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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5화 〉 반드시 따먹을 생각이다



〈 215화 〉 반드시 따먹을 생각이다

* * *

내 말이 끝난 회의실에는 잠깐의 적막이 맴돌았다.

하지만 아주 잠시뿐이었고, 이내 기사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백작님, 갑자기 이렇게 공격하다니요.”

“몬두르 성은 소드마스터인 핀돌프 기사단장과 그의 추종자들이 단단히 수비하고 있는 곳입니다.”

“맞습니다. 만에 하나라도 공격을 하다가 실패하면 캘리알 성은 뒤가 없어집니다.”

뒤가 없으라고 총공격하라는 건데.

물론 이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진 않았다.

“그럼 언제까지 여기서 죽치고만 있을 거야? 셰릴이 크래스 폴리스 병력을 움직여주기로 약조했네. 저들이 베르너 성을 치면 우린 몬두르 성을 동시타격하면 돼.”

크래스 폴리스 얘기가 나오자 모두 합죽이가 된다.

표정은 장난감 뺏긴 7살 애새끼마냥 볼살에 불만이 덕지덕지 붙어있다.

하지만 뭐라고 할 말은 없을 거다.

더 나은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는 놈이 없기 때문이다.

“이대로 가면 우리 캘리알 성은 제임스 형님에 의해서 고립되다가 결국 끝날 거라는 건 여기 있는 기사들도 모두 알고 있을 거야. 이런 와중에도 내 명령에 반대할 수 있다는 게 놀라워.”

록펠이 일어나더니만 대표로 말했다.

“크래스 폴리스에 가봤던 경험자로서 그곳에 상당한 무력을 갖춘 병력이 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다만.”

“다만?”

“레이디 셰릴을…”

“백작 부인이라고 칭해라. 내 아내가 되었으니까.”

“…백작 부인을 정말 믿을 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사실 저는 전 베르너 백작 부인을 현 베르너 백작 부인께 맡기신 것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록펠의 질문이 다른 기사들의 공감을 이끌어냈는지 다들 고개를 끄덕거린다.

이쯤 되서 한 번 화를 내줘야지 말을 들어먹겠군.

주먹으로 책상을 강하게 치면서 일부러 분을 끌어올렸다.

“이것도 안 돼, 저것도 안 돼. 어쩌자는 말이야? 신용? 좋지. 어느 세월에! 어느 세월에 셰릴을 검증할 셈인데? 그 사이에 캘리알 주변 장원은 다 먹히고 고립되면? 그때 가서도 우리가 폴리스 세력과 대등한 동맹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

맨날 검만 휘두르는 놈들이 말빨로 날 누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면 안 되지.

게다가 저들은 나를 백작가의 정당한 후계자 로이로 생각하고 있으니 명령을 거부할 수 없다.

“내 말이 틀려? 틀리다면 시정해주도록. 내 귀는 열려있으니까.”

예상대로 아무도 말을 못 한다.

이래서 군사, 즉 머리 쓰는 놈이 필요하다는 거다.

로이 측은 외가가 전통 기사가문이여서 그런지 죄다 근육몬들 뿐이었다.

“빨리 말해. 별다른 반론이 없으면 내일 당장 몬두르 성 공성에 착수할라니까.”

1분가량을 기다려줬는데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내 마음을 바꿀 시간은 지났다. 다들 회의가 끝나자마자 출진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내일 해가 뜨자마자 출발한다.”

“……”

“대답?”

“…알겠습니다.”

대답이 영 시원찮지만 나도 이놈들을 소모품으로 데려가는 것이기에 크게 문제 삼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따로 확인할 게 있었다.

“록펠, 너는 집무실로 오도록.”

여태까지 살펴본 결과, 그래도 록펠이 나이도 적당하고 실력도 적당하고 이곳에서는 머리도 제일 잘 돌아가는 듯했다.

그래서 전령으로 크래스 폴리스까지 온 것이겠지.

아무튼 간에, 나는 록펠을 집무실로 불러서 개인 면담 시간을 가졌다.

“와인 한잔할래?”

“괜찮습니다.”

“하긴. 기사가 무슨 술이야. 그렇지?”

그런데 기사인 로이의 집무실에 왜 와인이 있는 건진 모르겠네.

하여간 이놈도 정상적으로 산 것 같지는 않다.

어차피 죽은 놈이니 더 신경 쓸 필요는 없다.

“록펠, 너를 부른 이유는 그동안 제임스와의 전쟁이 어떻게 진행됐는지 듣기 위해서야.”

“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내일 총공격을 가는데 다른 사람의 입으로 한번 쭉 듣고 정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사실 몰라서 질문했지만 록펠은 별다른 의심없이 입을 열었다.

“백작님도 아시다시피 승계 싸움이 처음부터 불리한 건 아니었습니다. 전 베르너 백작님이 타계하시자마자 마법사들은 당연히 제임스 도련님 쪽으로 갔지만 기사들은 팔 할가량이 저희 쪽으로 왔지요.”

저 말대로라면 로이가 훨씬 유리했던 게 맞다.

판타지아 대륙에서도 마법사와 기사의 수는 1:5정도로 기사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으니까.

심지어 저건 마탑이 있는 제국에서 계산한 비율이고 변방 소국 윌렛왕국에서도 깡촌 베르너 백작가는 마법사가 애초에 10명 이내였으니 사실상 대부분의 전력이 로이에게 왔다는 얘기다.

“저희 또한 상황을 낙관적으로 생각했지요. 하지만 핀돌프 몬두르 기사단장이 제임스 도련님을 지지하기로 하면서 상황이 예기치 않게 흘러갔습니다.”

셰릴의 아버지이기도 한 핀돌프 기사단장의 변심은 전에도 몇 번씩 들었었는데, 나는 이 부분이 가장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심지어 나는 한 번뿐이긴 하지만 핀돌프 기사단장을 실제로 본 적이 있었다.

교과서에서 튀어나온 듯한 엄격하고 전형적인 기사였다.

그런데 왜 그런 기사가 난데없이 제국 마탑 출신의 유학파 마법사 제임스 베르너를 지지했을까?

“무척이나 당황스러웠으나, 그래도 대세는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했지요. 그 다음부터는 백작님도 아실 겁니다. 템프강 남부평원 전투에서 핀돌프 기사단장님은 약이라도 잘못 먹은 것처럼 한때 부하였던 기사들을 학살했고 그 이후로 기세가 꺾여서 저희는 캘리알 성에 고립되었습니다.”

록펠의 말을 듣던 나는 신경쓰이는 점이 있었다.

“약이라도 잘못 먹은 것 같았다고?”

“네, 전장에서 만날 때마다 저희 쪽에서 몇번이나 대화를 시도했는데도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자비없이 옛 부하들을 썰어버렸으깐요.”

정말 이상하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옛 부하들과 대화 한마디 안 하고 그냥 썰어버렸다고?

철천지 원수와도 외나무다리에서 만나면 뭐라고 말은 하고 죽이는 법이다.

비록 잠깐이었지만 내가 봤던 기사단장은 엄하기는 했어도 냉정한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

“…알았어. 나가봐. 내일까지 출발할 준비 끝내놓고.”

“네.”

록펠이 나가자 나는 집무실 책상에 두 발을 올려놓고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겼다.

제임스 베르너.

로이 형과는 다르게 자신을 숨기느데 능숙한 형이었다.

애초에 백작가에서도 나를 갈구는 건 주로 둘째 형이었지, 첫째 형은 관심조차 없었다.

두 어머니의 성향 차이도 확실하다.

둘 다 나를 싫어하는 건 마찬가지지만 대하는 태도는 명백히 달랐다.

둘째 엄마는 눈앞에서 나를 비꼬고 조롱했던 방면, 첫째 엄마는 소름 돋게도 나를 감싸주고 변호해줬다.

그런데 막상 크래스 장원에 독약을 보내겠다는 제안은 둘째 엄마도 아닌 첫째 엄마의 입에서 나왔으니.

앞과 뒤가 달라도 이렇게 다른 년이 없다.

만약에 첫째 형도 그 피를 물려받았으면 분명 구린 점을 숨기고 있을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빙의한 내가 제임스 형을 처음 본 건 가족 식사 때였다.

그때 나는 새롬에게서 받은 후보자 스킬 ‘악마의 눈’으로 가족 전체를 스캔해봤는데.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은 제임스 형이었다.

이유는 카르마가 비정상적으로 높았기 때문.

첫째 형은 마법사고 자주 바깥으로 시찰을 나가는 로이와는 달리 안에서 마법 연구만 하는데 왜 이렇게 카르마가 높을까?

그런 생각을 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그 의문은 내가 크래스 장원으로 쫓겨나고 나서야 얼추 풀렸다.

마녀의 숲에서 링링을 구출하고 제국의 노예상인들을 잡았을 때, 놀랍게도 제임스 형님의 얘기가 나왔었다.

저들은 노예시장에서 공급받은 노예를 마탑에 뿌리고 또 마녀의 숲을 넘어서 윌렛왕국의 베르너 백작령에 갖다 바친다고 했다.

거래자는 바로 제임스 베르너.

놀랍게도 거래 물품은 첫째 형이 살고 있는 베르너 본성의 영지민이었다.

그 당시에는 아마 아버지가 살아계셨는데.

본인이 통치할 땅의 영지민을 노예로 거래하는 걸 보고 모태악인인 나도 순간 위기감을 느낄 정도였다.

“즉시 전력이 되는 검투사 노예들을 사고 있었지 아마.”

검투사들은 일반 농노병과는 아예 궤가 다르다.

내가 모나스 시티 검투장에서 직접 몸을 부대끼며 느낀 바로는 싸우는데 형식이 없는 놈들이었다.

용병 중에서도 질나쁜 용병들이 이 녀석들과 흡사하다.

기사들은 평상시의 고된 수련으로 일구어낸 고강한 마나와 정석적인 검법으로 찍어누르는 스타일.

반면에 검투사 놈들은 생존에 특화된 막싸움을 선호하기에 눈 찌르기나 낭심차기 등의 비겁한 짓도 서슴지 않는다.

저렇게 치사한 짓을 하고 못 싸우면 몰라.

싸우기도 더럽게 잘 싸운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왜 록펠은 검투사들에 대한 언급이 없었던 걸까?”

이야기를 들어보면 록펠이 제임스 공작과의 전투에서 검투사들을 봤다는 말은 없다.

만약에라도 봤으면 분명 무슨 얘기라도 나왔을 텐데 말이다.

그저 핀돌프 기사단장 얘기뿐이다.

종합해보면 제임스는 그동안 몰래 수입해왔던 검투사들은 영지전에 투입조차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굳이 쓸데없이 외국의 검투노예들을 사들였을까?

어째서 천생 기사 핀돌프 몬두르는 이해 못 할 배신을 한 걸까?

온갖 의문들이 망망대해와 같은 내 머릿속을 부유했고, 나는 뜰채로 그 조각들을 하나씩 건져내 차곡차곡 맞추기 시작했다.

단서들이 모이고 모여서 하나의 형태를 이루었는데 이를 보고 내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였다.

“새롬.”

[무슨 일이시죠?]

상당히 오랜만의 호출이다.

반갑기도 해서 일상적인 대화로 물꼬를 텄다.

“뭐하고 있었냐?”

[명절이라서 고향에 내려왔습니다.]

“마계에도 명절이 있어?”

[예.]

“도대체 거긴 어떻게 된 동네야?”

[궁금하면 올라와 보세요.]

틱틱대는 건 여전하군.

본론부터 말해야겠다.

“새롬, 제임스가 악마후보자야?”

[그런 건 왜 물어보시는지?]

“날 지켜보고 있었다면 내가 왜 이걸 물어보는지 알 텐데?”

내가 내린 결론은 이거다.

제임스 베르너.

내 첫째 형님은 나처럼 악마후보자일 가능성이 있었다.

그리고 핀돌프 기사단장은 어떠한 악마후보자 스킬에 의해 그에게 구속된 상태다.

형이 악마후보자라면 카르마를 쌓아야 할 테니 영지민들을 노예로 판 것도 이해가 간다.

내 말을 들은 새롬은 오랫동안 말이 없다가 짧게 한마디 한다.

[제임스 베르너가 악마후보자인지 아닌지는 알려드릴 수 없어요.]

오늘도 새롬은 열심히 철벽을 친다.

저러다가 내가 마계 올라가면 어떻게 하려는지.

[그나저나 송편 맛있네요.]

“새롬, 내가 지금 네 송편 먹는 거나 듣자고…”

[지옥에서는 송편을 전문적으로 만들어주는 사람들이 있어요. 정확히 말하면 언데드라고 할까요? 스켈레톤들을 부리는 사령술사들이 명절 때마다 24시간 송편을 만들곤 합니다. 공장보다도 효율성이 좋죠.]

“!”

다소 뜬금없는 설명.

새롬은 설명충이 아니다.

정보 하나의 소중함을 아는 계집이다.

그런 년이 갑자기 주절주절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이건 분명히 새롬이 나에게 도움을 주려고 날린 메시지다.

대놓고 제임스 베르너가 후보자인지는 알려줄 수 없지만, 적어도 사령술에 해당하는 스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돌려서 말했음이 분명했다.

마계에서도 흔히 쓰이는 스킬 사령술.

제임스가 어떻게 핀돌프 기사단장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는지 간접적으로 알려준 셈이다.

마계스킬을 썼으니 제임스의 정체가 후보자인지에 대한 대답도 같이했고 말이다.

“새롬, 자꾸 그렇게 나한테 비협조적으로 굴면 각오해.”

혹시라도 우리 대화를 듣고 있는 상위 마왕들을 위한 마무리.

이런 어색한 연기에 속을지는 모르겠다만, 중요한 건 형식이니까.

나중에라도 문제의 소지가 생기면 이렇게라도 포장한 것과 안 한 것의 차이는 극명하다.

[아이고, 무서워 죽겠네요.]

그리고 날 도와준 것과는 별개로 저년은 내가 마계에서 반드시 따먹을 생각이다.

* * *



사상 최악의 주인공〈 215화 〉 반드시 따먹을 생각이다