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화 〉 내 여자들을 쳐다보면 곤란해
* * *
나루터에 앉아있는 여인은 뭇 남성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레벨 가리개를 해서인지 레벨은 보이지 않았지만, 뽀얀 살결과 태연함에서 나오는 은은한 분위기가 결코 저렙은 아닌 듯했고, 신분이 낮은 여성 같지도 않았다.
보통 저 나이대 고위층 젊은 여성들은 좋은 신랑감을 찾기 위해서 사교계에 들락날락하곤 하는데.
저런 식으로 남성들의 시선에 오르락내리락할만한 자리에 나온다는 건 대단히 용기 있는 일이라 록펠은 생각했다.
“여기 온 목적은?”
“저는 오렌지 상단의 상단주입니다. 장사를 목적으로 이곳에 체류하고 싶습니다.”
“저희 쪽 인원이 그쪽 짐을 좀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여성의 딱딱한 어조에도 상인은 기분 나빠하지 않고 연신 손을 비빈다.
만약에 다른 곳이었다면 저 여인은 감히 남자에게 이래라저래라했다는 이유로 머리채를 잡혔을 텐데 말이다.
여성의 고갯짓에 수인녀 둘이 나서서 상단의 짐을 수색한다.
록펠은 아까 상인이 말했던 자유도시의 강력한 무력으로 평가된다는 수인녀들을 유심히 훑어봤다.
역시나 레벨 가리개를 해서 레벨은 보이지 않았으나, 척 보기에도 날렵하고 잘 단련된 몸이 만만치는 않아 보였다.
‘로이 백작님에게 뭐라고 말해야 하나.’
일단은 서신을 전달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기로 결심했을 때.
여인의 상단주를 통과시켰다.
“도시 내에서는 레벨 가리개 필수입니다. 가리개가 없다면 여기서 받아 가세요.”
“저희 모두 가리개는 착용하고 왔습니다. 자유와 평등을 지향하는 크래스 폴리스에게 영광을.”
여자는 여전히 무표정.
“그리고 그곳을 통치하는 데이몬 백작님과 레이첼 시장님에게도 축복을.”
데이몬의 이름이 나오자 그제야 얼굴을 살짝 붉히며 배시시 웃는 여인.
여태까지 냉기 풀풀 흘리던 여인이 웃으니 그제야 제 나이대 소녀 같았다.
치마 사이로 살짝 보이는 뇌쇄적인 허벅지를 배배 꼬는 게 설마 그 이유 때문은 아니겠지.
어쨌든 망나니 귀족이었던 데이몬이 이곳에서는 망나니로 취급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나마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기는커녕 제임스와 로이를 제치고 백작으로 대우받고 있는 것을 본 록펠은 데이몬을 죽이고 셰릴을 납치한다는 1차 계획을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다음에는 쥐 상의 평민 남성이었다.
다시 사무적인 표정으로 돌아온 여인이 업무를 보았다.
“여기 온 목적은?”
“폴리스의 시민이 되고 싶습니다. 원하기만 한다면 집과 땅과 여자를 준다는데 맞습니까?”
“도시에 기여할 수만 있다면 물론입니다.”
여인의 말에 뒤에서 줄을 서고 있던 사람들도 이 말을 듣고 희망에 찬 얼굴로 웅성댔다.
‘도대체 어디서 노동력과 자본력이 나오길래…’
록펠의 상념에 잠기든 말든 쥐 상의 사내는 흥분해서 목소리가 높아졌다.
“저는 기술자입니다! 예전에 있던 곳에서는 신발 만드는 일을 했습니다. 농사도 지을 수 있고요.”
“공업 종사자로 시민권 신청을 하시면 농업 종사자보다 더 많은 혜택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무슨 말인진 모르겠지만 그렇게 해주십시오.”
고개를 끄덕이는 쥐 상의 사내를 잠시 바라본 여인이 종이에 무언가를 끄적이더니 도장을 꽝 찍고 이를 건넨다.
“공업 종사자는 릭톤 지구로 가시면 됩니다. 페이튼 지구 쪽에서 마차를 타시고 이동하시면 됩니다.”
“가, 감사합니다!!”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몇 번씩이나 인사를 한 쥐 상의 사내도 사라졌고, 이제 록펠의 차례가 왔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데이몬 공자님을 뵈러 왔소.”
“뭐? 데이몬 공자?”
여인의 눈에서 싸늘한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피부가 따끔거릴 만큼 강렬한 기세.
록펠은 저 여인이 레벨은 보이지 않지만, 본능적으로 자신의 아래가 아니라고 느꼈다.
‘어찌 저리 젊은 여인이!’
경악했지만 이대로 기선을 제압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마나를 뿜어내어 이에 맞섰다.
츠츠츠
공중에서 기세가 충돌하며 허공에서 번갯불이 튀기는 진귀한 현상이 벌어졌다.
그제야 여인도 남자의 기도가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닫고 꼬았던 다리를 풀어 자세를 바로잡았다.
“길거리의 아무개는 아닌 듯 하네요. 신원을 밝히시죠.”
심호흡한 록펠이 정체를 밝힌다.
“나는 로이 백작님을 모시는 자유기사 록펠이라고 하오. 데이몬 공자님에게 전할 백작님의 명이 있으니 공자님을 뵙게 해주셨으면 좋겠소.”
그로서는 최대한 정중하게 말한 것이었다.
애초에 베테랑에 나이도 어느 정도 되는 그는 자신보다 새파랗게 젊은 계집에게 경어체를 쓴 적조차 없었다.
하지만 이조차도 여인에게 불쾌감을 유발했나 보다.
“이곳에서는 누구나 데이몬님이 정당한 베르너의 주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언행을 조심해주시죠.”
“뭐?”
“그리고 아무리 로이 공자님이라고 해도 사절 하나 달랑 보내놓고 백작님을 뵈려 하는지. 무례하군요.”
“감히! 네년이 실성했구나!”
록펠은 참을 만큼 참았다.
주군이 면전에서 모욕당하는데 검을 꺼내지 않으면 기사가 아니다.
망설이지 않고 오른쪽 허리춤에 검을 뽑으려는 순간,
“그거 뽑으면 죽습니다. 잘 생각하세요.”
눈앞의 여인이 아닌 다른 쪽에서 또 다른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곳에는 일하는 사람이 여인밖에 없는 건가?
합당한 의문을 품으며 록펠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은발 머리를 찰랑이는 아름다운 여기사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록펠 경, 오랜만입니다.”
“…셰릴?”
순간 누구인가 싶었다.
너무 오랜만이라서 못 알아본 걸까?
아니었다.
셰릴은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훨씬 아름다워져 있었다.
키도 3cm가량 커졌고 몸 선도 더 유려해졌으며 얼굴에는 빛이 났고 무엇보다…빈약했던 미드가 훨씬 부풀어 있었다.
“셰릴 맞느냐?”
“네, 저 셰릴입니다.”
“정말…예뻐졌구나.”
예전에도 젊고 어린 기사 생도들 사이에서 홍일점으로 인기가 많았던 셰릴.
베테랑이고 나이도 어느 정도 있었던 록펠은 그녀의 얼굴이 반반했던 건 인정했으나 설익은 풋풋함 때문에 자신의 취향은 아니었었다.
하지만 지금을 봐라.
2년이 지나고 성숙미까지 더해진 그녀는 어떤 남자가 봐도 군침을 흘릴 만큼 절세미녀가 되어 있었다.
록펠에게 담긴 진심을 읽은 셰릴이 가슴을 손으로 가리고 조신하게 인사했다.
“무척이나 감사합니다만, 아까 했던 말이 농담은 아니었습니다. 데이몬 백작님은 제가 모시는 주인. 특히나 크래스 폴리스 안에서 그분에 대한 하칭(下?)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난감해진 록펠이 잠시 입을 떼지 못하며 말을 고르고 골라 내뱉었다.
“그러면…데이몬님께 안내해주게.”
그로서는 최대한의 타협이었고, 사정을 알고 있는 셰릴도 더 말을 붙이지 않고 몸을 돌렸다.
“따라오시지요.”
셰릴의 뒤를 따르니 심사관도 딱히 말이 없었다.
도시에 입장한 그는 바로 셰릴에게 안부를 물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느냐? 이 거대한 도시는 또 어떻게 된 것이고.”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습니다.”
성의있는 대답은 아니었다.
말을 붙이는 데 실패한 록펠은 하는 수없이 크래스 폴리스의 구경하면서 시각적인 정보라도 얻기 위해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허어…”
도시의 규모는 상당했다.
캘리알 성이랑 비교하면 조금 작은 수준?
그래도 대부분이 새로 지어진 건물이라 그런지 세련된 맛이 있었다.
게다가 도시 전체가 상업단지여서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들로 온통 북새통을 이루었다.
“예전의 페이튼 시장이 아닙니다. 현재 판타지아 대륙의 물류 흐름의 중심지로 떠오르고 있죠.”
셰릴의 목소리엔 숨길 수 없는 자부심이 묻어나왔다.
그럴만하다고 생각한 록펠도 이견을 제시하지 않고 침묵으로 동의했다.
“그러면 데이몬님을 뵈려면 어디로 가야하지?”
“역참으로 가야 합니다. 페이튼 지구를 벗어나서 마녀의 숲으로 이동해야 하거든요.”
“마녀의 숲?”
록펠의 목소리의 경계심이 담겼다.
그도 그럴 것이 구시대적 사고를 가지고 있는 그의 뇌리에 마녀의 숲이란 몬스터들이 창궐하고 마녀가 인체실험을 하는 장소였으니까.
“안심하셔도 됩니다. 몬스터는 없으니까요. 이미 개발이 다 끝났습니다.”
“…믿겠네.”
말을 하는 사이에 역참에 도달한 둘.
직원은 셰릴을 알아보고 가장 빠른 종마 두 필을 주었다.
“말 탈 줄 아시죠?”
“…나 기사라네.”
“괜한 소리를 했네요.”
그대로 말을 타고 달렸다.
그리고 록펠은 또 한 번 놀랐다.
“기, 길이!”
페이튼 장원에서 크래스 장원까지 가는 길이 깔끔한 석재타일로 닦여 있었다.
돌로 길을 만드는 게 얼마나 힘든지는 그도 잘 알고 있다.
당장 캘리알 성만 해도 영주의 저택 주변에만 석재타일이 깔려 있었으니 말이다.
“뭘 그리 놀라시죠? 북부 전체를 아우르는 드넓은 도시입니다. 지역구 간에 유기적인 흐름을 위해서는 편리한 교통이 필수라는 건 저보다 더 잘 아실 텐데요.”
알고는 있지만 이걸 현실로 구현하는 건 다른 문제.
도대체 데이몬 공자는 어떻게 2년이라는 단기간에 이런 거대 공사를 성공시킬 수 있었단 말인가?
노예를 1만 명을 사서 2년 내내 잠도 안 자고 굴려도 이 정도 건축과 토목공사는 견적이 안 나온다.
“어떻게…”
“크래스 지구입니다. 문화지구로써 도시의 유행이 모두 여기서 발생하죠.”
얼마 달리지도 않았는데 크래스 장원이란다.
역시나 자신이 알고 있던 깡촌 장원은 없었다.
깔끔히 다듬어진 목재로 이루어진 수많은 건물.
하늘 높이 힘찬 물줄기를 내뿜는 분수대 주변에서는 세련된 복장의 아이들과 여인들이 즐겁게 떠들며 놀고 있었고.
광대들과 음악가, 화가들이 곳곳에서 자신들의 특기를 살리며 크래스 폴리스를 살찌우고 있었다.
“세상에…”
아까 페이튼 지구를 볼 때까지만 해도 아직은 캘리알 성보다는 덩치가 작다고 생각했던 록펠.
이제는 그 생각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크래스 지구 하나만 해도 로이의 세력을 모두 합친 것보다 거대했으니.
아까 쥐 상의 평민 사내가 갔던 릭톤 지구도 이 정도의 크기라면, 데이몬은 사실상 세 개의 성을 소유한 대영주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아직도 그 성장세는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는 중.
록펠의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이제 마녀의 숲입니다.”
마녀의 숲은 크래스 지구를 지나자마자였다.
울창한 산림으로 입장하자 록펠은 저도 모르게 몸을 팽팽히 긴장시켰지만, 이내 쓸데없는 짓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어…”
“데이몬 캐슬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아름다운 성이었다.
온통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조각 같은 백옥성이 숲 가운데에 우뚝 솟아있었다.
시냇물 흐르는 소리가 정취를 돋우었고 정원사가 공들였음이 분명한 색색의 꽃들이 성으로 향하는 방문객의 눈을 즐겁게 했다.
“대체 이게…”
“들어오시죠.”
드르르륵
성안에는 그 흔한 경비병도 없었는데도 록펠은 그 어느 때보다도 위축되었다.
그리고 수치스러웠다.
망나니라 불리는 막내아들은 대륙 역사에 한 획을 긋고 있는 중인데.
시골에서 눈 닫고 귀 닫은 자신의 주군과 첫째 제임스는 바로 옆에서 잠룡이 승천하려는 것도 모른 채로 자기들끼리 박터지게 싸우고만 있었으니 원.
경비병은 없었지만 성안에서 집안일을 하는 듯한 하녀들은 꽤 많았다.
그리고 그 여인들을 본 록펠은 평상시라면 절대 하지 않을 말을 꺼냈다.
“여인들이…하나같이 미인이구나.”
성욕에 지배당할 나이도 아닌 그였지만 하나같이 눈에 번쩍 뜨일 여인들이 이렇게 한 성에 모여있는 건 처음 봤다.
절세미인인 셰릴도 여기서는 평범한 수준이었으니.
만인지상의 갈리아 제국 황제도 이 정도의 미녀들을 한데 모으긴 힘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풍만한 젖가슴과 가녀린 허리, 이와 대조되는 포동포동한 둔부와 농염한 허벅지까지.
몸을 조금씩 뒤트는 것만으로도 치명적인 매력을 발산하는 여인들의 향연에 록펠의 두 눈이 어지러워지려는 찰나,
“그렇게 노골적으로 내 여자들을 쳐다보면 조금 곤란한데.”
“!”
뒤에서 들려오는 중저음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홱 돌렸고.
그곳에는 건장한 체격의 남자가 하얀 치아를 드러내고 빙글거리며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