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화 〉 파티에는 참여해주는 게 인지상정
* * *
“누구?”
누구라고 하려다가 남자의 말을 떠올리고 신분을 유추할 수 있었다.
성안을 당당히 활보하면서 여인들을 거리낌 없이 본인의 여자라고 말하는 자신감.
심지어 이견을 제시하지 않고 스스로가 저 남자의 소유물이라고 인정하는 여인들까지.
“데, 데이몬님?”
“그래, 오랜만이야. 나 너 본 적 있는 거 같은데.”
록펠 또한 데이몬을 본성 훈련장에서 마주친 적은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데이몬과 지금의 데이몬은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키가 10cm는 넘게 컸으며 딱 필요한 부위만 탄탄하게 발달한 근육하며 훈훈한 얼굴까지.
분명 이마 위에는 여전히 레벨 1이 떠 있는데 절대 저렙이 아닌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여긴 무슨 일로 왔어? 일단 들어와.”
셰릴까지 포함해서 셋은 응접실로 들어왔다.
데이몬 캐슬은 밖에서도 아름다웠지만, 안도 만만치 않았다.
응접실의 화려한 카펫과 고급스러움이 가득한 가구를 훑어보는 릭톤의 귓가에 데이몬의 목소리가 들렸다.
“갈리아에서 사 온 것들이야. 괜찮지?”
역시나 갈리아와 긴밀한 교역을 하고 있었구나.
윌렛 왕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 숨구멍을 뚫어놓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로이나 제임스가 이곳을 치기는 상당히 부담스러워진다.
생각이 많아진 록펠의 앞에 어느새 따뜻한 차가 한 잔 놓여졌다.
상당히 고급스러운 찻잔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차를 호로록 마신 데이몬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여길 다 찾아왔지?”
이미 록펠의 머릿속에서 데이몬을 암살하고 셰릴을 납치하는 등의 계획은 날아간 지 오래였다.
비록 지금도 데이몬의 머리 위에 뜬 레벨이 1이라고는 하나, 이 거대한 도시를 보고도 손을 쓸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자신의 뒤에 부동자세로 서 있는 셰릴 또한 레벨 가리개 때문에 레벨은 보이지 않지만, 예전보다 훨씬 강해졌음이 피부로 느껴졌다.
순순히 가슴 속에서 로이 백작님이 써준 서신을 꺼내 그에게 건네주는 록펠.
“저희 백작님께서 형제간의 우애를 위해서 안부도 물을 겸 서신을 하나 써주셨습니다. 읽어보시죠.”
후계전쟁을 하는 사이끼리 안부를 묻는다는 게 무슨 개소리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귀족들 간에는 이런 입에 발린 말도 중요한 법.
역시나 데이몬도 록펠의 말을 그러려니 하며 흘려듣고 서신을 받아 이를 펼쳤다.
록펠은 로이의 서신을 보는 데이몬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읽는 내내 그의 한쪽 입꼬리가 점점 올라가고 있었다.
탁소리나게 종이를 접은 데이몬이 록펠에게 물었다.
“록펠 경, 그대는 서신의 내용을 알고 있는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전령이 되어서 그 내용을 확인할 순 없는 노릇이지요.”
“기사의 명예를 걸고 말인가?”
기사의 명예는 함부로 거는 게 아닌데.
일단은 찔릴 게 없기에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제 명예를 걸고 내용을 알지 못합니다.”
“그렇군.”
고개를 끄덕인 데이몬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명백한 축객령.
그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혹시 답신이라든지 답언을 전해드리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아아, 괜찮아. 필요하면 우리 쪽도 전령을 보내면 되니까.”
“알겠습니다.”
절도있게 고개를 끄덕이고 나가는 록펠의 뒤에서 데이몬의 목소리가 들린다.
“기왕 온 김에 도시 구경도 좀 하고 가라고. 우물 안 개구리들도 넓은 세상을 좀 알아야 하지 않겠어?”
자신이 모시는 주인을 조롱하는 게 분명한 말투였지만, 근거 없는 말은 아니기에 록펠은 그저 고개만 끄덕이고 데이몬 캐슬을 나왔다.
“히히히힝!”
말을 탄 록펠.
셰릴이 성문 밖까지 나와서 배웅한다.
“그럼 가보겠네.”
“네, 살펴가십시오. 그리고…”
말꼬리를 흐리다가,
“지금이라도 동료들을 이끌고 데이몬 주인님에게 투신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셰릴의 충고에는 진정성이 느껴졌기에 록펠도 그녀에게 말해주었다.
“자네 아버지께서 같은 기사를 무참히 썰어버린 순간, 그럴 수 있는 시기는 지나갔네.”
“…네?”
“자네 아버지. 완전히 제임스 진영의 선봉장이 되었어. 그의 무엇을 보고 맹목적으로 충성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더군.”
영지 싸움에 참여하는 기사들은 상대측 기사들과 생사결을 벌이는 경우는 많이 없다.
그런 경우는 형제간의 사이가 극도로 좋지 않아서 패배 진영 세력의 몰살이 확실시된 경우뿐.
이외에는 어차피 집안들끼리 싸움이고 집안싸움이 끝나면 기사들은 다시 모여서 술이나 한잔하는 사이기에 손속을 과하게 쓰지 않는 것이 정석이다.
보여주기식으로 농노병들 목이나 몇 개 배고 기사들끼리 칼이나 몇 번 맞대다가 패색이 짙어지면 항복하는 게 일반적인 영지전.
하지만 눈앞에서 자신에게 충고하는 아름다운 은발적안 여기사 셰릴의 아버지 핀돌프 몬두르는 영지 전쟁 첫날에 자신이 가장 아끼던 부하를 무참하게 베었으니.
베르너 영지 전쟁이 가열된 데에는 가문의 수호자라 일컬어지던 몬두르 기사단장의 기행이 주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버지가요?”
“그래. 란셀 알지? 단장님과 호형호제하던 그분 말이다.”
“알죠. 제 삼촌이나 다름없는걸요.”
“첫날에 네 아버지의 검에 몸이 두 조각 나서 죽었다.”
“그, 그럴 리가 없어요!”
“난 사실만을 말할 뿐이네. 정 의심되면 사람을 써서 알아보든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놀란 셰릴을 잠시 응시하다가 몸을 돌린 그는 말을 걷게 했다.
아직도 충격이 가시지 않아 보이는 그녀를 뒤로하며 그는 마지막 한마디를 던졌다.
“몸조심하게. 기사들도 자기 목 감수하기 힘든 시기야. 히럇!”
다그닥거리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록펠의 신형이 점점 멀어졌다.
* * *
손에 잡힌 편지를 계속해서 읽고 있었다.
크래스 폴리스를 건설한 지 일 년.
내 머릿속 계획대로 도시 건설은 순조로웠다.
페이튼 장원를 먹은 후, 나는 일사천리로 계획을 밀어붙였다.
영지를 빠져나간 사람들을 막지 않고 빈집에 사람들을 몰아넣고 반대편 구역을 통째로 밀고 새로운 상업단지를 형성했다.
대충 천막이나 지어서 장사하던 장사꾼들에게는 번듯한 나무집으로 가게를 차려주었고.
다 썩어가는 나루터를 대대적으로 밀고 큰 항구까진 아니더라도 쓸만한 교역항를 지어놓았다.
애초에 페이튼의 지리학적 위치는 교역에 적합했기에 한 번 제대로 포장을 해놓자 사람들이 꼬이는 건 시간문제였다.
무엇보다 페이튼 상업단지가 번성하게 된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갈리아 제국에서 들어오는 이국적인 물품들 때문이었다.
나는 소피아에게 리만 표국의 재창단을 제안했고.
본래 자신들의 전부였던 표국을 다시 열 수 있다는 말에 소피아를 위시한 귀녀대원들은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창단식에서 소피아는 눈물을 펑펑 쏟으며 내 발에 입을 맞췄다.
“흐흑…주인님…당신께서 베풀어주신 은혜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예전에 내가 저년에 목구멍에 좆을 박아서 죽일 뻔한 건 기억도 안 나는지 꺼이꺼이 울면서 감격하는 소피아를 표국의 국주로 임명했다.
그날 밤, 나는 소피아의 극진한 보지 봉사를 받으며 내 좆을 난폭하게 휘둘렀다.
그녀는 흡사 강간과 다름없는 난폭한 성행위를 당하면서도 입으로 끊임없이 감사함를 외쳤으니.
나름 나쁘지 않은 밤이었다.
아무튼, 소피아와 귀녀대원들이 재창단한 리만표국.
올리비아가 모아놓았던 재산도 있었고 모나스 시티에서 현무단 하나를 통째로 갈취하기도 했으니 초기투자금은 문제가 없었다.
게다가 리만 표국은 갈리아에서도 인지도가 높아서 그 인맥이 어디 가지 않았으니.
이를 통해 고정적인 거래처를 마련, 마녀의 숲을 경유한 제국특산품들은 페이튼 상업지구까지 안전하게 운반되었다.
교역로를 통해 영지에 활기가 불어넣어지자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이에 맞춰 릭톤 장원에 거대한 농업과 공업 플랜트를 세웠다.
템프강 북부에는 남아도는 게 땅이었으니 농, 공업용지를 배분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기술자들도 하나둘씩 모이고 문화를 부흥시킬 예술가들도 모여들었다.
물밀듯이 밀려들어 오는 외지인들을 감당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했던 건 역시나 내 부하들이었다.
몬스터로드로 인해 세뇌된 중갑대들은 사람들이 잠든 시각에만 빠르게 움직여 공사를 시행했다.
몬스터를 부린다는 게 알려지면 여러모로 골치 아파지기 때문이었다.
야밤에만 공사를 진행했음에도 이들의 괴랄한 신체 능력은 인간 1천 명이 한 달 동안 밤새 할 양을 하루에 끝낼 정도의 효율을 보였고.
그 결과 페이튼릭톤크래스마녀의숲을 잇는 도로와 각 지역구의 수많은 건물이 1년 이내에 뚝딱 지어질 수 있었다.
육림대와 월랑대가 치안 담당.
귀녀대가 행정과 교역담당.
중갑대가 건축과 토목담당.
마지막으로 녹귀대는 온갖 더러운 잡무 담당.
여기서 잡무라는 건 중범죄를 저지른 녀석들을 납치해와서 TS녀로 만드는 작업을 뜻한다.
올리비아는 내 명령에 따라 TS1 알약의 생산을 멈추지 않았고 교역이 활성화되면서부터 재료를 구하기는 더 쉬워졌다.
따라서 도시에 해악을 끼치는 녀석들이 보이면 녹귀대가 출동해 보이는 족족 납치해서 TS해버렸으니.
남자면 TS, 여자면 윤간해버리고 지정된 창관에 투입.
창녀가 된 여인들은 무료보지오픈을 통해 밀려드는 외지 남자들의 밤을 책임졌다.
아무튼, 이렇게 1년 사이에 템프강 북부를 온전히 손에 넣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 내 손에는 크래스 장원으로 쫓겨나기 전에 봤던 그 재수 없는 둘째 형의 서신이 들려 있다.
“주인님, 뭐라고 쓰여 있나요?”
하녀복을 입은 채 옆에서 다소곳이 서 있는 메이가 나에게 물었다.
1년 동안 키가 약간 더 자라고 가슴도 어느새 꽉 찬 B컵에서 C컵을 넉넉하게 돌파한 메이의 아름다운 푸른 눈망울이 나를 보고 반짝였다.
“궁금해?”
“네.”
“보지 대주면 보여줄게.”
내가 템프강 북부의 지배자가 되었다고 해서 그사이에 인성이 뒤바뀌거나 그러진 않는다.
여전히 난 저렴하고 사악했으며 도덕과는 거리가 먼 인간이다.
“굳이 그렇게 요청하지 않으셔도 되잖아요.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사용하세요.”
그러면서 망설임 없이 하녀복을 내린 메이.
뽀얀 궁둥이와 그 사이에 고개 내민 살색 균열 대번에 모습을 보였다.
“됐어. 그냥 읽어봐.”
옷을 다시 입는 것도 귀찮았는지 하녀복을 한쪽에 벗어던진 채로 알몸으로 서신을 받은 메이가 차분히 글씨를 읽었다.
그사이에 나는 집중하는 그녀의 가슴팍에 손을 넣고 젖통을 주무르면서 같이 읽었다.
내용은 이랬다.
사랑하는 내 동생 데이몬에게
오랜만이구나.
잘 지내고 있느냐?
근래에 북쪽에서 잘 살아 있다는 소문은 들었다.
형이 되가지고서 그동안 동생에게 무심했던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구나.
그런 의미로 캘리알 성에서 파티라도 개최할까 하니 와줬으면 한다.
파티 날짜는 전적으로 네가 오는 날짜에 맞추마.
p.s. 레이디 셰릴도 꼭 데리고 와라.
“…재밌는 편지네요.”
짤막한 편지를 읽은 메이의 한줄평이었다.
내가 이 편지를 다른 여인들도 아닌 메이에게 보여준 이유는 간단하다.
다른 여인들과 달리 셰릴과 메이는 베르너 백작가에서 내가 얼마나 수모를 겪었는지 잘 아는 이들이기 때문.
셰릴도 록펠 녀석을 배웅해주고 오면 이 편지를 보여줄 생각이었다.
“록펠 경이 운이 좋았습니다.”
“맞아. 만약에 편지 내용을 알고도 나한테 전달한 거였으면 몸 없이 목만 돌려보내려고 했는데 말이야.”
로이가 형제 운운하며 말도 안 되는 편지를 보낸 이유는 뻔했다.
영지전이 날이 갈수록 힘들어지는 와중에 템프강 북부 세력과 동맹을 맺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기 싫어서겠지.
하지만…과연 저 욕심 많은 형이 대등한 관계의 동맹을 원할까?
“셰릴까지 데리고 오라는 거 봐서는 무슨 생각인지 뻔하군.”
그의 머릿속에 나는 아무것도 없는 푼수이자 한심한 놈으로 기억되어 있을 테지.
원래라면 무시하려고 했지만.
“감히 추신에 셰릴을 데려오라는 말을 봤으니 안 갈 수가 없네.”
로이, 네가 스스로 매를 버는구나.
위에 두 형이 서로 싸우다 공멸하면 어부지리를 취하려던 내 계획을 약간 비틀었다.
“메이.”
“네.”
“짐 챙겨라. 캘리알 성으로 간다.”
파티 초대를 받았으니 응당 그에 응해주는 게 인지상정.
오랜만에 형을 볼 생각에 가슴이 무척이나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