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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0화 〉 조만간 그 보지 뚫어줄게



〈 160화 〉 조만간 그 보지 뚫어줄게

* * *

스테이터스가 뭐냐는 내 질문은 들은 마유가 처음으로 눈에 띄는 반응을 보였다.

먹고 있던 포도 접시를 한편으로 치워놓고 상체를 일으켜서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이제야 이곳을 나갈 생각이 좀 들었나 보네.”

그녀의 반응을 보니 신력에 대한 이해가 아유나가 내린 진정한 시험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보지방에 수많은 무기와 무공서적들이 내 기본적인 전투 능력을 일깨워주고, 마유에게 접근하는 과정에서 벌였던 격렬한 전투는 전투 센스를 길러주었지만, 어디까지나 이 모든 과정은 메인퀘스트가 아니라 서브퀘스트였던 셈이다.

“알려주시지요. 혹시 이것도 스스로 알아내야 합니까?”

오랜 기간 단식한 채로 화두를 고민했던 나는 상당히 초췌한 안색이었지만, 그런데도 가슴 깊은 곳에 들끓는 호기심은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같이 위태롭게 부글거렸다.

이런 내 상태를 짐작했을까?

마유는 가만히 나를 직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충분히 생각해보고 왔으니 이제는 내가 말해줄 차례겠지. 그러려고 본체가 날 여기에 두었거든.”

잠시 숨을 멈춰 뜸을 들이더니,

“혹시 신이란 존재를 믿어?”

영 생뚱맞은 질문을 한다.

지구에서 모르는 사람한테 저런 질문을 하다간 단숨에 사이비종교인으로 몰려서 본전도 못 찾겠지.

하지만 이곳은 판타지아고, 적어도 눈앞의 마유는 고위 악마의 분신체니 그럴 의도가 없음을 안다.

“신이 있었다면, 세상을 이렇게 좆같이 만들었겠습니까?”

“풉! 역시 넌 재밌어.”

내 대답에 짧게 실소한 그녀를 보며 말을 이었다.

“다만 이쪽 세계 사람들은 그 존재에 대해서 굳게 믿고 있더군요.”

모나스 검투대회의 우승상품만 하더라도 천신의 눈물이었고, 악마연합만 해도 스스로를 마신을 섬기는 자라 명명한다.

“맞아, 신은 분명히 존재하지. 적어도 [존재했어]”

과거형의 표현을 썼다는 말은 현재는 모종의 이유로 자취를 감추거나 잠적을 했다는 얘기 같은데.

“천신과 마신이 싸우기라도 했습니까? 그래서 빅뱅이 터져서 세상이 갈라졌다는 진부한 이야기라면 듣지 않겠습니다.”

“전혀 그렇지 않아.”

수없이 많이 읽었던 웹소설 짬밥을 살려서 나름의 이유를 추측해보았으나, 아쉽게도 맞추진 못했나 보다.

“애초에 천신과 마신이라는 건 없어. 다 같은 하나의 신일 뿐이지. 그걸 천계 쪽에서는 천신이라 부르고, 마계 쪽에서는 마신이라 부를 뿐이야.”

이건 좀 색다른데?

하나의 신을 가지고 자기네 신이라고 우기는 꼴이라니.

그렇다고 우습게 여길 것은 아니다.

예전 지구의 세계사만 봐도 유럽과 중동은 똑같은 이유로 십자군 전쟁을 일으켜서 수백 년을 피비린내 날 정도로 싸웠으니까.

“하지만 신성력과 악마력은 엄연히 구분되는 힘으로 알고 있는데요. 성질이 아예 다르지 않습니까?”

“그 또한 신의 양면성일 뿐이지. 자신들이 원하는 면만 보고 멋대로 그 힘을 뽑아 쓰는 셈이야.”

마유는 아유나의 분신체이니 지금 그녀가 하는 말들은 평소 아유나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겠지.

최전선에서 마신을 섬긴다는 상위 서열 마왕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게 조금 놀라웠다.

이런 내 생각을 짐작했는지 그녀가 덧붙여 말했다.

“이건 우리뿐만 아니라 저쪽의 역겨운 천사 놈들도 알 만한 놈들은 다 알고 있어. 다만 자기네들 집단의 정체성을 위해서 쉬쉬하고 있을 뿐이지.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고.”

판타지아 대륙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자들이 즐비한 마계와 천계의 속사정을 들은 건 나쁘지 않은 수확이다.

또한 아유나가 제멋대로인 겉모습과는 달리 상당히 깊은 사고를 하는 여자라는 사실을 알아두었다.

“그래서 저는 스테이터스에 대해서 궁금하군요. 그것이 천신과 마신, 즉 신과는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겁니까?”

“연관이 없을 수 없지. 스테이터스는 신이 최초로 창조했고, [신의 자비]로 불리고 있으니까.”

예전부터 궁금하긴 했었다.

판타지아 대륙의 절대적인 우열의 요소인 스테이터스.

아무리 뼈를 깎는 수련을 하더라도 스텟이 낮으면 고사리 같은 손목을 가진 고스텟 여자도 못 이기는 불합리한 이치.

이런 상황을 신이 만들었다니.

“전 이해가 되지 않군요. 어째서 스테이터스를 신의 자비라 부르는지요.”

내 질문에 잠시 고개를 기울여 고심에 빠진 마유.

본능적으로 그녀가 할 말을 고르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음…예를 들어보자고. 일단 너는 내 본체가 얼마나 강한지 알고 있니?”

그녀의 강함은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나타나는 것만으로도 전 우주를 진동시키는 절대강자인 건 익히 알고 있고.

내가 본 것만 따져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다.

손가락 한 방으로 신력을 둘둘 두른 용사를 한 방에 기절시키고 성녀를 무력화시키는 무력.

그걸 무력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것도 신력의 일종입니까? 말이나 쳐다보는 거로 상대를 제압하는 술수 말입니다.”

생각해보면 마왕 벨리알도 올리비아의 제자 미셸을 손조차 쓰지 않고 목을 날렸다.

72좌에 해당하는 대천사와 악마들은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 걸까?

“넌 아직도 그녀의 진정한 본체를 본 적이 없다고 하면 이해가 되려나? 지금 딱 말해줄게. 그녀가 마음먹고 전력을 개방하면 넌 주변에 서 있기만 해도 흔적조차 남지 않고 사라질 거야.”

그리스로마신화를 보면, 평범한 인간들은 제우스의 진면목을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멀거나 불타서 사라진다는 속설이 있었는데.

이와 비슷한 걸지도?

개미가 사람의 온전한 힘을 파악하기 힘들듯이, 나 또한 아유나가 얼마나 강한지 알 리가 없다.

“하지만 스테이터스가 있고 상태창과 레벨이 있으므로 아유나는 판타지아 세계에 강림하는 즉시 [수치화] 될 수 있고, 존재가 [정의]되기 때문에 본신의 힘을 온전히 꺼내쓰기 힘들어진다.”

어려운 말이지만, 대충은 이해가 된다.

이전 세계 지구에서도 컴퓨터가 만드는 가상세계는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가 아닌 0과 1로만 이루어진 이진법세계.

그곳에 가면 나조차도 온전한 내가 아닌 0과 1로 이루어진 아바타가 되겠지.

내 음성과 시각이 모니터의 화면으로 투영되고, 전파를 통해 전달된다.

육성이 아닌 무언가 한차례 거름망을 통한 인공적인 산물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내 심리를 투영할 순 있지만, 100% 온전하게 내 모든 걸 쏟아부을 수 없으며, 결국에는 현생을 위해서 언젠가는 가상세계에서 벗어나게 된다.

완벽하게 일치하는 비유는 아니지만, 이와 비슷한 개념으로 이해하면 되리라.

“그러면 레벨이나 상태창 등도 신이 만든 겁니까?”

“신이 제공하고, 상위 서열 마왕과 대천사들이 2차로 가공한 결과물이지. 우리가 그 정도의 능력은 있거든.”

그래서 악마연합 측에서 나에게 후보자스킬을 제공할 수 있었군.

마유는 그동안 족자공간에서 많이 답답했던 듯 한 번 입을 열자 봇물 터지듯 설명을 했다.

원래 이런 설명은 아무에게나 하지는 않겠지.

그러니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다.

“왜 저입니까? 이유를 알고 싶군요.”

내가 사악함으로는 따라올 수 없는 사람이라서 선택한 걸까?

아니면 내 외모가 아유나의 마음에 들어서일까?

내 물음에 마유의 눈동자가 자연스럽게 내려가면서 30cm 초대물에 꽂혔다.

“…그래서였습니까? 시험과 관계없이 천국으로 보내드릴 수 있습니다만. 아니, 악마니까 지옥으로 보내드린다고 하지요.”

“후훗. 물론 네 자지가 마음에 드는 건 사실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지.”

그럴 줄 알았다.

아무리 마왕이라도 자지 크기 하나만 보고 날 뽑은 건 너무 주먹구구식이잖아.

“회빙환, 영혼이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거 말이야. 그건 우리 마왕들과 천사들도 어쩌지 못하는 현상이야. 우주의 진리라는 말이지.”

그런 거였나?

나는 악마 놈들이 내 사악함을 알아보고 일부러 무작위로 빙의시킨 줄 알았건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관측 정도지. 회빙환 현상을 확인하면, 싹수가 보이는 놈들에게 접근하는 거야. 상태창과 레벨을 주고, 후보자스킬을 제공하는 거지.”

내가 어떻게 해서 악마후보자가 되었는지 이제야 알게 되었다.

비밀을 알게 되자 속이 시원한 것도 있고, 마계가 한층 더 가까워진 느낌이다.

“아무튼, 너도 용사와 성녀를 만나서 알겠지만, 깃털놈들도 성녀와 용사를 정할 때 회빙환한 놈들을 우선으로 구해.”

“왜 그런 거죠? 이유를 알고 싶군요.”

“왜냐하면, 너희가 지구와 같이 스텟이 존재하지 않는 [버려진 차원]에서 왔기 때문이야.”

지구에서도 컴퓨터 게임에는 스테이터스가 있었지만, 마유가 그걸 말한 건 아니겠지.

스텟이 없다고 버려진 차원이라니.

말이 좀 심하네.

하지만 이어 말하는 그녀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스텟이 존재하지 않으니 상급 마족 하나만 가도 그런 차원은 순식간에 가루가 된다. 다만 지구와 같은 차원이 백사장 모래알만큼 많으니, 강자들이 굳이 그런 곳을 일일이 방문해서 부술 이유가 없을 뿐이야.”

무한 팽창.

마유가 설명하는 강자들의 특징이었다.

우주에서 거대 항성이 무한히 팽창하는 것처럼, 강자들은 적어도 한둘씩은 무한으로 존재감을 확장하는 법을 알고 있단다.

스텟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 들어가서 끊임없이 본인의 존재감을 불리다 보면 세계가 감당하지 못하고 도자기 깨지듯 금이 가고 부서진다는 말.

“스텟이 존재한다면 바로 수치화를 할 수 있고, 일정 존재감 이상이 되면 스텟이 이상을 느끼고 오류를 발생시킨다. 그리고 너는 분명 그 오류가 어떤 식으로 표현되었는지 봤겠지.”

용사의 신력.

그것이 천사의 과도한 힘을 몸에 받아들여서 순간 스테이터스를 초과하는 힘을 얻어서 오류가 난 건가.

게임으로 치면 버그다.

그리고 버그가 발생한 순간, 개발자는 이상을 느끼고 패치나 수정에 들어가겠지.

그 역할을 신이 하든, 반대편에 선 세력들이 하든 간에, 그런 식으로 전 차원의 균형이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이 마유가 한 말이었다.

그러면 용사의 신체가 파괴된 이유는 버그 스킬을 써서 오류가 난 아바타가 제 기능을 못 해서 기능이 망가진 거였군.

가만 보면 천사들도 악랄한 게, 자신들이 정한 용사면서 소모품처럼 쓰고 버리는 스킬을 줬다.

빛을 숭상한다고 그게 결코 선하다는 말은 아님을 이전 세계 지구에서도 질리게 알고 있었고, 여전히 세상에는 나보다 더 사악한 존재들이 많다는 걸 실감한다.

“이 사실을 얼마나 많은 존재가 알고 있습니까?”

“적어도 천계와 마계에서 알만한 놈들은 알겠지. 하지만 여기도 생김새만 특별할 뿐, 똑같이 사람 사는 곳이다. 신력에 대한 이해조차 없는 어중이떠중이들도 많아.”

대충 알아낼 정보는 다 알아낸 것 같으니, 마지막으로 궁금한 점을 물어보았다.

“마유님, 그렇다면 저 또한 신력을 받는다면, 즉 판타지아 세계의 스텟이 허용하지 않는 힘을 쓴다면 몸이 망가지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치면 강림했던 아유나도 망가져야 했겠지. 스텟에 존재가 [정의]되었는데 이를 초과하는 힘을 썼으니까. 하지만 그러지 않았지. 대답이 되었어?”

모종의 방법이 있다는 뜻인가?

그리고 그걸 알아내는 게 이곳 칼리엔의 파피루스를 나에게 넘긴 그녀의 진정한 시험이자 조력이었어.

“이제 끝! 피곤하니 잔다. 물론 시험을 치고 싶으면 얼마든지 와도 돼. 다만 나 자고 있을 때 덮치면 힘 조절이 안 될 수도 있다는 거 알아두고.”

진정한 시험문제가 무엇인지 안 이상, 억지로 극한의 효율을 추구하며 마유에게 들어가서 계란으로 바위 치기 할 필요는 없다.

그녀에 대한 도전은 답을 찾고 다시 해보자.

조금만 기다려라, 마유.

조만간 그 보지 제대로 뚫어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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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최악의 주인공〈 160화 〉 조만간 그 보지 뚫어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