을 처맞기만 했다.
용사의 몸에 넘실대는 알 수 없는 힘은 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분명 저 녀석의 몸 상태도 정상이 아닐진대.
신력이라는 미지의 힘이 용사를 팔팔하게 만들어주고 있음이 틀림없다.
“…아직도 포기하지 않은 건가?”
용사의 시선이 성녀 한유림과 싸우는 분신에 가서 꽂혔다.
본체가 이렇게 처맞고 있는 와중에도, 분신은 성녀에게 맞서서 분투를 펼치고 있었다.
분신이 소멸하여 성녀까지 이쪽을 바라보는 2대 1 상황.
어떻게든 그것만은 피하겠다는 내 악착같은 의지의 발로다.
“…씨팔놈. 절대 질 순 없지.”
입가에 올라오는 핏물을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그렇다.
난 아직 포기하지 않은 거다.
이런 내 말을 들은 용사가 어이없는 실소를 지었다.
“이놈은 미련한 건지 멍청한 건지 모르겠네? 이미 승부는 끝났어.”
“맞아요. 지금이라도 엎드려서 자비를 구하세요. 만약에 그렇게 한다면 제 애완견으로 삼아주겠어요. 당신의 그 흉물은 제법 신기하니깐요.”
옆에서 둘 간의 대화를 듣던 성녀도 한마디 끼어들었다.
내 분신과 싸우는 와중에도 내 성기 쪽에 시선이 향하는 그녀.
그만큼 분신과의 싸움은 내 쪽이 열세라는 말이다.
저년은 나한테 말까지 걸 여유가 있고, 내 분신은 그녀의 라이트스피어를 피하기 바쁘니까.
“…야…”
온몸이 안 아픈 곳이 없다.
용사의 상태가 위중하지만, 나도 만만치 않다.
이미 불구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몸.
하지만 이대로 굽히기는 죽어도 싫다.
육체가 안 되면 정신력으로.
그것도 안 된다면 코브라좆을 발기라도 시켜서 땅에 꽂아 지탱할 거다.
…물론 그러지는 않았다.
어떻게든 다리에 힘을 넣어 땅에 디뎠다.
비틀대면서도 필사적으로 몸을 세우는 나를 보면서 용사의 동공이 살짝 커졌다.
입안에서 알싸하게 퍼지는 피 맛을 느끼며 말을 뱉었다.
“…그래, 인정할게. 넌 용사가 맞다.”
“뭔 뚱딴지같은 소리지? 그럼 내가 용사지 누가 용사겠…”
“하지만!”
그의 말을 끊었다.
난 지금 제정신 아니다.
뇌 속을 거치는 생각이 그대로 입을 통해 나왔다.
“네가 용사면 난 악당이다. 그리고…악당은 용사에게 지지 않는다.”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여태껏 어떤 소설도 용사를 이기는 악당은 없었기에.
하지만 난 이길 생각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왜냐하면, 이 소설의 주인공은 저놈이 아니라 나니까.
비록 악당이지만, 내가 주인공이야.
그러니까 모양 빠지더라도.
비겁한 수를 쓰더라도.
내가 이길 거야.
“…강림.”
스스스스
최후의 스킬이 발동됐다.
여태까지 아끼고 아낀 스킬이다.
패널티가 막대해서 쓰지 않았던 뒤가 없는 스킬.
어차피 이대로 지느니 이 스킬을 쓰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대기가 달궈지는 건가?
뜨거운 열기가 내 몸을 감싼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 모르겠다.
당연하게도 이런 이상 현상을 나만 느낄 리 없다.
“네놈! 무슨 수를 쓴 거냐?”
나에게 달려들어 주먹으로 갈겨보지만 소용없는 일.
대답할 힘도 없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마왕의 강림이 시작됩니다. 스텟이 하락합니다.]
내 스텟이 엄청난 속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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