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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화 〉 딱 내가 원하는 눈빛



〈 195화 〉 딱 내가 원하는 눈빛

* * *

레이첼의 항복을 받아낸 직후, 나는 월랑대를 시켜 장 내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보여주기식 행위로 잔인하게 도살한 시체들을 치우고 오늘 벌어진 일들로 인해 혼란스러워할 영지민들을 안정시켰다.

주민들은 으레 그렇듯 윗사람들끼리의 전쟁이다 생각하며 불안감을 참고 일상으로 복귀하는 분위기.

페이튼 시장을 관리하는 상인조합장들과 실질적 영지운영을 맡은 행정관들만 살살 눈치를 볼 뿐이었다.

정리가 끝난 뒤에도 완전무장을 갖춘 월랑대원들을 구역별로 계속해서 순찰시켜 영향력을 공고히 했다.

“으아아! 영주님을 어떻게 한 거냐!”

저런 놈들 때문에 말이지.

분명히 갑작스러운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눈깔 회까닥 뒤집은 채 덤벼들 녀석들이 있으리라 예상했다.

나름 인파 속에 숨어있다가 달려들어 칼침을 놓으면 성공할 수 있으리라 봤나본데.

울프문 초원에서도 한참 떨어진 적들을 냄새로 감지하는 수인녀들이 레벨 5짜리가 코앞에서 살기 줄줄 흘리는 걸 눈치 못챌 수가 없다.

“38호, 처리해라멍!”

“알았다멍!”

대주 링링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기존 지배층에 과한 충성심을 보이던 놈의 머리통이 일권으로 부숴졌다.

콰직!!

반응조차 못하고 뇌수를 사방에 뿌리며 멍청함을 과시하는 녀석.

이후에도 목숨 아까운줄 모르고 기습한 녀석들은 차례로 잡아서 그 행동을 후회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렇게 하루가 저물어가고 저녁.

영지 전체에 울려퍼지는 소식.

레이첼 페이튼의 영주 즉위식이 있으니 영주의 저택으로 모이라는 말이었다.

일련의 변화를 궁금해하던 영지민들은 무슨 일인지 알아보기 위해서 너도나도 우르르 저택에 몰려들었고.

영지민들의 절반인 1천여명이 저택 밖에서 우글우글댈 때, 곱게 차려입은 레이첼이 모습을 보였다.

“레이디! 레이디 레이첼! 어찌된 일입니까?”

“영주님은 어디 계십니까?”

“저희 영지는 어떻게 되는 거죠?”

“영주 즉위식이라니. 이게 무슨 말입니까?”

내가 일을 벌인 건 모두 영주의 저택 내부였기에 군중들은 누가 이겼는지는 추측이 가능했으나, 기존 영주가 죽고 그 아들들이 모조리 TS 당했다는 사실은 몰랐다.

미리 준비된 단상에 고운 드레스를 차려입은 소녀가 붉은 머리카락을 찰랑이며 올라섰다.

만 하루만에 볼살이 쪽 빠지고 초췌해져 그 창백한 피부가 더욱 강조된 레이첼.

병약한 아름다움이 저절로 남자들의 동정심을 자극하고 뇌쇄적인 무언가를 꿈틀거리게 했다.

원래도 젊고 아름다운 귀족 영애로 페이튼 영지에서 인기가 많던 그녀는 능숙하게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모두 조용해주세요!”

레이첼의 꾀꼬리 같은 미성에 웅성대길 멈추는 사람들.

수많은 눈동자가 자신을 직시하는 걸 느끼며 드레스 사이에 가려진 후들거리는 다리에 애써 힘을 불어넣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다시피 전 페이튼 영주님의 딸 레이첼 페이튼입니다.”

잠시 호흡을 가져간 그녀가 재차 입을 연다.

“결과만 간단하게 말하겠습니다. 오늘부로 페이튼 영주직을 저 레이첼 페이튼이 맡게 되었습니다.”

“!!!”

모두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여기 모인 대부분이 평민이라지만 여자가 영주직을 맡는 경우는 없다는 걸 다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체 무슨 말이십니까? 레이디는 여잔데 어떻게 영주를 맡으신다는 거죠?”

“그러다가 시집을 가버리시면요. 저희 영지는 누가 통치합니까?”

“원래 영주님을 불러주세요! 레이디 레이첼.”

혼란스러움을 쏟아내는 군중들을 보며 고개를 떨구는 붉은머리 소녀.

이쯤 되서 내가 조금 도와줘야겠군.

“월랑대.”

짧게 말하자 눈치 빠르게 알아들은 수인녀들이 일제히 레이첼의 앞에 일열로 도열했다.

월랑대주 링링이 배에 힘을 주고 입을 열자 내기 충만한 목소리가 저택 전체에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모두 주목! 새로운 페이튼 영주가 말하는 거 안들리냐멍!”

말 끝에 멍 자를 붙이니까 뭔가 귀엽기는 한데.

여기 모인 사람들은 저 귀여운 말투를 쓰는 동물녀들이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지 똑똑히 보았기에 목숨이 소중한 사람들은 입을 닫았다.

적막이 내려앉은 저택 앞 광장.

나는 계속해서 진행하라는 눈치를 줬고, 입술을 살짝 깨물던 레이첼이 말했다.

“제 아버지는…오늘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뭣! 그게 무슨 소리…”

“조용!”

하여간 귀찮은 것들이 말 한마디 하면 바로 떠들려고 하네.

한 명 정도 눈앞에서 해체되는 꼴을 봐야지 얌전해지려나.

“앞으로 한 번만 더 소란스러워지면 첫번째로 입 연 놈은 대천사 품으로 간다고 생각해라. 두 번 경고 안 한다.”

이와 동시에 링링이 주민들 사이를 거닐며 조도로 위협하자 다시 원래의 차분한 분위기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오빠들도 모두 죽었습니다.”

정확히는 TS알약에 의해서 여자가 되었지만, 이를 설명하면 복잡하니 대중들에게는 그저 죽었다고 하는 게 편했다.

어차피 여자가 된 시점부터 남자로써의 인격체가 사라진 셈이니 저렇게 말하는 게 아주 틀린 말도 아니고.

“그래서 부득이하게 저 레이첼이 영지를 이어받게 되었습니다.”

“하, 하지만 어떻게 여자가 영지를 물려받는단 말입니까?”

죽음의 위협 속에도 끝까지 입터는 놈이 한놈쯤은 있게 마련이지.

원래라면 바로 참(?)하려 했으나, 저 의문는 여기 있는 모두가 궁금해하는 점이길래 일단은 내버려뒀다.

사전에 이 질문이 들어오리라 짐작하고 미리 대답을 준비하기도 했고 말이다.

“네, 여자는 영지가 물려받을 수 없죠. 그래서 저는 대리로 영지를 통치할 겁니다.”

이제 중요한 건 누구의 대리인지다.

모두가 그녀의 붉은 입술이 어떻게 움직임는지 주목했다.

“저는…오늘부로 데이몬 백작님의 잠자리 시종이 되기로 했습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페이튼 영지도 앞으로는 백작님의 영지로 귀속될 예정입니다.”

“!!!”

레이첼의 폭탄 선언.

지조를 지켜야 살아남는 귀족 영애가 다른 귀족 남성의 밤을 책임진다는 말은 자신의 전부를 바친다는 의미.

게다가 아내도 아니고 첩도 아니고 잠자리 시종이란다.

좋게 표현했지만 잠자리 시종이 사실상 성노예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저택 앞에 모인 모든 사람들은 알고 있다.

당장 여기서 조금 형편 좋은 평민 남성들도 아내 말고 다른 여자가 땡길 때는 창녀를 불러 성노예 삼아 데리고 놀곤 했으니까.

하지만 눈앞의 젊고 아름다운 영애는 그런 싸구려 창녀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고귀한 레이디다.

페이튼 영지의 자랑.

템프강 북부의 아름다운 꽃.

그 꽃이 지배자에 의해 무참히 짓밟힌다는 사실에 군중들이 일제히 분노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내가 잘못 들은 것 같으니 귀를 씻겠소!”

“아무리 백작님이라도 이건 아니지! 귀족 영애를 노리개로 삼는다니!”

순간적으로 이성이 날아간 놈들이 보이니 처리해주자.

링링과 루나는 이미 내가 말을 하기도 전에 움직이고 있었다.

“크아아앙!”

“어, 어엇!”

공중에서 5m는 넘게 도약한 은빛 늑대가 근육 가득한 뒷다리로 걷어차주자 정통으로 맞은 놈의 가슴이 움푹 내려앉았다.

바닥에 쓰러진 그는 미동도 없었다.

즉사였다.

이게 끝이 아니다.

놀라운 시력으로 목소리 키운 놈들의 얼굴을 확인한 루나와 월랑대원들이 빠르게 그들을 방문했다.

말이 필요없다.

조도 두 개를 그들의 입가에 쑤셔박은 다음, 양쪽으로 찢어버렸다.

주둥이를 찢는다는 말 그대로 해준 것이다.

“끄어어어! 어어어!”

입이 귀까지 찢어진다는 표현이 아니라 말그대로 입이 귀까지 벌어진 놈들이 피를 줄줄 흘리다가 고통스러운 표정을 유지한 채 눈도 못감고 목숨이 끊어졌다.

“꺄아아악!”

“으아악!”

“방금 비명 지른 놈들도 죽여.”

뎅겅뎅겅

놀라서 소리 지른 인간들의 목이 가을철 추수하듯이 신속, 정확하게 수확되었다.

그러자 살고 싶은 연놈들이 알아서 자기 입을 두 손으로 막은 채 끙끙댔다.

저택 앞 광장은 그렇게 피로 물들었다.

처참한 광경을 하나도 빠짐없이 두 눈에 담은 레이첼의 커다란 두 눈에는 맑은 눈물이 쉴새없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쯤되자 영지민들도 알아차렸다.

레이첼 아가씨에게 선택권 따윈 없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여러분…가만히 있어주세요…부탁드립니다. 저항하지 않는 자는 죽이지 않는대요…저는 괜찮으니까…여러분들도 어제와 똑같이 생활하시면 돼요.”

오늘 들은 말 중에서 가장 진심이 가득 담긴 소녀의 말에 대중들도 조용히 눈가에 맺힌 이슬을 손등으로 훔쳤다.

몇몇 사내들은 눈빛이 살짝 변했는데, 이번 집회가 끝나면 폭동이나 반란이라도 일으킬 분위기였다.

솔직히…제발 그래줬으면 한다.

그렇지 않아도 내 대업을 위한 싸구려 보지들이 조금 부족한 참이니까.

크래스 장원 TS년들과 페이튼 영지의 TS귀족들 다해봐야 겨우 40명가량.

통치에 반기를 드는 놈들에게 알약을 먹여서 부족한 머릿수를 더 채울 계획이다.

올리비아에게는 TS­1알약 생산에 박차를 가하라고 미리 말해둔 상태.

페이튼 영지도 점령했고 연단에 필요한 재료들도 시장을 통해 바로 구할 수 있으니 알약을 대량생산할 날이 머지않았다.

“알려줄 사항은 이걸로 끝입니다.”

“조용히 흩어져라! 떠드는 즉시 그만 살고 싶다는 뜻으로 알겠다.”

충격적인 소식만 가득했던 소집이었다.

영지민들은 혼란스러운 눈빛을 감추지 못한 채로 자신들의 집으로 향했다.

1시간 뒤.

나는 영주놈이 쓰던 침실에서 링링의 보고를 받았다.

“지금 난리도 아니다멍! 다들 페이튼 영지를 탈출하고 있다멍!”

“예상했던 일이야.”

영주가 죽고 영주의 딸이 망나니 백작가 아들의 씨받이가 되었다는데 능력만 된다면 당연히 빠져나가려고 하겠지.

“어떻게 할까멍. 성문하고 나루터를 막을까멍?”

“아니, 막지마.”

내 명령이 의외였던듯 링링의 눈이 커졌다.

“그러면 다 빠져나갈 거다멍!”

“아니, 절대 그렇지 않아.”

지금은 분위기에 휩쓸려 개나소나 다 빠져나가겠지만, 결국 그것도 한계가 있을 거다.

평생을 페이튼에서 터전을 일궈온 사람들은 떠나지 못하겠지.

“떠난 놈들의 집과 재산만 몰수해.”

어차피 귀중한 건 다 챙겨갔겠지.

돌아올 집만 없애버리면 충분하다.

그래야 후회하고 돌아와도 머물 곳이 없어질 테니까.

게다가 도시 발전 계획을 위해서 영지의 상당 부분을 철거했어야 하는 상황에서 알아서 나가준다니 나로서는 땡큐다.

빈집이 많아졌으니 한쪽 구역에 사람들을 몰아넣고 다른 구역을 대대적으로 재개발하면 된다.

재개발할 자원들은 마녀의 숲에 넘쳐나고.

육체노동 일꾼들은 몬스터 로드로 세뇌시킨 하루 20시간 이상 일할 수 있는 일당백 오크와 트롤들.

정신노동자들은 제국 아카데미 출신의 귀녀대원들로 채우면 될 것이고.

마지막으로 치안은 육림대와 월랑대, 그리고 이제 슬슬 제 몫을 하기 시작하는 십동대원들을 동원하면 끝.

크래스장원­릭톤장원­페이튼장원을 삼각형으로 잇는 템프강 북부의 하나의 커다란 도시 크래스 폴리스가 빠른 시일 안에 만들어질 것이다.

“그보다도 오늘 밤에 순찰이나 제대로 돌아. 정신 나간 놈들이 영주놈 복수하겠답시고 찾아올 수도 있으니까.”

“알았다멍!”

고개를 숙인 링링이 문 밖으로 나가려다가 한마디 덧붙인다.

“서방님, 그 빨강털 인간암컷은 언제 품을 생각이냐멍.”

“지금 들여보내.”

“혹시 나도 같이 들어가도 되냐멍?”

요년 봐라?

은근슬쩍 끼워팔기 하려고 하네.

쓰리썸도 나쁘지 않은 아이디어지만 난 오늘 레이첼을 온전히 맛보고 싶었다.

“오늘은 레이첼과 단둘이 있고 싶군.”

“…주인님 뜻이라면 알겠다멍.”

아쉬워하는 표정으로 링링이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끼이익 소리와 함께 침실문이 열리고 목표로 했던 소녀가 들어왔다.

타는 듯한 붉은머리 여인의 창백한 아름다움.

눈동자에는 여전히 증오가 넘실거렸으니.

딱 내가 원하는 눈빛이었다.



사상 최악의 주인공〈 195화 〉 딱 내가 원하는 눈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