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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3화 〉 사과맛 비슷해



〈 183화 〉 사과맛 비슷해

* * *

내 등장이 워낙에 극적이었던 탓일까?

릭톤 영주와 그의 남동생 남작 나부랭이는 얼빠진 얼굴로 나를 쳐다보다가 화를 냈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농노 놈이 미쳤구나!”

“론 훈작사, 정말로 이 정신 나간 놈이 수행원으로서 최선이었나요?”

영주와 남작, 남작 부인이 차례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폭언을 퍼부었다.

그런 이들을 위해서 내가 특별히 다시 한번 내 정체를 공개해줬다.

“나이를 처먹더니 가는 귀들이 먹으셨나? 나 데이몬 베르너라고. 백작가 막내아들 말이다. 이젠 정당한 백작가의 후계자 중의 하나라고 봐야겠지.”

차분하게 다시 한번 말해줬으나,

“거짓말 마라! 망나니 공자 놈은 마녀의 숲에 가서 뒤진 지 오래다!”

“형님 말씀이 맞다, 벌써 모습을 안 보인 지 1년이 다 되어가고 있는데 어디서 귀족을 사칭하는 것이냐!”

“저놈은 매타작으로 부족할듯싶군요. 목을 잘라서 효수하도록 해요.”

하, 답답하네.

왜 내가 데이몬이라는데 믿지를 않는 거야?

레벨이 올랐으면 몰라.

옛날처럼 레벨 1인데도 믿지 않는다.

“무엇보다 내가 알던 그 망나니 놈은 키도 작고 생긴 것도 볼품없었다. 적어도 너와는 달랐지.”

“20살이면 아직 더 클 수 있는 나이 아닌가? 실제로 키가 더 컸다. 얼굴은...성형수술했고.”

“헛소리 마라!”

환골탈태했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아무튼, 나는 내 신원을 최대한 어필했다.

끝까지 믿지 않으며 쌍욕을 박은 건 저쪽이니 더는 참지 않는다.

“론, 이제 꺼져라.”

“예스! 마이 로드!”

내 말 한마디에 냉큼 벽에 붙어선 론을 본 릭톤 영주가 정말로 긴가민가하기 시작했다.

이게 불쾌한 장난인 건지, 아니면 정말로 망나니에 루져라고 불렀던 데이몬이 용이 돼서 돌아온 건지 분간이 안 되기 시작한 거다.

당연히 론을 붙잡고 사실 여부를 물을 수밖에 없다.

“론, 지금이라도 이런 우스꽝스러운 짓은 그만두게나. 그렇지 않으면 조카딸과의 혼례를 재고하겠네.”

“영주님, 저야말로 훈작사의 위(?)를 걸고 맹세하건대, 저분은 마녀의 숲에서 생환하신 데이몬 베르너님이 맞습니다.”

귀족으로서 작위를 건다는 말은 모든 것을 건다는 말이나 마찬가지.

심지어 목숨보다도 명예를 중요시하는 게 판타지아 대륙의 귀족이었으니.

이제 론의 행동이 장난 따위가 아닌 100% 진심임을 깨달은 릭톤 영주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그, 그게 정말인가?”

“속고만 살았나? 내가 몇 번이나 데이몬 베르너라고 말했는데도 믿지 않다니.”

그제야 나를 보던 귀족들의 눈초리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특히나 릭톤 영주는 눈알이 빠질 것처럼 나를 쳐다보았는데, 솔직히 여자도 아니고 아저씨가 그따위로 쳐다보니 눈을 파내주고 싶었다.

그렇게 10초 정도를 날 쳐다보았을까?

영주의 얼굴에 경악이 서리기 시작했다.

“저, 정말로 데이몬 베르너 공자님이 맞으신 것 같군요. 예전에 제가 기억하던 얼굴형이 남아있습니다.”

나름 영주라고 예전에 나를 본 적이 있나 보지?

하지만 너무 늦었다, 영주놈아.

난 이미 너희를 어떻게 할지 결정한 상태거든.

그때 마침, 안 그래도 조용히 불타고 있는 내 가슴 속에 이 멍청한 시골 귀족들이 기름을 부어 넣었다.

“정말 데이몬 베르너 공자님이면 왜 돌아오신 거죠? 그냥 마녀의 숲에 계속 계시지 그러셨어요?”

딸년의 비웃음부터 시작해서,

“어차피 후계 구도에서 밀려나신 분이 이제 와서 저희에게 모습을 드러내신 이유를 모르겠군요.”

그년 어머니 또한 씰룩대는 입꼬리를 감추지 못하고 경멸의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영주의 남동생이자 봉토도 없으면서 남작 행세하는 나부랭이가 그 마침표를 찍는다.

“전대 백작님이 돌아가신 시점부터 당신은 아무것도 아니니까 지금이라도 다시 마녀의 숲으로 돌아가시죠.”

보통 아무리 망나니라고 하더라도 같은 귀족인데 이렇게까지 망신을 주진 않는다.

대충 웃는 얼굴로 타이르다가 돌려보내는 게 일반적이지.

하지만 지금 이 가족들은 나를 헐뜯는 데 혈안이 되어있었고, 그 이유가 대충이나마 짐작이 갔다.

그 이유는 바로 크래스 장원.

원래 평민 출신 훈작사 론이랑 자기 딸이 결혼해서 자식을 낳으면 무난하게 영지를 이어받는 것이었는데.

난데없이 옛 주인인 내가 나타나서 영주라 칭해버리면 자신들이 먹을 수 있던 영지가 날아가 버리니 대놓고 모욕을 주는 것이다.

물론 딸년을 론 대신 나에게 주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그건 나름대로 문제일 수밖에 없는 게, 나중에 제임스형이나 로이형에게 걸리면 좋은 꼴은 못 볼 테고.

무엇보다 망나니인 나에게 딸을 팔아치우긴 싫었을 테니, 그들로서는 론이 최적의 신랑감이었다.

내 등장에도 놀란 것도 잠시, 빠르게 머릿속 계산을 끝내고 나에게 어떻게 행동할지 결정하자마자 그렇게 행할 수 있는 게 바로 귀족이란 족속들이었고.

이건 내가 있던 지구에서 만났던 수많은 상류층 인간들 또한 다르지 않았기에, 저들의 눈동자에 어린 탐욕을 쉽게 읽어낼 수 있었다.

“론, 저런 레벨 1짜리 끈 떨어진 망나니에게 귀족 대접해줄 필요 없네.”

“맞네. 자네가 본성 출신 평민이라 귀족들만 보면 두려워하는 게 이해는 간다만, 귀족도 귀족 나름인 걸세.”

팔짱을 끼고 묵묵히 그놈들의 망언을 들었다.

어디까지 씨부리나 한번 보자는 마음이었다.

한편, 론은 내 진면목을 알고 있으니 귀족 놈들이 무슨 감언이설을 해도 절대 넘어가지 않았고.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뿐이었다.

자기를 끌어들이지 말라는 명백한 부정의 표현.

그 모습에 답답함을 느끼고 옆에 있던 모녀들도 합세했다.

“론 훈작사, 자네도 이제 귀족이야. 봉토를 가진 영주라고. 크래스 장원의 정당한 주인은 돌아가신 전 백작님이 임명하신 저 짐승 새끼가 아니라, 현 제임스 백작님이 임명한 자네라는 걸 알아야지.”

잠깐만, 짐승 새끼?

생각해보니까 저 밀프년이 아까 나보고 여자만 보면 좆을 주체 못 하고 달려드는 짐승 새끼라고 했었지.

귀족 여인이랍시고 고상한 척은 다 하면서 막상 쓰는 단어는 정말 저렴하기 그지없는 년이네.

속으로 혀를 끌끌 차고 있었는데, 이게 끝이 아니었다.

“어머니 말이 맞아요. 론, 저희의 결혼을 생각해봐요. 사랑의 결실이 맺어질 때 아이를 키울 땅이 없으면 어떻겠어요? 무엇보다 저는 땅이 없는 귀족에게는 시집가고 싶지 않아요.”

딸년까지 결혼을 안 해주겠다고 반쯤 협박을 한다.

솔직히…재밌었다.

이런 게 바로 희극이고 이야기 아니겠는가.

레벨이 낮고 힘이 없던 시절에 이런 일을 당하면 화를 벌컥 내거나 숨어서 칼을 갈았겠지만.

이제 나와 대등한 라인에 서지조차 못하는 미물들이 저러는 걸 보니 뜨거운 분노보다는 차가운 냉소가 나올 뿐이다.

“다 끝났나?”

빌어먹을 놈들이 한바탕 다 쏟아낸 것 같길래 입을 열자 아무도 내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릭톤 영주가 큰소리로 집사를 부른다.

“집사! 들어오게!”

영주의 말에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는지 칼같이 들어오는 집사.

“무슨 일이십니까?”

“당장 병사를 불러 데이몬 공자를 잡게나. 내 직접 저자를 끌고 제임스 백작님에게 끌고 가야겠어.”

오호라? 이제는 체포 후 압송할 생각까지?

어쨌든 망나니 놈이라도 후계자 계승권이 있는 놈이니 날 첫째에게 갖다 바치면 포상이라도 받을 거로 생각하는 거겠지.

게다가 내가 사라지면 크래스 장원까지 저절로 굴러떨어지니 일거양득이라 생각한 거로군.

철컥철컥

무장한 10여 명의 병사가 우르르 들어오더니 나를 둘러쌌다.

귀족들은 태연하게 앉은 채 고상한 척이란 척은 다 하면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 나오는지 반응을 보겠다는 저 표정.

몰락하는 나를 안주 삼아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겠다는 추악하고 기름진 마음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마음에 든 것뿐이지, 저놈들이 나에게 이빨을 드러낸 순간 자비 따위는 없다.

그래도 최후통첩 정도는 해야겠기에 릭톤 영주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릭톤 영주, 이것이 베르너 백작가의 정당한 후계자를 대하는 자네의 대답인가?”

여유롭게 유리잔에 담긴 와인을 마시던 사내는 나를 보더니 피식 웃었다.

“정당하진 않지요. 이미 후계자리는 굳어진 지 오래이니깐요. 방금 한 말은 베르너 성에서 제임스 백작님 앞에서 하시길.”

더는 상대하기 싫다는 듯이 파리 내쫓는 것처럼 손을 휘휘 내젓자 나에게 다가온 덩치 좋은 병사 두 명이 양쪽으로 팔짱을 꼈다.

마치 지구에서 경찰이 범죄자 호송하듯이 끌고 가려는 거다.

지금 귀족 연놈들의 머릿속에서는 개처럼 짖으며 질질 끌려가는 내 모습이 상상되고 있겠지.

하지만 생각대로만 현실이 이루어지면 그게 현실이겠어?

몸에 힘을 줘서 버티자, 두 덩치가 무언가에 덜컹­걸린듯 나를 데려가지 못했다.

토마토처럼 벌게진 얼굴로 낑낑댔지만, 땅에 박힌 돌마냥 내 발이 바닥에서 떨어지는 일은 없었다.

“어엇?”

“왜 이렇게 안 움직여?”

당연히 안 되겠지.

그래봐야 레벨 7, 8정도 되는 놈들이 무슨 수로 도합스텟 300에 가까운 날 끌고 가?

서늘한 눈빛으로 쳐다봐주니 뭔가 불길한 예감을 느낀 사내가 더욱 힘을 줘서 날 끌고 가려고 했고.

이 모습을 본 릭톤 영주가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아니, 평상시에 빵과 고기는 그렇게 많이 처먹고 힘을 그리 못 쓰나? 고작 레벨 1짜리 약골 귀족 놈…”

릭톤 영주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양팔에 팔짱을 낀 채 용을 쓰는 놈들의 팔을 손으로 잡아 강하게 쥐었다.

엄청난 악력에 우드득 소리가 나며 너무나도 쉽게 부러지는 병사들의 팔.

고통의 겨운 그들의 비명이 내 귀를 감미롭게 적셨다.

“끄아아악!”

“아아악!”

당연하게도 두 덩치는 내 팔을 놓쳤고, 자유를 얻은 나는 주먹을 꽉 쥐고 왼쪽 놈의 얼굴을 향해 날렸다.

퍼억

수박이 제대로 터졌다.

두개골이 깨지면서 뇌수와 혈관 등이 섞인 정체불명의 액체가 바닥에 쏟아졌다.

“꺄아아악!”

“이, 이런!”

평생 이런 잔인한 장면을 본 적 없는 귀족들이 비명을 질렀고, 릭톤 영주가 당황해서 명령을 내렸다.

“저 미친놈이! 당장 죽여라! 무기를 써도 상관없다!”

이젠 귀족 살해죄까지?

아예 안면몰수하고 가기로 했구나.

사실 그래 주길 바랬다.

이렇게 남 생각 못 하는 놈들이 자기가 당하는 처지가 되면 카르마가 쫙쫙 뽑히거든.

“으아아아!!”

검을 든 병사 한 명이 나 여기 있어요~하는 기합과 함께 다가왔다.

양손을 머리 위로 치켜든 사내의 다음 공격은 누가 봐도 높게 든 검을 내리치는 수직베기다.

저 녀석이 인지도 못 할 속도로 손을 내질러 가슴 속에 손을 넣어줬다.

푸욱

순식간에 가슴뼈를 부수고 들어간 내 손이 그 순간까지도 두근대는 그의 심장을 갈취했고.

섬뜩한 소리와 함께 산 채로 심장이 적출된 놈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가슴에서 꺼내진 심장을 보더니,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절명했다.

“으어…”

“어어?”

맨날 산짐승이나 잡아봤을 법한 오합지졸 병사들에게는 이 정도만 해도 충분히 충격적인 장면이었는지 날 보며 주춤한다.

왜 이래? 이제 시작인데.

손에 들린 심장을 잠시 쳐다보았다.

적출된 것도 인지하지 못하고 여전히 두근대는 심장.

맛있어 보여서 한 입 베어 물었다.

우적우적

“미, 미친!”

“심장을 먹고 있어.”

“말도 안 돼…”

경악하는 놈들에게 미소를 지어주며 실시간으로 심장 먹방을 때려준다.

이 맛있는 별미를 모르는 불쌍한 녀석들을 동정하면서 말이다.

말끔히 심장 하나를 먹어 치우자, 실내에 있는 모두가 움찔하며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런 그들을 향해 입가에 흐른 피를 쓱 닦으며 무슨 맛인지 알려주었다.

“대충 사과맛 비슷해.”

* * *



사상 최악의 주인공〈 183화 〉 사과맛 비슷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