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화 〉 스테이터스가 뭐야?
* * *
거대한 물결을 형성하며 흐르는 정보의 호수 속에서 생각을 가다듬는 시간을 가졌다.
일단 목표부터 확실히 해야 한다.
목표는 내 성장, 그리고 마유 보지 점령.
이곳 보지방(열쇠 구멍을 보고 이렇게 이름 붙였다.)은 내 성장을 위한 재료들을 쌓아놓은 공간.
“아무리 시간이 많아도 무턱대고 들이받을 순 없지.”
마유를 다시 살피고 오기로 했다.
어쨌든 아무리 내가 강해져도 마유를 넘지 못하면 말짱 도루묵이니까.
다시 광활한 공동이자 연무장으로 돌아왔다.
전과 똑같은 자세로 보지강조하면서 손톱 손질을 하던 붉은 머리카락 미녀가 나를 힐끗 보며 말했다.
“대충 다 둘러봤니? 감상은 어때?”
나는 내 앞에서 여자가 여유 부리는 꼴을 좋아하진 않지만, 저 여자는 자격이 되니 일단은 참자.
“아유나님이 절 위해 신경을 많이 써주셨더군요. 감사드립니다.”
고개를 숙이자 그녀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배려가 될지 지옥이 될지는 너 하기 나름이야. 어차피 날 이기지 못하면 넌 영원히 갇혀서 나가지 못해.”
그러면서 무발기 상태로도 늠름한 굵기를 자랑하는 내 자지에 시선을 꽂고 혀로 입술을 핥던 그녀는,
“아니면…내 발등을 핥으면서 애완견을 자처하면 적당히 100년만 가지고 놀아주다가 내보내 줄 수도 있는데. 어떻게 할래?”
“사양하겠습니다.”
칼 같은 대답에 마유는 어깨를 으쓱했다.
“마음대로 해. 포기는 언제든지 가능하다는 거 알아두고.”
정말로 탈출이 불가능하다면 최악의 경우 마유의 말대로라도 해야겠으나.
아유나가 탈출이 아예 불가능할 난이도를 설정해놨을 리는 없다고 믿는다.
그동안 나를 지켜보고 남몰래 지원까지 해주는 그녀의 성격을 미루어 짐작해보면, 이곳을 자력으로 탈출하지 못하면 나가봐야 소용없는 정도의 마지노선을 정해서, 이에 맞춰 분신체의 강력함을 조정했을 터.
비록 스텟은 급하락했으나, 악마후보자 스킬은 여전히 건재한 점을 이용해서 악마의 눈으로 그녀의 수준을 가늠해보기로 했다.
원래라면 나보다 상위의 존재는 악마의 눈으로 가늠이 안 되지만, 어찌 되었든 이건 시험.
최소한 시험문제가 얼마나 어려운지 정도는 아유나가 알려줄 거라 본다.
악마의 눈 발동!
츠팟
상태창
이름: 마유
칭호: 아유나의 분신체
직업: 시험관
LEVEL: 99
힘: 250 민첩: 250 지력: 250 운: 250
보너스 스탯: 0
카르마 수치: 0
스킬: 용암계열 원소술
역시 예상대로였고, 예상이 빗나갔다.
예상대로 악마의 눈은 통했고, 예상보다 마유는 괴랄한 스텟을 갖고 있었다.
판타지아 대륙으로 빙의되고 나서 처음으로 레벨 99짜리 괴물을 보았다.
게다가 도합스텟 1000.
내가 용사와 진실의 방에 들어갔을 때, 그의 스텟을 갈취한 후 도합스텟 1200에 이르러봐서 안다.
저 정도 되면 스스로 몸이 통제되지 않을 정도로 힘이 넘쳐흐른다.
그런데 저 여자는 그때의 나와는 달리 무척이나 여유로운 모습.
본신의 힘을 완벽히 통제하에 두고 최대치 이상 끌어내는 게 익숙해 보인다.
“시발…”
아유나야. 이거 맞냐?
너 혹시 상급반에 돌릴 시험지 나한테 잘못 준 거 아냐?
저런 괴물을 어떻게 이겨?
그나마 옛날의 나였으면 가능했을지 모른다.
그때만 해도 도합스텟 800에 악마후보자 스킬도 자유자재로 다뤘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무리 봐도 자신이 없다.
기껏해야 도합스텟 200을 간신히 넘는 수준이니 말이다.
“어떻게든 보지방에 있는 서적과 무기를 이용해서 강해진 다음에 마유를 처리하라는 말은 알겠는데…”
다들 알다시피 나는 현재 경험치 묶기로 인해 레벨 고정을 당한 상황.
아무리 수련을 해도 레벨이 오르지 않으니 스테이터스는 제자리.
성녀 세 명의 보지를 따먹기 전에는 그대로일 것이고, 이 시간과 정신의 방에 우연히 성녀 세 명이 숨어있으리란 기대는 할 수 없다.
“저기 마유님?”
“왜?”
“시험내용이 무슨 의도인지는 알겠습니다. 본신의 무력만으로 저보다 높은 스테이터스를 가진 존재를 이기라는 거겠지요.”
“그래서?”
“하지만 이건 너무 밸런스가 맞지 않습니다.”
순수하게 컴플레인을 걸었다.
도합스텟 1000은 솔직히 선 넘었잖아?
500만 되어도 내가 어떻게 해보려고 했는데.
이 사실을 알고 있는 마유도 정상참작을 해주지 않을까?
“그래서? 어쩌라고.”
새끼 손가락으로 코를 후비적후비적 파는 그녀를 보고 관자놀이에서 승천하려는 핏대를 간신히 가라앉혔다.
“불만 사항은 본체한테 가서 따져.”
“족자에 있는 제가 마계에 계신 아유나님에게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못하는 거지. 내가 누누이 말하지만, 언제든지 포기해도 돼. 솔직히 나는 그편이 더 좋으니까 말이야.”
계속해서 내 자지를 보고 군침을 흘리는 마유를 보니 이 시험은 완전히 틀려먹었다는 사실 하나는 확실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정말 막막한데.
몸을 돌려 나가려고 하자, 뒤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참고로 여기선 좀 다쳐도 돼. 죽지만 않으면 대충 20분 안쪽으로 회복될 거야.”
그것참 눈물 나게 고맙네요.
졸라게 고마워서 좆으로 화답해드리고 싶어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꾹 참고 보지방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 * *
그때부터 나는 보지방의 수많은 무공서적을 시연 영상들을 열람하면서 무한 수련에 들어갔다.
어찌나 다양한 자료들이 많은지, 기본적인 체력단련을 하는 법부터 무협지에 한 번 등장했다간 피바람이 불법한 비급 중의 비급까지 아주 다양했다.
하지만 이런 걸 보면 볼수록 내 머릿속에는 의문점이 남았다.
“무공이 강해지는 게 좋기는 한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느새 내 몸은 칼로 잘 안 들어갈 정도로 근육질이 되었고, 근질 또한 지구의 웬만한 보디빌더 저리 가라 될 정도였다.
예전 지구에서 송길준 때보다도 몸이 좋아졌으니 두말할 것도 없다.
이렇게 몸이 좋아질 수 있는 비결은 환골탈태해서도 그렇지만, 몸의 성능을 향상하는 법에 대한 온갖 심득이 적힌 책이 보지방 책장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녔기 때문이었다.
“훅, 후욱, 훅.”
연무장에서 비지땀을 쏟으며 개인 수련을 하는 동안에도 정중앙에서 젖통을 출렁이는 마유는 나에게 아무런 제지를 가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조언을 해주지도 않았다.
그저 나른한 눈빛으로 내 훈련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표정에서 여유가 넘쳐나는 게 보여서 볼 때마다 속이 뒤집혔다.
“그럼 오늘도 가겠습니다.”
“…어? 뭐라고 했어?”
졸다가 깨어났는지 눈곱도 떼지 않고 비몽사몽 말한다.
진짜 제대로 한 번만 걸려라.
“후우우…”
단전에 있던 내공을 천천히 끌어올렸다.
용사와의 결전 이후 스텟이 깎이면서 자연스럽게 내공도 줄어들었다.
하지만 시간과 정신의 방에서의 피나는 노력으로 같은 내공으로 극한의 효율을 내는 방법은 깨달았다.
“하앗!”
기합과 함께 이형환위를 펼쳤다.
순식간에 잔상이 수십 개로 늘어나며 팔괘의 방위를 점했고, 그 규칙적이고도 불규칙적인 행보에 기이함이 더해졌다.
보지방에서 구한 경신공과 보법에 대한 책을 모조리 탐독한 결과다.
나와 비슷한 스텟을 가진 평범한 판타지아 대륙 전사라면 이러한 신묘한 몸놀림을 절대 따라가지 못했겠지만, 안타깝게도 마유는 그런 아무나가 아니었다.
“잔재주가 제법 귀엽네.”
탓
날파리를 쫓듯이 손을 휘이 한 번 내젓자, 그녀의 손등이 인지하지도 못할 속도로 내 뺨에 닿는다.
어찌나 뜨거운지 볼이 모조리 익어서 살익는 냄새가 콧속으로 들어와 속을 진탕 시켰다.
“커헉!”
단발마의 비명과 함께 벽에 가서 부딪혔다.
등골을 타고 올라오는 충격에 머리가 어지럽고 구토감이 치밀어올랐다.
화상으로 인한 통증으로 눈앞이 하얘졌으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완전히 죽었던 피부세포가 어느새 재생되어 뽀송뽀송한 아기 피부로 돌아오고 있었다.
마유가 말한대고 족자 공간 내의 자연치유 능력은 말도 안 되는 수준.
어떤 원리로 이런 공간을 만드는 게 가능한지는 모르겠다.
“제기랄!”
그동안 나보다 훨씬 피나는 수련을 했으면서 스텟이 딸려서 나에게 한 방에 나가떨어졌던 녀석들이 기억난다.
셰릴부터 시작해서 올리비아, 루나, 성기사 요한, 아룬마을 검투사들, 그리고 티모 대위를 포함한 몬스터들.
이들의 심정이 어땠을지 역지사지의 기분으로 절절히 느끼는 중이다.
싸우면 싸울수록 마유와 나의 거의 5배에 달하는 스텟차이만 체감되었고, 이는 아무리 내가 다양한 무공지식을 머리에 넣어서 극한의 효율을 추구해도 극복할 수 없었다.
잘 훈련된 기사 10명이 농노병사 1백 명은 이길 수 있다 쳐도, 1만 명을 이길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모두가 고개를 가로저을 터.
같은 원리로 내가 아무리 무공을 익혀서 머릿속에 지식이 많아져도 근본적인 스텟이 오르지 않는 이상, 마유의 시험을 통과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게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넌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처음으로 마유가 시험이 끝나고 한마디를 던졌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곰곰이 생각해봐. 너는 분명히 답안지를 봤던 적이 있어.”
뜬구름 잡는 선문답을 하고는 다시금 누워서 빈둥대는 그녀의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을 잠시 감상하다가 몸을 돌렸다.
다시금 보지방에 입장.
이제는 보기만 해도 쥐가 날 것만 같은 무공서적들이 아무렇게나 쌓인 채로 나를 반기고 있었다.
평상시라면 복습한다는 생각으로 부족한 부분의 무공서를 다시금 살펴봤겠지.
하지만 화두가 던져진 오늘은 그저 두껍게 쌓인 책을 의자 삼아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답안지를 어디서 봤다는 걸까?”
마유의 말이 거슬렸다.
그녀가 말한 답안지는 스텟이 부족해도 이겼던 경험들을 지칭하는 거였겠지.
분명 그런 순간이 없지는 않았다.
올리비아 때도 스텟 자체는 거의 비등했고, 셰릴과의 일대일 결투도 악마후보자 스킬이 아니었으면 내가 질뻔한 경기였으니까.
“하지만 마유가 원하는 건 그게 아닐텐데.”
그동안 시험을 치면서 악마후보자 스킬 또한 질리게 써봤지만, 분신술은 본체가 단번에 간파당했고, 진실의 방은 애초에 맞아주지를 않았다.
어떻게든 후보자 스킬을 적절히 사용하려고 무공지식을 통한 신체 효율을 극한으로 올렸어도 결국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그러다 문득 드는 생각.
용사와의 마지막 전투.
내가 진실의 방에서 절대적으로 우세한 스텟을 가지고 있었는데도, 용사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힘을 몸에 받아 나를 압도했었지.
상태창에 신력이라 불리던 그 힘이 기억난다.
“신력을 다루라는 말일까?”
애초에 그 힘이 뭔 줄 알고?
감이 잡히지 않는다.
꼼짝하지 않고 앉아서 몇 날 며칠이 지났는지도 모른 채로 내면을 끊임없이 뒤집어봤으나, 무언가 속 시원히 나오는 답이 없었다.
그저 새롬의 한마디가 머릿속을 유영할 뿐.
‘신력을 깨닫지 못하면 마계로 올라올 생각은 접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용사조차 그 신력이란 걸 담고 온몸이 박살 났는데.
날 보고 어쩌란 말인지.
단순히 신체에 담는 것만으로 그렇게 되는 힘을 담으면 나도 그렇게 망가진단 말이잖아?
무엇보다도 신력은 어떻게 스테이터스를 무시할 수 있을까?
애초에 스테이터스란 무엇일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그리고 결국, 화두에 답을 내지 못하고 연무장에 갔다.
언제 가져왔는지 싱싱한 포도를 들고 온 마유는 알을 하나씩 떼어서 입 안에 쏙 넣는다.
탱글탱글한 젖가슴에는 포도즙이 묻어서 보라색 얼룩이 하얀 살결에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오랜만이네?”
“오랜만이라뇨? 어제 들르지 않았습니까?”
“무슨 소리야. 너는 시간 감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네가 마지막에 들른 게 보름 전이야.”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지나있어서 의외였다.
보름 동안은 꼼짝 않고 생각만 하고 있었다니.
“그래서, 이번엔 또 어떤 잔재주를 가져왔을까?”
“아뇨. 시험을 치러온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평상시와는 다른 내 태도에 마유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 보며, 그동안 풀리지 않던 궁금증을 물어보았다.
“스테이터스는 대체 뭡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