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화 〉 어쨌든 승리는 승리
* * *
순간 귀를 의심했다.
페이튼 영지가 내 기준에서는 깡촌이 맞기는 맞다.
어쨌든 나는 베르너 백작가 본성에서 잠깐이지만 생활해봤으니까.
하지만 크래스 장원과 같은 선상에 놓았을 때는 비교하기가 미안할 정도로 거대 영지고 통치할만한 땅이다.
그런데 이 레이첼이란 계집이 내가 임명한 영주직을 단칼에 거절했다.
어차피 나 아니었으면 여성의 몸으로 영주직을 맡는 것도 불가능했을 것이고.
뉴몬성의 이름도 모르는 귀족의 아내가 되어 애나 낳고 살아야 할 운명을 바꿔주었는데.
“내 말 안 들려? 싫다고 개새끼야.”
내가 못 들었을까 봐 친절하게 욕을 한 번 더 박아준다.
하기사 저 반응이 맞기는 맞다.
제 아비를 사실상 죽이고 오빠들을 모조리 TS 시켰으니.
요새 너무 이상한 놈들만 많이 만나서 정상적인 반응이 조금 낯설다.
“내 제안을 거절하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건가?”
“왜, 나도 오빠들처럼 여자로 만들게? 이걸 어쩌나? 난 이미 여잔데.”
“남자로 바꿀 수도 있다.”
“남자면 더 좋지. 여자로 살기 불편했는데 말이야.”
현재 난 도합스텟 300의 기운을 은은하게 흘리고 있었는데, 이를 마주하고도 기가 죽지 않은 걸 봐선 태어날 때부터 기백이 출중한 년이다.
무공에 소질이 없다 할지라도 이런 여자들은 언젠가는 어느 분야에서든지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지구에서도 이런 여자들이 있었다.
예시를 들자면 프랑스 혁명의 영웅 잔다르크, 3중고의 장애를 극복한 헬렌 켈러, 11년간 영국을 통치한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
우리나라 여인 중에는 임진왜란 당시 왜장과 함께 투신한 논개, 시서화에 모두 능했던 허난설현, 3.1운동의 상징인 유관순 열사 등이 있다.
빛나는 거성과도 같은 여인들은 시대를 잘 타면 역사적 영웅이 되는 거고, 잘못 타고 나면 오히려 역풍을 맞고 안타깝게 바스러진다.
빙의하기 전 수많은 여인을 작업한 나로서도 딱 한 명, 그런 여자를 본 적이 있었는데.
놀랍게도 평범한 한 아이의 어머니였다.
어떠한 고문과 작업으로도 끝까지 굴복시킬 수 없었던 기억에 내 자존심에 상당히 스크래치가 왔었다.
결과만 말하자면 결국엔 내게 복종시키기는 했다.
하지만 그건 운 좋게 여인이 숨겨두었던 자식을 찾아내서였지, 만약에 그 자식을 찾아내지 못했다면 내 패배였을 거다.
독종 중에서도 독종이었던 그 여자와 비슷한 냄새를 이 레이첼이라는 여자에게서 맡았다.
“내 수단이 성별을 바꾸는 것만 있다고 생각하지 마. 네 아버지 꼴이 되고 싶나? 여자라고 피부 못 벗길 줄 알아?”
바로 옆에 피부가 모조리 벗겨져서 흉측한 몰골로 헤헤거리고 있는 아버지를 봐서일까?
레이첼의 두 눈이 세모꼴로 변하면서 그 안에 잠겨있는 증오심이 더 짙어졌다.
“어디 한 번 해봐. 난 눈 하나 깜짝 하지 않을 테니까.”
역시나.
울고불고 횡설수설하던 제 오빠들과는 뼈대부터가 틀리다.
물론 허세를 부리는 것일 수도 있으니 확인은 해봐야겠지.
“링링, 메스.”
“??그게 뭐다냥?”
“너 고양이 아니다. 강아지다.”
“…맞다멍! 내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멍!”
아무튼 링링에게서 건네받은 조도를 천천히 레이첼의 손에 갖다 댔다.
그녀는 안색이 창백해지긴 했으나 딱 거기까지였다.
“어디 손톱이 다 없어진 후에도 똑같은지 봐주지.”
그리고서 망설임 없이 새끼손톱을 드러낸다.
“아아아악!”
고통에 겨운 비명.
하지만 이제 시작이다.
약지, 중지, 검지, 엄지.
그리고 왼손의 모든 손톱.
열 개의 손톱을 모조리 벗겨내고 연한 속살을 살살 긁어냈다.
빨라서도 안 되고 느려서도 안 된다.
그래야 최대의 고통을 가할 수 있기에.
“아아악! 아악! 아아아악!”
목이 쉬어라 비명을 내지르는 레이첼은 어찌나 고통스러웠는지 눈에 실핏줄이 터져서 피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이제야 좀 말을 들을 생각이 드나?”
“조…옷…까아…”
이런이런.
귀족 영애치고는 말이 심하게 험한걸?
아직 부족하다면야 더 해줘야겠지.
“손톱은 다 들어냈으니 지금부터는 팔이다. 네가 내 말에 절대복종하겠다는 제스처를 취하지 않는 한 내 칼이 멈추는 일은 없다.”
레이첼은 내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피가 나도록 입술을 앙다물었을 뿐.
그 모습이 옛날에 끝까지 저항했던 그 독한 여자를 연상케 해서 나도 모르게 칼이 조금 깊게 나갔다.
퓨슉
“아아악!!”
피가 튀어서 땅에 뚝뚝 떨어졌다.
페이튼 영주놈을 벗길 때는 전신을 다 벗겨도 피부에 핏방울이 맺히기만 했지, 흐르지 않았는데.
심기가 불편해서 순간적으로 실수를 해버렸다.
이렇게 된 거 그냥 속 편히 밀어버리자.
따먹기 전에 죽이는 건 조금 아깝지만, 뭐 이 여자 말고도 섹스할 여자는 넘쳐흐르니까.
한 여자에 매몰될 필요는 없겠지.
사각사각사각
“아악! 아아악! 아악!”
비명을 계속해서 지르는 레이첼.
어느새 양팔의 피부는 징그럽게 다 벗겨졌다.
그 뽀얗고 싱그럽던 피부가 다 사라졌으니 적절한 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앞으로 시집은 다 갔다고 봐도 된다.
“아직도 더 버틸 건가? 지금이라도 고개 숙인다면 널 치료해줄 용의도 있다.”
“…넌 쓰레기야.”
단답으로 딱 한마디 하는 년을 보며 이젠 다리 쪽 작업을 시작했다.
사각사각사각
이미 진작에 페이튼 영주가 미쳐버렸던 구간을 지나쳤다.
그놈은 오른팔을 벗기고 왼팔 반쯤 돼서 미쳐버렸는데, 딸인 레이첼은 양팔이 다 벗겨지고 지금 다리까지 얼추 민낯을 드러내고 있는데도 또렷한 정신으로 날 노려보고 있다.
“으으으…”
목이 쉬어서 이제 미약한 신음을 내뱉는 여인.
아까 팔 쪽을 벗기다가 실수한 것 때문인지 출혈이 너무 심했다.
이러다가는 피부를 다 벗기기 전에 이 여자가 과다출혈로 죽을 터.
그리고 그건 내가 원하는 그림이 아니었다.
“…인정하지. 적어도 육체적 고문으로 널 굴복시키진 못할 것 같다.”
여자를 성욕처리기구로만 보는 내가 인정한다는 말은 쉽게 꺼내지 않건만.
레이첼은 이런 내 인정을 받아냈으니 판타지아 대륙 상위 0.1%에 드는 여자다.
“링링, 포션을 부어줘.”
피부가 갈라지고 나서 시간이 지나면 해당 부위가 공기와의 마찰로 괴사하기 때문에 포션으로도 복구가 불가능하나.
아주 얇게 회를 뜨듯이 가른 데다가 상처를 낸지도 얼마 안 된 상태.
지금 포션을 붓는다면 금세 피부가 재생되어서 원래의 미모를 찾을 수 있을 거다.
아마 맨 처음 내가 실수로 칼을 조금 깊게 찌른 곳만 흉터가 남겠지.
“알겠다멍!”
기다렸다는 듯이 링링이 포션을 레이첼에게 아낌없이 부었다.
링링도 근본이 극한의 수련으로 강해진 전사라서인지, 뚝심 있고 인내력 충만한 그녀가 싫지 않은 기색이었다.
“주인님, 나 얘 마음에 든다멍.”
“나도 마음에 들어.”
요년 성격 말고.
탱탱한 젖통살이랑 포동포동한 허벅지가 말이다.
젊음을 뽐내듯 팽팽한 하얀 피부와 판타지아 대륙에서도 보기 힘든 붉은 머리가 마음에 든다.
아직 보지를 확인하진 않았으나, 벗겨보면 분명히 처녀겠지.
릭톤 장원의 귀족 영애이자 처녀였던 밀라와는 또 다른 매력의 여인이다.
포션을 왕창 부어서인지 벌써 새살이 돋으면서 정신을 차린 레이첼.
그녀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은 여전히 곱지 않았다.
“레이첼, 마지막 기회다. 지금이라도 나에게 무릎을 꿇는다면…”
“에잇, 퉷!”
내 볼에 걸쭉한 무언가가 붙었다가 천천히 흘러내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마음에 든다던 링링의 눈빛이 삽시간에 서늘해졌다.
“아까 말은 취소다멍! 이년 선 넘었다멍! 서방님 나한테 맡긴다면 살려달라고 울부짖을 때까지 괴롭히다가 죽여주겠다멍.”
“아서라. 그런 걸로 복종할 년이었으면 진작에 내가 그렇게 만들었어.”
팩트를 묵직하게 꽂아준 뒤, 레이첼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레이첼, 인정하마. 넌 대단한 여자다.”
“…어쩌라고.”
“하지만 난 너 같은 여자를 다루는 방법을 잘 알고 있지.”
“아니? 넌 몰라. 뭘 해도 난 끄떡없을 테니까.”
저 말은 맞다.
약물로 뇌를 아예 절여버리지 않는 한, 굴복하지 않는 인간도 있는 법이니까.
하지만 방법이야 찾으면 그만이다.
지구에서 만났던 그 독한 여자도 끝까지 저항했으나 결국 자식 앞에서는 장사 없었지.
레이첼 또한 영주의 딸.
영지민들에 대한 책임감이 막중한 인물일 테니.
페이튼 영지민 전체가 그녀의 자식이라 봐도 무방하다.
그럼 우선 그녀와 친하게 지냈던 저택의 고용인들부터 만나볼까?
“링링, 이 저택의 주방장을 내 앞에 대령해라.”
“알겠다멍!”
“무, 무슨 짓이에요!”
빙고!
제대로 맞췄다.
제 피부가 벗겨질 때도 끝까지 태연했던 레이첼의 두 눈이 급격하게 흔들린다.
특히나 이런 영지의 주방장은 경력이 오래된 사람을 쓸 가능성이 크니.
어렸을 때부터 그녀의 밥을 해주던 사람이겠지.
밥 해주던 사람을 건드는 것만큼 가슴 아픈 일이 없다는 점을 노린 명령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뚱뚱한 중년 남자가 겁에 질린 채로 내 앞에 무릎 꿇려졌다.
레이첼과 달리 이마에 식은땀을 뚝뚝 흘리면서 몸을 덜덜 떠는 게 보기만 해도 애처로움을 유발했다.
“사, 살려주십시오.”
말까지 더듬는 녀석에게 다가가서 최대한 친절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나도 요리해주는 사람 해코지하기는 싫어. 이름이 뭐지?”
“찰리입니다.”
“그래,찰리. 레이디 레이첼과는 잘 알고 있는 사이인가?”
“그, 그렇습니다. 10년째 주방장을 맡아서 레이디의 식사를 책임지고 있습니다.”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최대한 레이첼의 죄책감을 유발하기 위함이다.
역시나 작전이 제대로 통했는지 레이첼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그렇군. 레이첼이랑 친하니까 그녀 대신에 죽어줄 수도 있겠군?”
“네? 그게 무슨 말…”
푹!
더는 말이 필요 없다.
이미 내 손은 그의 가슴을 파고들어 심장을 움켜쥐었으니.
너무나 놀라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주방장의 두 눈에 천천히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어? 어라?”
“레이첼 때문에 죽는 거다. 잘 가라.”
“안 돼애애! 찰리!”
털썩.
중년의 사내가 결국 심장이 파괴되어 숨이 끊겼다.
레이첼은 자신 때문에 타인이 죽는다는 사실을 견디지 못하고 절규했다.
“개새끼야! 할 거면 나랑 내 가족만 건드려. 도대체 찰리가 무슨 죄가 있는데.”
“무슨 죄긴, 주인을 잘못 모신 죄지.”
“으흐흐흑…”
레이첼이 울부짖는 모습을 천천히 감상하며 다음 녀석을 불렀다.
“이번엔 정원사.”
서걱!
“하지마!!”
“다음은 하녀.”
“안 돼애애!”
콰직!
“이번엔 관리인. 너랑 체스친구라던데?”
“레이디, 저는 괜찮…”
“하지마, 제발…”
푸욱!!
관리인까지 허무하게 쓰러진 채로 바닥을 붉게 물들였다.
레이첼은 넋이 나간 채로 자신과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이 차례로 시체가 되는 걸 멍하니 응시했다.
“이러다 페이튼 영지 놈들 모조리 시체로 만들어 줄을 세울지도 모르겠어.”
“저주할 거야…평생 널 증오하고 악마에게 널 데려가라 빌 거야.”
어차피 악마가 되어 마계로 갈 나에게는 그녀의 저주가 최고의 칭찬이었으니.
악담을 퍼붓는 여자를 보며 오히려 빙긋 웃어줬다.
“다음은 누구지?”
내 말에 링링이 대답했다.
“유모라고 한다멍! 저 여자 사실상 키운 엄마라는 거 같다멍!”
그러면서 나타난 늙은 여자.
이미 죽음을 받아들인 듯 초연한 표정이다.
그리고 그녀를 본 레이첼이 여태까지 중에서 가장 격렬한 거부반응을 보인다.
“유모! 안 돼!”
“레이디, 저는 괜찮습니다. 이미 살만큼 산 인생이에요.”
눈가에 눈물을 글썽이며 말하는데 내가 정상인이었으면 진작에 같이 울었을지도.
하지만 난 데이몬이었고 사상 최악의 주인공.
애초에 저 할머니는 레이첼의 보지를 따먹기 위한 도구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늙은이. 레이첼이랑 친하다니 유언 남길 기회를 주지.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레이첼 아가씨에게 조금이라도 친절하게 대해주세요. 정말로 좋은 사람입니다. 제 목숨이 여러 개라면 얼마든지 더 드리겠으니 제발 부탁드립니다.”
고개를 깊게 숙이는 늙은 여인.
그런 그녀의 훤히 드러난 목을 보며 수도를 치켜올렸다.
강기가 넘실대는 손이 단두대의 칼날처럼 한껏 올라갔으니, 바로 중력의 힘을 받아 떨어지기 시작했다.
내 손날의 방향이 땅을 향하게 될 때쯤엔 연약한 노인네의 목과 몸이 손쉽게 분리될 터.
그렇게 그녀의 인생이 마지막을 향해 가던 순간,
“그만! 제발 그만! 알았어요!”
레이첼의 선언.
내 손이 정확히 유모의 목 위에서 멈추었다.
고개를 돌리니 이미 다 마른 줄 알았던 레이첼의 눈물샘이 다시 폭발하여 아름다운 얼굴을 적셨다.
그녀의 잇새로 새어 나오는 떨리는 목소리가 적막을 걷어냈다.
“알았어요…항복할게요…당신에게 복종하겠어요…그러니까 그만해주세요…”
결국, 예전과 비슷한 방식으로 잡아냈다.
어쨌든 승리는 승리.
남은 건 고개 숙인 계집을 유린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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