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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1화 〉 그냥 마음에 안 들어서



〈 161화 〉 그냥 마음에 안 들어서

* * *

이후에 나는 모든 훈련을 그만두었다.

어떠한 무공서적도 읽지 않고 그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벽에 몸을 기대고 멍한 시선으로 천장을 바라보면서 내내 생각에 잠겼다.

마유와의 대화를 수십, 수백만 번을 상기하면서 어떠한 부분에 단서가 있는지 계속해서 훑어보았다.

면도를 오랫동안 하지 않아 텁수룩한 수염이 하관을 가릴 때쯤이야 새로운 단초가 내 머리를 건드렸다.

“회빙환한 놈들을 우선으로 뽑는다고 하였지.”

마유는 과정을 말해줬을 뿐, 이유를 설명해주지는 않았다.

우주의 진리라 불리고, 고강한 대천사들과 대악마들도 예상하지 못한 신비한 현상을 겪은 사람은 다른 사람과 무엇이 다른 걸까?

내 신경을 건드렸던 스테이터스에 관한 의문과 방금의 의문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의외의 답안이 도출된다.

“…스테이터스에 구애받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그랬다.

내가 그동안 판타지아 대륙에 잠깐 살면서 느낀 점은 이곳 사람들은 레벨이나 스텟에 병적으로 집착한다는 사실이었다.

당장 내가 있던 베르너 백작가 소속 사람들만 하더라도 머리 위에 뜬 레벨 하나 가지고 사람을 그냥 병신 취급하지 않던가.

하지만 버려진 차원, 즉 지구와 같이 스텟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판타지아처럼 일명 [신의 자비]를 받은 차원으로 넘어온 사람들은 나처럼 기억이 남아있다는 전제하에 상대적으로 스텟의 구애를 덜 받을 수밖에.

대악마나 대천사, 이 밖에 천계와 마계의 강자들은 애초에 스텟으로 정의되지 않는 괴물들이다.

이들 또한 스테이터스나 레벨이 존재의 한계를 특정하고 본신의 자유를 제한하는 울타리로 인식할 터.

“목줄의 매인 개는 평생 그 목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인가…”

아이러니하게도 외부의 괴물들에게 인간들을 지켜주려고 만든 신의 안배가 인간 스스로가 초월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셈이다.

판타지아에서 평생 레벨과 스텟을 올리기 위해서 수련하는 사람들은 그 전제 자체가 틀렸다.

레벨과 스텟은 부차적인 것.

본신의 힘이 강해지면 스텟은 자연히 이를 따라오고, 그 이상이 되면 스텟은 단순히 고장 난 기계장치가 된다고 생각한다면 어떨까?

이미 나는 마유가 마련해준 족자 공간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냈는지 모른다.

엄청난 수련양으로 스텟이나 레벨이 올라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서 수치가 묶였다고 내 수준이 고정된다는 게 말이 되는 일일까?

사실은 이미 내 수준은 충분히 어떠한 경지에 올랐는데, 어느새 나도 목줄에 메인 개가 되어서 스스로의 한계를 정의하고 있었다면?

“머릿속의 고정관념을 버리자.”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 정도면 고정관념이랄 것도 없다.

내가 사람이라는 인식을, 생명체고 이 땅에서 살아숨쉰다는 개념을 잊어버리는 일이다.

무의식적으로라도 기저에 깔린 근본적인 개념을 뜯어고쳐야 함을 깨닫고 의식의 바다에 그대로 뛰어든다.

풍덩

발버둥을 치면서 끊임없이 아래로 침잠한다.

뇌를 구성하고 있는 방어기제가 자아가 붕괴할 것을 우려해서 어떻게든 신경다발로 나를 묶고 다시 수면 위로 올리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아래로 내려갔다.

이전부터 내가 당연하게 생각했던 모든 개념이 나를 옭아매고 쥐어짜려 했으나, 모든 오감을 벗어던지고 육감마저도 믿지 않은 채 계속해서 밑으로 내려갔다.

발바닥에 모래주머니만 차고 마리아나 해구로 다이빙한다면 이러할까?

칼날처럼 몰아치는 압력의 폭풍에 영혼이 산산조각나는 듯한 이 감각 또한 세상의 본질을 가리는 커튼이며 진리를 향해 달려가는 수도자를 붙잡는 질투의 손길일지도 모른다.

결국, 밑바닥이 보이는 곳까지 내려오자 그곳은 완벽한 무(無)와 혼돈이 공존하는 세계.

이제 마지막 단 한 걸음.

어둠인지 빛인지도 모를 그 정체불명의 공간에 거리낌 없이 한 발을 내딛자,

스팟

감각기관으로는 인지할 수 없는 끝없이 광활한 우주가 나를 반기고 있었다.

무의식의 너머를 존재했던 진정한 심상 세계.

한의학에서 사람의 몸을 소우주라 표현한다고 했던가.

단순한 비유인 줄 알았으나 아니었다.

수없이 많은 별이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고, 행성과 항성들이 일정한 규칙에 따라 공전과 자전을 반복하고 있다.

태양계와 같은 소차원계들이 모이고 모여 거대한 하나의 은하수가 되어 폭포처럼 흐르고 있었으며, 간간이 이를 꿰뚫고 지나가는 빛나는 혜성이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어떤 항성은 감히 쳐다보는 것만으로 나를 증발시킬 정도로 고고하게 불타올랐고, 다른 행성은 날카롭게 벼려진 얼음송곳이 쉴새없이 냉기를 뿜어내며 다가가기만 해도 나를 찌를 듯이 위협했다.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이곳에서 ‘나’를 찾아야 한다.

끝도 없이 펼쳐진 모래사막에서 내가 예전에 흘린 신분증을 찾아야 한다.

내가 나라는 걸 증명할 수 있는 무언가.

어딘가에는 반드시 있을 그 무언가를 찾아내야만 한다.

일단 걸었다.

걸었는지 날아오르는 건지 순간이동을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쏜살같이 지나가는 우주의 풍경이 양옆으로 작아지다가 이내 자취를 감추었다.

뜨거운 항성, 메마른 고원이 가득한 별, 누구보다 빛나는 혜성, 천천히 회전하는 은하수, 예전 지구처럼 신록이 푸르른 행성, 어둠 속에서 차갑게 얼어붙은 위성도 나와는 완전히 다른 존재다.

‘나’는 어디 있을까?

오아시스를 찾아 헤매는 방랑자처럼 끝없이 걸었다.

언젠가는 ‘나’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면서.

두근 두근 두근

얼마나 이동했는지도 모르겠다.

우주의 가장 구석이라고 할만한 곳.

그렇게 빛나던 별들이 모조리 자취를 감추고 칠흑 같은 어둠만이 암약하는 곳.

악취가 진동해서 근처에 있기만 해도 이성을 휘발시킬 것만 같은 곳에서, 나는 보았다.

블랙홀.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아귀를.

두근 두근 두근

나도 모르게 홀린 듯이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 번 더러운 진창에 발을 들이자, 절망과 공포의 손길이 내 발목을 붙잡고 아래가 보이지 않는 수렁으로 끌어들이기 시작한다.

그 익숙하고도 익숙한 그 느낌에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저항하지 않고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점점 그 핵심으로 다가간다.

내 특유의 사악함이 고개를 쳐들자 끈적하고도 더러운 것들이 꿀을 발견한 꿀벌마냥 달라붙어 내 힘이 되어주었다.

이 블랙홀이라면, 크기를 알 수 없는 진정한 절망의 군세라면, 난 세계 최강이 될…

번뜩

“어?”

갑자기 어두운 심연 너머에 어떠한 ‘눈’이 나타났다.

정확히 말하면 눈이라고도 할 수 없이 느릿하게 유영하는 무언가.

하지만 ‘주시’한다는 점에서 눈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그 무언가다.

크르르르르르르

세상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 없는 흉포한 포효가 내 존재와 영혼을 뿌리째 뒤흔들어 놓는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이곳은…주인이 있는 집이었다.

내가 달콤하다고 느꼈던 이 마이너스한 감정들은 모두 저 알 수 없는 존재의 소유물.

나는 그저 좀도둑이었던 거다.

쿠워어어어어

무언가 이상을 발견한 미지의 존재가 끊임없이 ‘주시’하자 중심핵으로부터 엄청난 흡입력이 발생한다.

의식이 속절없이 빨려 들어간다.

바보라도 저 핵에 접촉한다면 저 괴물이 나의 존재를 확실하게 ‘인식’하고 그대로 ‘융합’될 거다.

“여기까진가…”

저항할 수가 없다.

끝이 가늠되지 않은 진창 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저 미지의 존재는 내 선배와도 같은 존재다.

절대 못 이긴다는 건 아니다.

저 존재와 똑같은 시간과 세월을 삼켰으면 이길 자신이 있지만, 완전히 자란 늑대를 호랑이 새끼가 어찌 이기겠는가?

“씨팔…이렇게 가버리다니.”

허탈했다.

그동안 사악함을 손아귀에 두고 조종하려고 그렇게 애를 썼는데 결국은 더 큰 악에 먹혀버리는 결말.

어찌 보면 나 같은 천성 악인에게 어울리는 결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눈을 감는 찰나,

화르르륵

공간마저 불태우다 못해 녹여버리는 엄청난 용암 덩어리가 어둠을 헤치고 나타났다.

내 몸에 들어오던 끈적한 어둠이 그대로 휘발되어 사라진다.

쿠워어어어어어!!!!!

청각이 존재하지 않지만 측량할 수 없는 분노가 담긴 포효소리와 함께 어둠이 썰물처럼 밀려 나간다.

덥썩

용암이 나를 휘감고 빠르게 그곳을 벗어난다.

한번 뒤로 물러났던 어둠의 군세는 자기 발등을 문 것이 맹수긴 하나 터무니없이 작다는 걸 확인하고 다시금 포효와 함께 밀려 들어왔다.

콰콰콰콰콰!!!

쓰나미가 덮쳐오는 걸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잡히면 죽느니만 못한 신세가 된다는 건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한참을 도망치자 수없이 많은 별이 반짝이는 은하계가 나타났다.

추격은 거기까지였다.

크르르르르…

나지막한 울음소리와 함께 미지의 존재는 다시 심연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와 함께…내 의식이 그대로 심상 세계를 벗어났다.

번뜩

눈이 떠졌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난 족자 공간이었고, 아무것도 변한 게 없…

“하윽…”

뭐지? 마유의 상태가 좀 이상하다.

사지가 완전히 사라진 채로 상체만 남아서 낑낑대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나를 보고 처음으로 화를 낸다.

“데이몬, 너 미쳤냐? 심상 세계를 깨달으라는 말이었지, 누가 그 추악한 심연의 괴물을 자극하랬어?”

사지가 없어서 버둥거리는 그녀가 나를 노려보자, 얼떨떨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건 뭐였습니까?”

“뭐긴, 전 우주에서 배척받는 쓰레기들이 모여서 만든 끔찍한 무언가지. 넌 방금 그 녀석에게 흡수당할 뻔한 거야.”

“그렇다면…중간에 그 용암으로 이루어진 작은 빛이 마유님이었습니까?”

“그래, 내가 구해줬다.”

본의 아니게 목숨을 빚진 셈이다.

하지만 심상 세계에서 나와 맞는 그 무언가를 본 뒤로, 뭔가가 달라졌음을 느껴졌다.

조금만 명상에 잠겨도 다시 그 심상 세계를 발견하고 블랙홀을 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차올랐다.

물론 그 주시자에게 걸리는 건 위험하나, 눈에 걸리지 않을 만큼만 그 힘을 빌린다면?

아니, 정확히는 훔친다면?

악당답게, 쓰레기답게 그놈의 힘을 야금야금 처먹는다면 무언가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눈을 감고 심상 세계를 떠올린다.

한 번 들어갔으니 두 번은 어렵지 않다.

그 ‘눈’을 조심하면서 끄트머리만 살짝 가져온다.

스스스스

불길한 바람 소리와 함께 내 머리 위로 끔찍한 검은 소용돌이가 떠오르고.

끈적한 손길이 내 몸을 감싸면서 검은색 핏줄이 피부에 돋아난다.

눈을 번쩍 뜨자 원래 있어야 했던 검은색 동공 대신에 죽음의 아지랑이가 일렁거리는 심연의 눈이 자리 잡았다.

“…상태창.”

­상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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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태창, 레벨, 스테이터스

어느 것도 나를 ‘정의’하지 못한다.

지금 이 상태가 아마 아유나가 원한 신력을 사용하는 상태의 나.

힘이 단순히 세졌다는 건 모르겠다.

분명한 건 저 넓은 심상 세계의 일원이 되었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용사가 신력을 담고 몸이 박살 난 이유가 있었군.”

용사의 스킬 불굴의 의지라는 건 아마 천사 놈들이 억지로 그의 의식을 심상 세계에 도킹하는 기술이었을 터.

내면에 대한 깊은 고찰도 없이 단숨에 진리의 편린을 엿보았으니 몸이 고장 나는 것만으로 끝난 게 다행이다.

“데이몬, 나 좀 도와주련?”

상념에 젖어있는 나를 마유의 목소리가 일깨웠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날 도와준 대가로 주시자에게 당해 팔다리가 모두 소멸한 마유가 등으로 바닥을 쓸고 있다.

“일단 저기 의자에만 좀 올려…”

콰지직

그대로 목을 잡고 들어 올렸다.

눈이 휘둥그레진 마유의 붉은 동공이 확장된다.

“케, 케켁…어째서…난 널 도와줬…”

내 손에 잡혀 꼴사납게 몸부림치는 그녀를 탐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냥 마음에 안 들어서.”



사상 최악의 주인공〈 161화 〉 그냥 마음에 안 들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