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화 〉 망나니가 뭔지 보여줄 시간
* * *
15명의 월랑대를 이끌고 페이튼 영지로 달렸다.
수인족 여전사들은 필요에 따라 사족보행을 할 수 있기에 릭톤 영지에서 페이튼 영지까지는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아마 제대로 길을 닦고 말을 달리면 1시간 이내로도 도착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는 환수체로 변한 루나의 등에 타고 이동했다.
물론 경신공을 발휘하면 월랑대원 못지않은 속도로 달려갈 수 있겠으나.
새끼코끼리 크기의 늑대를 타고 달리는 게 더 멋있어 보여서 일부러 승랑(?)을 한 채로 움직였다.
어느새 도착한 페이튼 장원.
처음 그곳을 보고 든 생각은 예상보다 꽤 크다는 점이었다.
역시 사람 2천 명은 적은 숫자가 아니다.
게다가 시장이 있다는 말은 유동 인구가 많다는 말.
최소 2천이지, 많을 때는 그 두 배 숫자인 4천까지도 늘어날 수 있을 법했다.
빠르게 훑어서 장원의 수비 상태를 살폈다.
내가 이렇게 빨리 오리라고는 염두에 두지 않았는지 딱히 전투 태세가 갖춰져 있진 않았다.
하지만 목책으로 벽을 세워뒀던 크래스 장원이나 릭톤과 달리 이곳은 석벽으로 경계를 그어놨다.
그렇다고 엄청 높은 수준의 성벽은 아니지만 말이다.
원래라면 저 괘씸한 놈들을 기습해서 모조리 도륙 내고 싶지만, 어쨌든 내 가신이 될 가능성이 있는 놈들이니 마지막 기회를 줘야겠지.
“론.”
“우웩! 웩!”
옆에서 구역질 소리가 들린다.
링링의 등에 업혀 온 론이 속도감을 이기지 못하고 멀미를 해서 안에 들어있는 음식을 게워내는 중이다.
아까운 닭다리를 다 뱉어내는군.
치킨에 대한 예의가 없는 놈이다.
“론, 대답해라.”
“쿨럭, 컥! 네, 백작님! 우웩! 말씀하십시오.”
저렇게 토악질하는 걸 보니 영 믿음이 안 가는데.
“페이튼 영지에 가서 데이몬 백작이 현재 성문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최대한 빨리 영접하라고 해라.”
이러려고 론을 데려왔다.
수인녀를 사절로 쓰기도 애매하고 내가 직접 페이튼 병사들에게 환영식을 준비하라고 하면 모양 빠지잖아?
훈작사 출신에 다 쓰러져 가는 장원 영주라면 내가 보낼 사절로는 사이즈가 딱 맞다.
“빨리 안 가? 음식이 아니라 네 놈 내장을 두 눈으로 확인하게 해줄까?”
“아니요! 가겠습니다! 당장 가겠습니다!”
내가 정말로 그렇게 할 놈이라는 걸 아는지 화들짝 놀란 론이 입가에 묻은 토사물을 대충 손등으로 훔치고 부리나케 페이튼 장원으로 달려갔다.
눈과 귀에 내공을 집중시켜 안력과 청력을 키웠다.
현재 나와 월랑대원들은 페이튼 장원에서 약간 떨어져 있어서 저들은 우리를 못 보고 나와 월랑대원들은 페이튼 영지를 훤히 다 보고 듣는 상황.
론이 드디어 페이튼 장원의 문 앞까지 도착했다.
경비병들이 숨을 헐떡이며 달려온 론을 경계하며 들고 있던 창을 교차로 그어 출입을 막았다.
“누구냐? 신원을 밝혀라!”
“헉헉…나는 크래스 장원 영주…가 아니라 훈작사 론이라고 한다.”
“훈작사요?”
귀족들이야 훈작사를 귀족도 못 된 반푼이로 생각하지만, 평민들 사이에서는 훈작사만 해도 인생 성공한 거다.
다만 현재 론의 모습이 딱히 훈작사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게 문제랄까.
“그래. 나는 데이몬 백작님의 사절로 이곳을 방문했다. 그러니 나를 영주님께 안내하도록.”
“…잠시만 기다려주시죠.”
경비병 한 명이 황급히 장원 안쪽으로 들어갔다.
10분쯤 지났을까?
그때까지도 성문은 굳게 닫혀있었고, 성벽 위에는 경비병들이 활을 들고 론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성문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론의 머리 위로 갈색의 고형물이 후드득 쏟아졌다.
“어억!”
깜짝 놀란 론이 뒤늦게 피하려고 했으나, 성벽 위에서 떨어지는 똥물 공격을 예상하기란 당연히 불가능했고.
그대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똥물을 뒤집어썼다.
“킥킥킥킥!!”
“훈작사 나리, 아주 잘 어울리십니다요!”
병사들의 비웃음 소리와 함께 제대로 당했다는 걸 깨달은 론이 당황감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게 무슨 짓이냐! 나는 데이몬 백작님의 사절이다. 나를 이렇게 푸대접해놓고 너희들이 무사할 것 같냐!”
노발대발 화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의 입가에 머무르는 조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훈작사 나리라고 하시더니, 왜 이렇게 눈치가 없으실까?”
“저희도 다 듣는 귀가 있습니다. 원래도 개망나니로 유명한 귀족 아닙니까?”
“비빌 곳 없어서 페이튼으로 오신 모양인데, 저희 동네 그렇게 만만한 곳 아닙니다.”
“맞습니다. 괜히 잘살고 있는 동네에 와서 거드름 피울 생각 마시고 다른 동네로 꺼지시죠.”
병사들이 론을 조롱할 때마다 이를 듣고 있는 다른 경계병들도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린다.
“크하하하하!!!”
“킥킥킥!!”
“정말 꼴불견이야, 큭큭.”
성 내에 울려 퍼지는 온갖 멸시와 조롱의 시선을 느끼며 론이 최후 확인을 한다.
“너희들의 지금 행동. 단독 행동이 아닌 페이튼 영주의 뜻이라고 봐도 되겠는가?”
그의 말에 낄낄대며 웃던 경비병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고 눈동자에는 적대감이 넘실거렸다.
“어이, 훈작사님. 그거 협박입니까?”
“좋게 좋게 보내드리려 했는데 안 되겠네.”
스르르릉
몇몇 경비병들이 허리춤에 매달고 있던 검을 빼 들고 서서히 론에게 다가왔다.
론은 덩치도 어느 정도 있고 레벨도 낮은 편은 아니지만, 무기를 든 병사들이 떼거리로 덤벼드는 걸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놈도 아니다.
결국, 꼴사납게 뒷걸음질 치며 멀리서 짖어대는 게 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짓이었다.
“너희들은 후회할 거다! 데이몬 백작님이 얼마나 무서운 분이신데!”
똥 냄새를 풍기며 도망가는 론을 보며 병사들은 피식 웃으며 다시 칼을 납검하며 그를 비웃기 바빴다.
“진짜 별거 없는 놈들이 꼭 저런 말 하더라.”
“맞아. 두고 본다느니 가만두지 않겠다느니.”
“저기요! 훈작사 나리! 거기서 한마디만 더하면 말 타고 쫓을 테니 어깨 위에 물건 간수하고 싶다면 빨리 도망가쇼!”
“크핳하하하!”
온갖 종류의 경멸과 무시를 등 뒤로 받으며 퇴장한 론이 헐레벌떡 내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백작님! 저 썩을 놈들이…”
화가 나서 씩씩대며 오던 론은 일대를 뒤덮는 압박감에 붉어졌던 안색이 삽시간에 창백해졌다.
수인녀들은 서늘한 표정으로 각자의 무장을 점검하고 있었다.
전원 레벨 30대 중반의 엑스퍼트급 고수들이 기운을 풀풀 내뿜고 있었고, 나 또한 도합스텟 300가량의 기세를 여과 없이 뿌렸다.
그동안 갈리아 제국 검투사들과 용사와 성녀를 만나서 그렇지, 이런 시골 놈들에게는 도합스텟 300이 아니라 그 절반인 150도 과분하다.
“론? 무슨 할 말이라도 있나?”
똥물 뒤집어쓴 모습이면 충분히 보고가 된 거지.
뭘 또 와서 미주알고주알 얘기하려 그래?
애새끼도 아니고 말이야.
“…아닙니다…”
내 특유의 사악한 미소를 확인한 론은 어깨를 부르르 떨며 동정심 어린 표정으로 페이튼 장원 방향을 바라보았다.
저들의 운명이 어찌 될지 론도 반복 학습을 통해 충분히 깨달았을 터.
“나와 월랑대 먼저 갈 테니 대충 상황 정리됐다 싶으면 따라 들어와라.”
“조, 존명.”
론이 고개를 숙이는 걸 확인하지조차 않고 그대로 루나의 옆구리를 발뒤꿈치로 가볍게 때렸다.
아름다운 은빛 털의 늑대는 이때만 기다렸다는 듯이 엄청난 속도로 달려 나갔다.
쐐애액
갑자기 풀숲에서 튀어나오는 거대한 늑대.
페이튼 영지로 쇄도하는 맹수를 보고 경비병들이 혼란에 잠겼음은 당연했다.
“저, 저게 뭐야!”
“저거 늑대 맞지?”
“저렇게 큰 늑대도 있어?”
망나니 공자의 사절을 자처하는 훈작사 놈을 쫓아내고 그놈을 비웃어주며 평화로운 오후를 보내려고 했던 경비병들은 깜짝 놀라서 황급하게 나무로 된 성문을 닫았다.
콰앙
“화, 화살을 메겨라! 저 맹수가 장원 안에 들어오게 해서는 안 된다!”
“그래봐야 짐승일 뿐이야. 제깟 놈이 혼자서 할 수 있는 건 없다.”
“사냥한다고 생각해!”
성문이 닫히자 심적으로 안정감이 들었는지 병사들이 정신을 차리고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런 페이튼 장원을 보며 루나가 입을 열었다.
“주인님, 루나 말하고 싶다멍.”
“꼭 필요한 상황에서는 말해도 된다고 했던 거 같은데.”
“맞다멍! 나 환수체일 때 스킬 좋은 거 하나 있다멍! 보여줘도 되겠냐멍?”
좋은 스킬이 있다는데 굳이 거절할 이유는 없지.
바로 고개를 끄덕여 승낙의 뜻을 표했다.
“좋다.”
“알았다멍! 저 녀석들 깜짝 놀랄 거다멍!”
루나가 씩 웃었는데, 늑대라서 그런지 평범한 사람이 보면 간 떨어질 만큼 날카로운 송곳니가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페이튼 장원의 성문 앞으로 다가온 루나.
이미 성벽 위의 병사들은 그녀에게 활을 겨눈 채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눈이 좋은 경비병 한 명이 늑대 위에 타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외쳤다.
“누구냐? 신원을 밝혀라!”
긴장된 기색이 역력한 병사들에게 내 정체를 밝혀주었다.
“네놈들이 똥물을 뒤집어씌우고 돌려보낸 놈의 주인이다.”
“…데이몬?”
저 싹퉁머리 없는 놈이.
평민 주제에 내 이름 뒤에 ‘님’자도 안 붙이는 거 봐라.
“그래. 내가 데이몬이다.”
예상치 못한 강렬한 등장이어서일까?
순간적으로 성벽 위에 침묵이 감돌았으나, 이내 그 적막은 웃음소리로 뒤덮였다.
“킥킥킥! 이젠 자칭 백작님이 직접 오셨네.”
“좀 더 가까이 오시죠. 그쪽도 똥물이 필요하신 듯한데.”
“나으리, 그 늑대는 어디서 구한 겁니까? 가죽 벗겨서 페이튼 시장에 오십쇼. 5실버에 사드리겠습니다!”
“야, 저 정도면 10실버는 나간다고! 나으리 저한테 파십쇼! 제가 더 후하게 쳐 드립죠.”
내 여자 루나의 피부를 흥정하는 녀석들의 얼굴을 잘 기억해 두었다.
저들의 얼굴에서 여유로운 웃음이 얼마나 갈까?
속으로 생각하는 사이.
루나가 속으로 안달이 났는지 나에게 물어왔다.
“주인님, 언제까지 참으면 될까멍?”
“난 너에게 참으라고 말한 적이 없다.”
내 말의 숨겨진 의미를 알아들은 루나.
망설이지 않고 성문을 향해 입을 쫙 벌렸다.
병사들이 그 모습을 보고 과장되게 코를 막으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우욱, 늑대 입 냄새 봐.”
“얼마나 양치를 안 한 거야?”
“잘 생각해. 저게 늑대 입 냄새일지 자칭 백작 나으리 입 냄새일지 말이야.”
“푸하합!!”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낄낄대는 병사들.
그런 그들을 향해 루나의 입에서 서서히 마나가 모이기 시작한다.
설마…그거 아니지?
나도 루나가 환수체일 때 스킬은 잘 모른다.
악마의 눈에서는 루나의 고유 스킬이 환수체라고만 나와 있었고, 그 상세 스킬까지는 알려주지 않았기에.
그녀의 입에서 압축된 에너지가 소용돌이를 그리며 발광하기 시작하자, 병사들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서서히 사라졌다.
“간다멍! 울프문 브래스!!!”
울프문 브래스!
이름 심각하게 유치해!
근데 위력은 존나 쎄!
쿠콰콰쾈!!!
늑대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 엄청난 광선이 사방을 잠식했고.
예쁜 일직선으로 그어진 브래스가 그대로 나무로 된 성문에 적중하는 순간,
콰아아아앙!!!
제법 두께가 되던 성문이 허무하게 산산조각이 났다.
자욱한 연기가 피어올랐는데, 가루가 된 나뭇조각들이 바람을 타고 주변을 날아다녔다.
병사들의 표정들이 제법 볼만하다.
믿고 있는 구석이 사라졌을 때의 표정들은 어찌나 저렇게 다 똑같은지.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더 본때를 보여줘야겠다.
“루나, 가자.”
“아우우우우!!!”
힘찬 늑대의 하울링과 함께 커다란 구멍이 뚫린 성문을 향해 미친 듯이 돌격했다.
진정한 망나니가 뭔지 보여줄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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