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BER

MENU

〈 154화 〉 완전히 망했는데?



〈 154화 〉 완전히 망했는데?

* * *

“보아하니 내기는 내가 이긴 것 같군.”

옆을 슬쩍 바라보니 한유림은 완전히 패닉 상태에 빠져있다.

설마 질 거라곤 생각조차 못한 걸까.

“알아서 네 수중에 제일 괜찮은 물건으로 준비해라.”

물론 굴복시켜놓은 시점에서 저년의 소유물은 다 내 것이긴 하다만.

내기에 이겨서 그녀 스스로 나에게 물건을 바치게 하는 맛은 또 다른 법이다.

“주인님! 메이에요! 메이가 왔어요!”

큭큭큭.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반가워 죽으려 하네.

피가 잔뜩 묻어서 붉어진 하녀복이랑 적금발이 되어버린 머리카락만 아니었으면 조금 더 귀여웠을 텐데.

아무튼, 메이는 달려오는 속도 그대로 나에게 안겨왔다.

퍼억

“억!”

“꺄악!”

왜 이렇게 무겁지?

메이가 언제 이렇게 살이 쪘을까?

그녀가 날 들이받는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같이 뒹굴어버렸다.

예상치도 못한 상황에 마찬가지로 반갑게 따라오던 셰릴을 위시한 여인들도 순간 멈칫했다.

“…메이 언니. 살 좀 빼세요.”

“맞아요, 맨날 밤에 군것질하니까 주인님이 무거워하시잖아요.”

“후에에엥!! 메이 무거워져써!”

날 탓할 수는 없으니 다들 메이한테 한소리 하고, 메이도 본인을 탓하며 파란 눈동자에 눈물이 가득 고여버렸다.

손으로 턱을 바치고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로 고민에 빠졌다.

방금 같은 상황은 우연이라도 나와서는 안 되는 상황.

어째서 내가 달려오는 메이를 감당하지 못한 걸까?

“강림의 페널티군.”

레벨 40대인 메이가 아무 생각 없이 부딪치는 정도도 감당하지 못할 만큼 스텟이 많이 하강했나 보다.

지금은 어수선하니 상황이 정리되면 바로 상태창부터 확인해봐야겠어.

“네?”

“아무것도 아니다. 그보다 성기사 쪽은 어떻게 되었지.”

“별것 아니었어요. 물론 좀 힘들긴 했는데, 루나님이 깨어나고 나서는 쉬웠어요!”

올리비아가 약간은 흥분한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예전부터 느낀 건데, 이 녹색머리 마녀는 생각보다 전투를 좋아하고 호전적이다.

마냥 골방에 틀어박혀서 음습한 연구나 하는 마녀는 절대 아니었다.

올리의 말을 듣고 자연스럽게 시선이 아름다운 수인녀에게 향했다.

여전히 훌륭한 미드와 눈꽃과 같은 새하얀 머리카락을 찰랑거리는 루나.

그녀는 아까와는 달리 차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 여자들과 같이 싸워줘서 고맙군.”

“인간 녀석들은 나도 꼴 보기 싫어서 그런거다멍. 굳이 그런 인사는 안 해도 된다멍.”

아까처럼 아예 나한테 틱틱대지는 않는 걸 보니, 제대로 한 방 맞았다고 기가 좀 죽기는 했나 보다.

하지만 눈앞의 한유림처럼 완전히 굴복한 느낌은 아니다.

저 호승심 어린 눈만 봐도 다시 한번 붙어보고 싶어 한다는 게 느껴졌다.

“그런데 저쪽은 어떻게 된거냐멍.”

그녀의 손이 가리키는 곳에는 다 죽어가는 용사와 그 옆에 전라로 사죄하고 있는 한유림이 있었다.

루나를 제외한 다른 여자들은 이 익숙한 광경에 고개를 끄덕인다.

“역시 주인님이셔요. 또 한 명의 암컷을 들이셨군요.”

“이번엔 측실인가요? 성녀쯤 되면 정실이겠죠?”

“내기할 사람? 언니는 정실에 1골드 걸게!”

“정실이라니 말도 안 돼요! 전 육변기에 2골드 걸래요!”

어찌나 신경줄이 굵어졌는지 이젠 한유림을 놓고 내기까지 한다.

내기를 좋아하는 내 성격이 아내들에게까지 전염될 줄이야.

한유림은 딱 봐도 정상이 아닌 것 같은 내 여자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알몸도게자를 한 채 오들오들 떨었다.

“그건 그렇고. 옆에 저놈은 빌어먹을 용사겠죠?”

“당장 죽이죠. 저 재수 없는 상판대기가 마음에 안 들었어요.”

“내가 당장 목을 날려줄게.”

엘리샤가 피가 잔뜩 묻어있는 구르카를 꺼내 들고 다가가자, 한유림이 질겁을 하며 숨만 간신히 쉬는 용사를 붙잡고 애걸했다.

“그, 그렇지 마요! 용사님을 살려주세요. 자비를 베풀어주세요! 흐흐흑!!”

대성통곡을 하는 그녀를 보고 다가가던 엘리샤가 멈칫했다.

“뭐지? 아직 주인님 자지맛을 못 봤나?”

“그러기엔 이미 머리부터 발끝까지 씨앗 범벅인걸요?”

“신기한 여자네. 주인님의 자지를 맛보고도 옛 남자를 감싸다니.”

얘들아.

너희도 옛날에는 다 그랬거든?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하는 거 봐라.

지금이야 나를 광신도처럼 생각하고 맹목적으로 의지하지만, 계속 밟아도 몇 번이고 튀어 올랐던 기억들은 머릿속에서 삭제되었나 보다.

“엘리샤, 놔둬라. 그냥 보내줘.”

“…진심이십니까?”

놀란 표정으로 엘리샤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메이와 셰릴, 그리고 내가 어떤 놈인지 아는 다른 모든 여자가 입을 헤 벌리고 나를 본다.

이년들이 속고만 살았나.

“보내라고. 한유림, 너도 빨리 내 눈앞에서 사라져.”

“가, 감사해요! 이 은혜 잊지 않을게요.”

“내가 누군지, 그리고 네가 나에게 뭘 해줘야 하는지만 잊지 마라.”

“네! 명심할게요!”

거듭 고개를 숙인 한유림이 용사의 두꺼운 팔을 가녀린 어깨에 걸치고 힘겹게 움직였다.

그런 그녀를 보면서도 뒤를 쫓으란 말은 하지 않았다.

“주인님이 변했다멍…”

링링마저 의아해하는 상황.

메이가 나름의 추측을 해본다.

“주인님이라면 저렇게 희망을 주고 방생했다가 나중에 뒤를 쳐서 진정한 절망을 줄지도 몰라요.”

큭큭큭.

그거 그럴싸한데?

나도 그 생각은 못 했는데.

역시 첫째 부인이라고 경험치 높은 거 봐라.

옛날의 착하고 순진했던 하녀가 이제는 사람을 전문적으로 고문하는 기술자가 되어도 모자람이 없어졌다.

“아니다. 진짜로 보내려고 하는 거야.”

“…믿을 수 없어요.”

눈이 동그래진 셰릴이 나를 쳐다본다.

그리고 내 얼굴에 서린 특유의 사디즘에 물든 미소를 확인했다.

“아…”

“원래 맛있는 음식은 숙성시켜 먹어야 하거든.”

입가를 끌어올리자 그 속에 언뜻 보이는 하얀 치아가 사악함을 내보였다.

여자들이 이를 보고 부르르 떨었다.

“한유림이란 성녀가 불쌍해지네요.”

“맞아요, 지금 생각하면 최대한 빨리 항복하고 보지 벌리는 게 제일 똑똑한 방법이었어요.”

공감 어린 그녀들의 말이 퍼지자 어디선가 불편한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으르르르…”

정확히는 헛기침이 아니라 개가 으르렁거리는 소리였지만.

“역겨워서 더는 못 들어주겠다멍. 어서 부족 여인들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라멍.”

불만이 가득한지 볼을 풍선처럼 부풀린 루나가 우리를 노려보았다.

아직 조교가 안 된 여인.

매우 진귀한 원석.

“하긴 루나님은 아직…”

“그럴 만도 하지.”

“저분은 얼마나 버틸까?”

“아! 시끄러우니까 빨리 가자고!”

족장님이 가자는데 가셔야지.

어차피 해가 뜰 시간이었다.

나와 여인들은 피에 젖은 황야를 뒤로한 채 이제는 집이나 마찬가지인 마녀의 숲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 * *

갈 때와 마찬가지로, 돌아갈 때도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표국 출신 소피아는 능숙하게 샛길로 안내했고, 그런 길들은 인적도 별로 없고 최단 거리였다.

물론 그런 만큼 몬스터들의 습격은 제법 있었다.

촤아악

에밀리가 화려한 검화를 세 송이나 피워 올리며 고블린들을 난자했다.

확실히 재능이 넘치는 소녀였고 더 성장할 여지가 있다는 게 느껴졌다.

“언니! 이쪽 좀 도와줘요!”

“알았어!”

메이가 대궁을 힘껏 당겼다 풀자, 마나를 담은 화살이 불꽃처럼 타오르며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쏘아져 나갔다.

퍽 퍼퍽

링링의 뒤를 노리려던 코볼트들이 비명조차 못 지르고 머리가 터져나갔다.

“익스플로젼!”

콰아앙

소피아의 5급 대주문이 완성되면서 탐욕스러운 화염이 공기를 집어삼켰다.

“끼에엑! 케에엑!”

풀숲에 숨어있다가 한방기습을 노리려던 랫맨들이 한꺼번에 청소당했음은 물론이다.

“취익! 후퇴하라! 인간암컷들 강하다! 취익!”

상대조차 안 된다는 걸 그제야 인지한 우두머리는 한 박자 늦게 퇴각을 명했고,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결국, 칼이 번뜩이고 마법이 날아다니는 시간은 10분을 채 넘어가지 않았다.

“깔끔하군. 수고했다.”

나는 여자들의 뒤에서 뒷짐을 쥐고 그들을 치하했다.

스텟의 하락을 굳이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이제 마녀의 숲까지는 얼마나 남았지?”

“거의 다 왔어요. 밤새 걸으면 내일 아침에는 도착할걸요.”

“급한 일도 아니고 그럴 것까지는 없겠지. 오늘은 여기서 야영한다.”

“네, 마스터.”

내 명령에 따라 여인들이 능숙하게 텐트를 치고 모닥불을 피우며 사냥과 채집을 해오는데, 지구에서 생존에 달인이라 불리는 웬만한 특수부대원보다도 행동이 기민하고 민첩했다.

“나쁘지 않군.”

그녀들이 마련해준 천막에서 깍지를 끼고 손바닥을 뒤통수에 댄 채로 누운 다음에, 한쪽 다리를 다른 쪽 무릎에 올리고 까딱거렸다.

이러니까 완전 한량인데.

조선시대 전형적인 기생들 등골 빼먹는 기둥서방느낌.

뭐, 기둥서방이 맞긴 맞지.

그것도 고급기둥서방 말이야.

“저…주인님?”

벌써 그 기둥을 탐하려는 기생 한 명이 오고 있잖아?

얼굴을 붉히고 살포시 들어오는 포즈만 봐도 뭘 원하는지 뻔히 보인다.

“지금은 말고. 나중에.”

“알겠어요.”

방금은 셰릴이었다.

은발머리의 여기사는 나가는 와중에도 매력어필을 잊지 않는다.

매끈한 엉덩이를 자기 손으로 스윽 훑더니 다른 한 손으로는 입술에 대고 손뽀뽀를 날리는 그녀.

쪽 소리가 천막을 울린다.

“주인님, 노예기사를 원하시면 저 불러주세욧♥ 보지로 만족시켜 드릴게요♥”

누가 저 모습을 보고 정숙한 귀족여인이라 생각할까?

정말 로이형한테 셰릴이 어떻게 변했는지 보여주고 싶네.

그녀가 나간 뒤, 나는 홀로 천막에 남아 천장을 멍하니 응시했다.

“새롬, 거기 있어?”

그동안 이동하느라 바빴고 오랜만에 개인정비시간이다.

그런데 새롬이가 대답이 없다.

“새롬? 뭐해?”

또 드라마 보고 있나?

근무태만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할 무렵,

화르르륵

허공에서 불타는 글씨가 떠올랐다.

[네, 새롬입니다.]

“왜 이렇게 대답이 늦어?”

[……]

잠깐동안 아무런 말도 없던 새롬이 한 글자씩 강조하면서 글자를 띄웠다.

[그.쪽.때.문.에.요.]

딱 봐도 이를 악문 게 느껴지는군.

아직은 내 손아귀에 들어온 여인이 아니니까 자극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살며시 물어봤다.

“나 때문에 바쁠 일이 뭐가 있지?”

[당신이 강림스킬을 사용했을 때, 원래 강림했어야 할 마족 대신에 아유나님이 나오셔서 완전히 망했어요.]

“망하다니? 완전 좋았는데?”

[당신이야 좋았겠지! 그날 이후로 사무실로 항의전화가 얼마나 많이 왔는지 알아요? 지금도 오고 있어!]

하긴 72대마왕이 직접 내려오는 건 좀 심하긴 했지.

반대로 생각해서 나랑 성녀가 싸우는데 72대천사 중의 한 명이 내려왔다고 생각해봐라.

그 즉시 게임오버다.

[지금 부장님도 여기저기 불려 다니고 있어요. 전 휴가 냈다가 반려당했고요.]

마계라는 곳이 정확히 어떤 곳인지는 모르겠는데, 들리는 말로만 추측해보면 지구와 그다지 다를 건 없어 보인다.

그나저나 맨날 빈둥거리고 드라마나 보면서 휴가까지 쓸 생각을 했다니 양심이 없네.

그녀에게 일거리 폭탄을 건네줄 수 있어서 내심 고소했다.

“아무튼 그건 내 사정 아니잖아. 상태창이나 띄워줘.”

[…어휴, 진짜 한 대 쥐어박고 싶네.]

나도 너 ‘박고’싶다.

속에서만 맴도는 말을 꾹 참고 불타오르는 글씨를 주시했다.

­상태창­

이름: 송길준

칭호: 사악한 악인(중상), 잠룡(??)

직업: 마녀의 숲지기

LEVEL: 1

힘: 70 민첩: 70 지력: 10 행운: 10

보너스 스탯: 60

카르마 수치: 1500/21500

스킬: 악마의 눈, 진실의 방, 몬스터 로드, 분신술, 강림.

상태: 평행세계에 빙의, 연속 강간 성공, 유부녀 공략 성공, 하녀 조교 완료, 여기사 정복 완료, 마을 점령 완료, 성노예 예속(?) 완료, 마녀 소유 완료, 수인녀 획득 성공, 유부녀 강탈 성공, 성녀 함락 성공.

상태창을 보고 너무 놀라서 나도 모르게 입을 쩍 벌렸다.

믿을 수가 없다.

이름을 안 봤으면 내 상태창인지도 몰랐을 거다.

대충 절반 정도 깎여있을 줄 알았던 스텟이 거의 80% 이상이 깎여있었다.

이거…완전히 망했는데?

* * *



사상 최악의 주인공〈 154화 〉 완전히 망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