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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화 〉 마음에 드는 표정이었다



〈 191화 〉 마음에 드는 표정이었다

* * *

권사라고 해서 검을 못 쓴다는 건 편견이다.

마유에게 시험을 치르면서 나는 권법뿐만 아니라 검이나 창, 도끼 등도 익혀두었다.

족자 공간 안에서는 남는 게 시간이었기에 배우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셰릴이나 에밀리만큼은 아니더라도, 웬만한 어중이떠중이보다는 검을 잘 다룰 수 있다고 자신한다.

그리고 오늘.

나는 페이튼 영지 공성전을 위해 특별히 검을 들고나왔다.

이유는 간단했다.

늑대 위에 타서 주먹을 휘두르기보다는 검을 휘두르는 게 좀 더 있어보였으니까.

루나를 타고 부서진 성문 안으로 난입하자, 혼비백산한 병사들이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마, 막아라!”

“화살을 쏴!

“침착해라! 포위해서 잡으면 저놈도 별수 없다!”

나름 기합이 잘 들어가 있네.

릭톤 영지보단 낫다.

거긴 자경단 느낌이었고, 여긴 경비병이라고 말할 정도는 된다.

하지만 레벨 한 자릿수 궁수들의 애먼 화살에 맞아줄 정도로 나와 루나는 느리지 않았다.

“쏴라!!”

퓨퓨퓨퓩!!

좆에서 그거 나오는 소리 아니다.

목숨을 해할 수도 있는 화살이 나에게 쏟아지는 소리다.

나름 절체절명의 순간이란 말이다.

긴장감을 주고 싶어서 말은 이렇게 했는데, 솔직히 너무 느려서 맞아주기가 힘들었다.

루나가 펄쩍 뛰자 그녀가 사라진 자리에 뒤늦게 화살비가 떨어졌다.

이미 나는 경비병 앞에 와 있었다.

바로 정문을 지키던 놈이다.

“안녕?”

“으…어어어…”

그새 언어를 잃어버렸군.

말하는 기능을 잃어버린 머리통은 필요 없겠지.

바로 검을 휘둘러 어깨 위의 물건을 제거해 주었다.

서걱!!

어깨의 부담이 한결 덜해 보이네.

그래, 앞으로는 쭉 그렇게 살아라.

굳이 왜 힘들게 머리통을 달고 다니냐?

이 정도면 나 데이몬.

배려의 아이콘이라 할만하다.

“으아아아!”

겁에 질린 다른 병사가 몸을 돌려 황급히 도망가는 게 보인다.

저 녀석도 머리가 커서 달리기가 느린 것 같으니 더 빨리 달릴 수 있도록 만들어주자.

루나가 도약하자 병사의 도망은 의미가 없어졌고, 어느새 뒤를 잡은 내가 주저하지 않고 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뎅겅­소리와 함께 살이 찢어지고 뼈가 부서지는 쾌감이 손에서 느껴졌다.

날아간 머리는 하늘 높이 떴다가 이내 진흙탕에 처박혔다.

부릅뜬 두 눈에서 자기 죽음을 믿지 못한다는 감정이 보이자 하초가 약간 단단해졌다.

치솟는 욕망은 나중에 페이튼 영지에 사는 계집 한 명 잡아서 보지 쑤셔주면 될 일이고.

그보다는 사냥이 우선이다.

사람이 많은 도시라서 병사들도 백 단위로 있었고, 그 말은 목을 날릴 수 있는 놈들도 한참 남았다는 의미다.

“마, 말도 안 돼…”

“저건 인간이 아니야…”

이 정도로 놀라기엔 조금 이른데.

“루나, 너도 하나 보여줘야지?”

“알겠다멍!”

내 명령만을 기다렸는지 루나가 고개를 숙이고 빠르게 쇄도해서 멍하니 있는 병사 하나에게 몸통 박치기를 날렸다.

그녀의 순간속도는 거의 100km/h 수준이니 사실상 고속도로에서 자동차가 달리는 속도다.

눈 한번 깜짝이자 어느새 코앞에 와있는 은빛 늑대.

몸이 경직된 병사는 회피기동조차 하지 못하고.

정통으로 부딪친 병사는 자신도 인지하지 못할 속력으로 벽에 부딪히고 땅에 떨어졌다.

목이 꺾여선 안 될 방향으로 꺾인 걸 보니 살았는지 죽었는지는 따로 확인이 필요 없을 듯하다.

“이건…안 돼…도망가! 모두 도망가라고!”

이제야 견적이 좀 나오나 보네.

드디어 이성적인 판단을 하는 병사가 생겼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난 루나만 데려온 게 아니다.

월랑대주 링링을 포함한 월랑대원 15인은 내가 성문 안쪽에서 온갖 어그로를 다 끄는 동안 몰래 성벽을 타고 넘어왔다.

푹 푸푹

“커헉!”

“어어억!”

성벽을 넘어온 수인녀들은 지체없이 궁수들을 제압했다.

뒤에서 목을 한 바퀴 돌리거나 심장에 정권을 꽂아 넣기, 머리를 손으로 쥐고 악력으로만 터트려버리기.

정말 다양한 방법으로 병사들을 죽이는 과정은 전쟁이라기보다는 도살에 가까웠다.

“어억…”

“미친년들이다!”

“도, 도망…으아악!!”

애초에 레벨 30대 익스퍼트급 고수에 검투사 출신들 수인녀들이니 시골 영지의 경비병들이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전투는 고사하고 도주까지 불가능하다.

그렇게 나에게서 벗어나려던 페이튼 장원 경비병들은 월랑대원들에게 얻어맞다가 변변한 저항조차 못 하고 패배했다.

페이튼 공성전은 허무하게 끝났다.

사망자는 잠깐 사이에 50명.

부상자는 0명이었다.

아예 건들지 않았으면 모를까, 한 번 건드린 놈은 일격필살해서 이런 결과가 나왔다.

포승줄에 묶인 채 내 앞에 무릎을 꿇은 경비원들은 공포와 두려움으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바지가 축축하게 젖어서 바닥에 노란 흔적을 남기는 놈들도 있었다.

임무에 실패한 똥개들에게 흥미는 없어서 대충 훑어보다가 낯익은 얼굴 하나를 발견했다.

“히익!”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정체불명의 소리를 지르며 필사적으로 고개를 숙이는 놈 옆에 가서 쪼그려 앉았다.

“이봐, 경비병. 이름이 뭐야?”

내가 이 녀석의 얼굴이 익숙한 이유.

아까 페이튼 장원을 점령하기 전, 루나의 가죽을 벗기고 시장에 오면 후한 값을 쳐준다는 놈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백작님. 제가 몰라뵙고…”

“네 이름이 죄송합니다야?”

눈알을 데룩데룩 굴려서 어떻게든 이 상황을 타파하려 하지만, 이미 내 눈에 띈 시점부터 이놈의 운명은 정해진 거나 다름없다.

“그래서? 이름이 죄송합니다냐고.”

“개, 개런입니다.”

“좋아, 개런. 혹시 시장에서 모포업을 하나?”

“…그렇습니다.”

뭐야, 정말이었어?

날 놀리려고 일부러 늑대 가죽을 언급한 줄 알았는데.

개런 이놈은 정말로 동물의 가죽을 사고파는 상인 출신 경비병이었다.

“재밌군. 그러면 물어볼게. 여기 커다란 늑대는 이름이 루나라고 한다. 이 녀석 가죽을 벗겨서 너희 가게에 가면 얼마 정도 쳐줄 수 있어?”

옆에 있던 루나는 인간 말을 알아들을 수 있으니 개런이라는 사내가 자기 가죽을 벗기려고 했다는 사실에 극도로 분노하여 울부짖는다.

“크아아앙!!!”

“으악!”

코끼리만 한 늑대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1초라도 더 빨리 물어뜯고 싶다는 기색을 보이자, 개런의 이마에는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동공의 초점이 계속해서 어긋났다.

“죄송합니다…제가 몰라뵙고…”

“한 번만 더 내 질문에 대답 대신 죄송하다는 말이 나오면 오늘 네 두개골은 루나의 장난감이 될 거다.”

“히이익!”

대답을 하더라도 결과는 똑같겠지만.

굳이 뒷말에 덧붙이진 않았다.

“저, 저 정도의 늑대 모피라면 최상급이기에 최소 10골드는 될 겁니다.”

“이상한걸? 아까는 5실버에 판다고 했잖아? 가격이 좀 많이 다른 것 같은데?”

5실버와 10골드는 지구로 치면 5만원과 1천만원의 차이.

루나의 가죽 가격이 비트코인 수준으로 널뛰기를 할 수 있었는지는 몰랐네.

“설마 귀족인 나에게 사기를 치려고 했던 건가?”

“아닙니다! 그런 건 절대 아닙니다.”

“그럼 설명하든가.”

코를 후비적후비적 파면서 개런을 바라보자 이 녀석은 어떻게든 활로를 찾기 위해 맹렬하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한다.

어디에도 살 수 있는 길은 없는데.

이를 모른 채로 발버둥 치는 녀석이 꽤나 볼만했다.

“그게…”

“이미 늦었어. 잘 가라.”

“안 돼애애애!!!”

결국 만족스러운 답을 듣지 못했다.

루나는 이때다 싶어 가죽 운운한 놈의 머리통을 크게 한입 베어 물었고.

우적우적!

두개골을 아주 꼭꼭 씹어먹었다.

“으아아…”

“사, 살려주십시오!”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살려주세요!”

이 광경을 실시간으로 목격한 다른 놈들도 다음 차례가 자신이 될 수 있다는 걸 깨닫고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그 숫자가 꽤 되어서 이놈들을 어찌할까 고민하던 찰나,

“이게 무슨 짓이란 말입니까?”

노기가 가득한 호통 소리가 내 귀에 들렸다.

고개를 돌려 상황 파악 못 하고 겁대가리 상실한 놈이 누군가 확인했더니,

“오, 페이튼 영주!”

바로 영주놈이었다.

그동안 어딨었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다가 상황이 이 지경이 돼서야 나타나다니.

아주 재밌는 놈이구만.

“나 데이몬이야. 반갑다.”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지만, 온갖 화려한 옷을 껴입은 중늙은이는 내 손을 본체만체하며 나에게 화를 냈다.

“데이몬 도련님, 원래도 망나니라는 소문을 듣긴 했습니다만, 소문 이상이시군요. 용병단을 끌고 남의 영지에 와서 병사들을 해하다니요! 제임스 백작님이 이를 아시면 어쩌려고 이러시는 겁니까?”

호오라?

서신에서도 대충 느끼긴 했다만.

페이튼 영주는 나를 열받게 하는 소질이 있는 친구였다.

일단 만나자마자 악수를 거절하면서 1스택 적립.

망나니라는 단어를 쓰며 2스택 적립.

마지막으로 제임스 형을 백작님으로 호칭하며 3스택까지.

아주 거를 타선이 없는 놈이네 이거.

하도 어이가 없어서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자, 기가 죽었다고 여긴 걸까?

페이튼 영주가 여세를 몰아 더욱 나를 다그쳤다.

“이제 어쩌시겠습니까? 영지 병사 50명이 죽었으니 다시 육성하는 데만 100골드 이상 들 겁니다.”

설마 아니지?

나한테 돈까지 갚으라는 건 아니겠지?

“용병단을 고용하신 걸 보니 비상금이라도 가지고 계셨나 봅니다. 수인녀로 이루어진 용병단이라니, 이건 참 귀하군요.”

잠깐 사이에 번뜩이는 페이튼 영주의 눈빛을 놓치지 않았다.

“솔직히 데이몬 도련님에게 당장 거금을 갚으라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가신된 도리로 어떻게 전 베르너 백작님의 막내 아드님에게 돈을 청구한단 말입니까?”

뭐지?

여기까지만 들으면 정상인 거 같은데.

이랬다저랬다 하네.

“돈 대신에 저 늑대와 인물이 빼어난 여자 용병 두 명 정도를 두고 가신다면 없던 일로 해드리겠습니다.”

큭큭큭.

그럼 그렇지.

왜 귀족들은 하나 같이 머리 돌아가는 게 똑같을까?

처음에는 돌려 말해서 뭔가 싶었지만, 이 녀석도 결국 원하는 건 새끈한 몸매의 수인녀와 데리고 있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가치를 올려주는 애완늑대였다.

“……”

내가 대답을 하지 않자 고심한다고 느낀 걸까?

뱀 같은 혀를 날름거리며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데이몬 도련님, 잘 생각하셔야 합니다. 시골에만 계셔서 감이 없으신가 본데, 이미 후계전쟁은 제임스 백작님 쪽으로 기울어졌습니다.”

나름 외부물자가 왔다갔다 하는 영지다 보니 바깥소식에 대해서는 릭톤 영주보다 많이 아는 모양이다.

“그런가?”

“로이 도련님이 켈리온 성에서 최후의 저항을 하고 있기는 하나, 얼마 못 버틸 겁니다. 만약 켈리온 성이 함락된다면, 그다음 백작님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겠습니까?”

그러면서 이 미친놈이 검지로 내 가슴을 꾹꾹 찌른다.

마치 다음은 너라는 걸 알려주듯이 말이다.

이게 끝인가 생각하면 그 이상을 보여주는 영주놈이 신기해서 어디까지 하나 두고 보자는 심정으로 가만히 있었다.

“지금 가지고 계시는 병력이라도 온전히 보존하고 싶으시다면 최대한 빨리 베르너 백작령을 벗어나시는 게 좋을 겁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 늙은 영주의 추한 시선은 연신 링링의 커다란 젖통과 굴곡진 골반을 훑고 있다.

“저는 특별히 데이몬 님을 배려해서 따로 제임스 백작님께 당신의 생존 소식을 전하진 않겠습니다. 그것이 돌아가신 백작님을 생각하며 제가 당신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충심입니다.”

끝까지 본인은 충성했고 배려해주고 양보해줬단다.

누가 귀족 아니랄까 봐 명분 챙기기는 아주 습관이 되어 있네.

이미 저놈 머릿속에 끈 떨어진 망나니 놈은 안중에도 없겠지.

어서 빨리 커다란 늑대를 옆에 끼고 수인녀의 색다른 육체미를 즐길 생각밖에 없을 거다.

“그러면 두 명을 고르겠습니다. 저기 꼬리가 긴 계집이랑 나머지 한 명은…어억!”

하필 또 링링을 고르네.

내 첩실 부인을 말이야.

더는 못 들어주겠기에 빠르게 손을 뻗어 놈의 입 속에 집어넣었다.

그러자 느껴지는 혀의 감촉.

“무훼누지시니꿰!”

(뭐하는 짓입니까!)

왜 귀족들은 하나같이 자신만큼은 폭력으로부터 자유롭다 여기는 걸까?

놀란 눈으로 쳐다보는 표정이 릭톤 영주랑 아주 똑같네.

상황 파악 못하는 놈을 향해 씩 웃어주며 말했다.

“뭐하긴, 너는 괜찮은데 네 혀가 문제니까.”

잡고 있던 혀를 밖으로 빼낸 후, 망설임 없이 검으로 잘라버린다.

서걱!!

대경하여 크게 떠지는 눈.

수축하는 동공.

서서히 차오르는 절망감.

“끄아아아아!!!”

“걱정하지 마. 너에게 개인적인 감정은 없다. 혀만 좀 문제였을 뿐이야.”

페이튼 영주가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얼굴을 사정없이 일그러졌으니.

이제야 좀 마음에 드는 표정이었다.

* * *



사상 최악의 주인공〈 191화 〉 마음에 드는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